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 함께하는 바위 정원을 꿈꾸다

한겨레 2026. 5. 20.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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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덩골 정원의 상징인 원주암. 사진 원철 스님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4월 초순 무렵 6만평 규모를 자랑하는 양평 메덩골 정원을 찾았다. 진짜 한국 정원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전문해설사와 한나절을 함께하는 동안 화두 아닌 화두가 되면서 그 의문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메덩골 정원은 우리가 근현대 100여년 동안 남에게 내놓을 만한 한국 정원을 제대로 가지지 못했다는 설립자의 자기 반성에서 출발했다. 근래에 새로 조성한 개인 정원들은 중국 정원, 일본 정원, 혹은 서양식 정원을 오너의 취향에 따라 적당하게 혼합한, 정체성이 모호한 것이 대부분이라는 견해에 우리 일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꽃피는 산길, 남도길이라고 이름 붙인 곳을 지나서 돌 정원 구역에 이르자 뭔가 색다른 느낌이 닿아 왔다. 그래~ 바로 이거야! 한국 정원은 ‘바위 정원’에서 독자성을 찾을 수 있겠다는 나름의 중간 결론을 내렸다. 일단 재료가 풍부하다. 왜냐하면 국토의 대부분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유명한 산은 거의 암반 혹은 바위 능선을 자랑한다. 이름난 기도처는 모두 바위가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기(氣)가 센 공간이다. 요즘 대세인 ‘관악산 기 받기’ 등산이 MZ세대에 유행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메덩골 재예당(載藝堂, 예술을 담는 공간) 마당에는 ‘원주암’이라고 불리는 큰 바위가 자리 잡았다. 한옥의 편액은 경기도 여주 지역에서 3대를 이어오는 한학자이자 서예가인 사농(絲農) 정기중 선생의 글씨다. 사농은 여주 외사리 농부라고 스스로를 낮춘 호(號)라고 한다. 원주암은 정원의 주연 격인 바위인지라 메덩골 중심부에 자리 잡았다. 이끼와 함께 비바람에도 수십년을 견뎌낸 나즈막한, 그리고 가느다란 가지의 소나무까지 그대로 살린 채 먼 곳에서 바위를 통째로 조심조심 옮겨왔다. 물론 초대형 트레일러와 크레인까지 동원했다. 이런 배치의 영감을 얻은 곳은 전남 구례 지리산 천은사 마당에 있는 큰 바위라고 했다. 또 합천 해인사 백련암 원통전(圓通殿, 관세음보살 법당) 마당의 불면석(佛面石, 사각형 모양에 가까운 자연석)을 마주하면서 확신을 더하게 되었다. 덧붙인다면 불면석 앞은 본래 절벽이었다. 필요에 의해 축대를 쌓았고 경내를 넓히다 보니 현재 마당 가운데 자리 잡은 정원석이 되었다.

파청헌의 주련 글씨. 사진 원철 스님

또 다른 한옥 파청헌(把靑軒)의 명칭은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1330~?) 선생의 시 ‘파주대청산’(把酒對靑山, 술잔을 들고서 푸른 산을 마주한다)에서 인용했다. 낭만적인 이름의 출전을 확인하기 위해 마루 기둥에 달린 주련을 설명할 때는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운곡 선생은 고려 말 조선 초 시기에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였다. 어린 이방원(훗날 태종)에게 글을 가르친 인연으로 조선 개국 후 벼슬길에 나오기를 몇번 요청 받았으나 사양하고서 생의 마지막까지 은둔으로 일관하며 수행과 학문에 힘썼고 문집 ‘운곡시사’(耘谷詩史)를 남겼다. 묘역이 강원도 원주에 있다고 하니 오가는 길에 기회가 되면 들러봐야겠다.

파청헌 출구의 담장 끝은 자연산 바위로 마감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익숙한 조합이다. 담양 소쇄원 가장자리를 두른 담장 일부는 계곡을 가로지르는 통돌다리 위에 얹었다. 덕분에 허공에 띄워 놓은 듯한 담장 아래로 계곡물이 흐른다. 소쇄원 담장을 계곡이 아니라 마당으로 옮겨놓는다면 파청헌 담장처럼 바뀔 것이다. 그렇게 할 경우 통돌다리는 자연히 역할이 없어진다. 다시 용도를 찾아야 한다. 담장 마감재로 재배치한다면 담 쌓는 수고까지 일정 부분 덜어낼 수 있겠다. 바위가 많은 나라인지라 산속에 있는 절집도 담장 공사를 하다가 바위를 만나면 바위를 그대로 둔 채 담장 일부로 사용하는 일은 흔한 공법이다.

다니다 보니 통돌다리도 몇군데서 만났다. 서울 종로구 서촌 수성동 계곡의 압권은 기린교(麒麟橋)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통돌로 만들었다. 경북 봉화 닭실마을의 청암정(靑巖亭) 진입로에서도 통돌다리를 만날 수 있었다. 이는 통돌을 다리로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긴 치수의 화강암도 흔하다는 뜻이다. 물론 현재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렇게 긴 다리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지지대 없이 통돌로써 다리를 만들었다고 하는 희소성 때문에 시선을 끌기 마련이다. 메덩골 정원 골짜기 혹은 연못 적당한 자리에 통돌다리도 한두개 정도 더 만들면 비단 위에 꽃을 더하는 일이라 하겠다.

선곡서원 앞 바위 정원. 사진 원철 스님

바위 정원의 압권은 선곡서원 앞 넓은 마당이다. 선곡(旋谷)은 ‘메덩골’이라는 우리말을 한문으로 바꾼 말이다. 꽃잎이 4개인 메꽃이 바람이 불면 팔랑개비처럼 돌아가는(旋, 돌 선) 이미지를 문자화했다. 메꽃이 많은 골짜기는 그대로 동네 이름이 되었다. 이 자리에 새로 만든 바위 정원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선생을 따르던 병산(屛山)서원 제자들의 수학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선생은 전쟁 때 이순신 장군을 발탁하는 등 임진란 극복의 일등공신이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징비록’을 저술하여 전쟁의 전 과정을 반성적으로 살폈다. 한동안 당파적인 이유로 금서로 지정될 만큼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제1열 가운데 가장 묵직한 큰 바위는 서애 선생이다. 주변에는 눈빛 형형한 제자들이 허리를 곧추세운 당당한 모습으로 포진했다. 하지만 전부 열공하는 모범생만 있을 수는 없다. 당연히 스승의 눈을 피하려고 하는 농땡이도 있기 마련이다. 구석자리에 삼삼오오 모여 저희들끼리 키득거리며 놀고 있는 학동들은 작은 돌 서너개를 무리지어 형상화했다. 물가까지 도망가서 물장구치며 노는 아이들도 있기에 그들은 작은 돌 네다섯개로 표현했다. 어쨌거나 수많은 바위를 높낮이와 넓이, 그리고 빛깔까지 염두에 두고서 조화롭게 배치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석장계(石匠界)의 명인 이시희 선생의 피땀어린 작품이다.

바위를 옮기는 노고를 생각하면서 비래방장(飛來方丈)이란 말을 떠올렸다. 고구려 보덕(普德) 화상께서 백제로 망명할 때 당신의 거처인 방장실을 옮겨온 일화에서 비롯된 사자성어이다. 사찰 벽화에는 사방 한장(丈, 약 3m) 넓이의 바위를 타고 날아오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바위를 옮기는 일은 쉽지 않다. 바위는 말할 것도 없고 옮기는 사람까지 모두 망명시켜야 할 만큼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재료인 돌이 풍부하다고 해서 정원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철 스님(조계종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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