<3> 서구 곳곳 일제 군사시설 현존[치평동 일대 항공기지 흔적]민간 항공 부지, 1942년 군 비행장 변경현 상무소각장·서부경찰서·DJ센터 일대활주로·숙소 18채 등 총 면적 110만㎡건설 과정 조선인 강제 동원해 노동력 착취5·18땐 시민 탄압 ‘군부 주둔지’로도 사용
광주시 서구 일대 곳곳에는 일제강점기 항공기지의 흔적이 남아있다.
상무지구 등이 개발되면서 활주로와 지휘부 시설 등 항공기지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서구 화정동과 치평동 일대 탄약고와 연료고 등 군사 시설은 아직도 건재해 일제 강점기를 증언하고 있다.
광주 항공기지의 활주로는 현재 상무소각장과 광주서부경찰서, 김대중컨벤션센터 일대에 조성돼 있었다. 해방 직전 기준으로 항공기지의 총 면적은 110만㎡에 달했으며 활주로와 숙소 등 건물 18채, 창고 10채, 부속가옥 5채, 비행기 은폐시설 18개 등이 있었다.
광주에 비행장이 처음 들어선 시점은 1939년 11월 25일로, 일명 치평리비행장은 활주로 길이 900m였다.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서울과 광주를 오가는 민간 항공기를 운영하는 등 애초에는 군용부지가 아니었다.
일제는 1941년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직후인 1942년 치평리비행장을 일본 육군에게 넘겼다.
이후 일본 본토 이즈미시에 있던 해군항공대 항공기 등을 옮겨 오면서 1945년 6월 ‘광주해군항공대’를 편성했다. 이 때 활주로도 새로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며, 활주로 길이를 기존보다 600m 늘어난 1500m로 조성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연구결과다.
일제는 지금의 치평동 5·18기념공원 일대에 방공호 등 지휘부 시설을 만들고 화정동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일대에 항공유 등 연료고를, 벽진동 사월산에 탄약고를 건설했다.
해군 항공대가 해안가도 아닌 광주에 들어선 이유로 전문가들은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뛰어들 비행사들을 직접 양성하기 위해서였다고 분석하고 있다.
일제는 아·태전쟁 당시 광주·전남 지역에 미군이 직접 상륙할 경우 전화(戰禍)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특히 1944년 10월 미군이 필리핀에 상륙하자 일제는 제주도를 중심으로 한반도 남서해안 지역에 군 비행장을 잇따라 건설하며 방비를 강화하고자 했다.
광주항공기지는 일제의 해군 항공대 조종사 양성 제도인 ‘요카렌’(予科練) 양성기지가 됐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요카렌은 일본 해군 비행예과 연습생이나 해군소년항공병을 줄여 부르는 말로, 일제 말기 부족한 조종사를 양성하기 위해 급조된 훈련제도다. 요카렌이 가미카제특공대원으로 동원됐던 것을 감안하면 광주에서 훈련받은 청년들이 자살특공대원이 됐을 가능성도 높은 것으로 전해진다.
비행장 건설 과정에서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노무자로 동원돼 노동력을 착취를 당한 아픔을 갖고 있다.
비행장 건설과 관련해 강제동원된 피해자의 수는 정확하게 기록된 바가 없다. 과거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파악한 ‘광주해군항공대’ 동원 피해자는 12명이지만, 실제로는 마을 인근 주민들을 닥치는대로 동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숙박 환경뿐 아니라 작업에 필요한 도구를 받지도 못하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중노동을 하며 수 개월씩을 견뎌내야 했다.
강제동원 피해자의 구술 기록 또한 남아있지 않으나, 화순에 살던 김세원씨가 남긴 자서전에 열악한 노동 환경을 짐작케 하는 글이 실려 있다.
김씨는 자서전에서 “1943년 강제동원된 아버지를 면회하러 겨울 광주비행장 건설 현장에 갔을 때를 ‘갈대 지붕은 하늘이 보여 눈보라가 함바(건설 현장에 마련된 식당) 안까지 새어 들어와 동상에 걸리고, 음식이 적어 굶주리며 일본놈 헌병의 감시 속에서 중노동에 혹사당하고 있어 추위와 굶주림에 여러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고 썼다.
한편 6·25전쟁 이후 상무지구와 쌍촌리 주변 지역은 군용지로 편입됐고, 1951년 미군 공병대가 상무지구를 훈련장으로 개조하면서 비행장은 철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았다.
광주 항공기지 부지는 1952년 상무대가 들어오면서 1964년 광산군 신촌리로 비행장을 이전하기 전까지 상무대비행장 등으로 이용됐다. 일제가 만든 군용 부지가 명맥을 이어가면서 결국 5·18민주화운동 때 광주시민을 탄압하는 군부의 주둔지로 이어진 것이다.
광주항공기지는 그 이후로도 40여년동안 이용되다 1995년 상무대가 장성군으로 이전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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