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박 “우리가 지구를 구한다는 착각…행성적 관점을 가져라”

“행성은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이 행성을 필요로 하지요. 이 말은 지난 5월28일 세상을 떠난 나의 형제, 케냐 작가이자 활동가인 응구기 와 티옹오가 전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지구를 구한다’고 말하지만, 지구는 인간에게 구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의 기후변화는 ‘행성적 관점’을 요구합니다.”
세계적 석학이자 실천적 인문학자로 존경받는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 컬럼비아대학교 인문학부 대학원 교수가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달 31일 오후 4시 경희대학교(총장 김진상) 비교문화연구소·영어영문학과가 서울 동대문구 서울캠퍼스에서 연 특별강연에서, 스피박은 인간 중심성을 넘어선 ‘행성성’, 인문학의 임무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피박은 1942년 인도 콜카타에서 태어나 마르크스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문학이론 등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영향력을 끼쳐온 사상가다. 1988년 발표한 탈식민주의 연구의 대표적 고전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서 인종차별,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과 신식민지적 관계, 노동분업 등을 비판하며 학계에 충격을 던졌다. ‘서발턴’은 안토니오 그람시가 내놓은 개념으로 ‘주변부 소규모 사회집단’을 가리킨다. 스피박은 또 인도 서벵골 빈곤 지역에서 30년간 문해 교육을 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지금까지 활동과 학문적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6월엔 인문사회과학계의 노벨상이라 일컫는 홀베르상을 받았다.

이날 강연의 주제는 ‘미래를 다시 상상하라’였다. 팔순이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스피박은 열정적으로, 시적이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어조와 날카로운 내용으로 청중을 휘어잡았다. 그는 “기후변화보다 체제 변화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이 또한 인간의 요구이지 행성의 요구가 아니다. 비극적 결말은 인간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인문학의 핵심 임무는 “인간 욕망의 배열을 바꾸는 일, 즉 ‘비강제적인 욕망의 재배치’”라고 강조했다.
그는 인간의 탐욕 때문에 ‘인류세’가 도래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 탐욕을 단순히 추악하다고만 보지 않았다. 탐욕은 “인간의 근원적인 정동(affect)”이기 때문이다. 그는 “괴물성”을 가진 끔찍한 미래라는 말에 겁을 먹기보다 “완전히 (불)가능한 행성의 미래를 위한 상상력을 가지라”고 주문했다. 인간 세계의 끝을 앞둔 지금, “죄책감보다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이 행성에 내던져진 존재입니다. 다만 저는 (벵골 빈민 지역에서) 교수법을 적용해 서발턴들에게 세계의 집을 지키는 데 대한 책임감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쉽게 이 점을 익힐 수 있습니다. 삶의 허무함이 그들의 일상적인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서발턴’은 정체성이 아니라 위치”라고 강조하며 “(불)가능한 미래를 상상”하고 이에 참여시키는 것이 서발턴 교육의 핵심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역사’에 한번도 기입된 적이 없는 ‘서발턴의 시간’과 비슷하게, ‘행성 역사’의 외부에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세상을 구한다’고 믿는 인간의 오만한 착각 또한 환상이라는 뜻이다. “미국식 예외주의 같은 우쭐함”, “역사적 특권의 덫”에 걸린 서구의 엘리트의 문제도 꼬집었다. ‘행성적 관점’은 오히려 아프리카 줄루족을 비롯한 소수 부족의 언어나 쟁기 끝에서 태어나 땅속으로 사라진 인도 힌두의 시타 여신 이야기 등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저는 인도의 상위 카스트로 태어났고, 그야말로 권력구조 바깥에 있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며 누대로 진 빚을 갚으려고 합니다. 학생들에게도 ‘나는 너희의 적이다. 나와 내 부모의 선행이 수천년 지배를 없애진 못한다. 나 없이도 살아갈 방법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그는 벵골 시골의 불가촉천민 아이들에게 우주와 태양 등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영상으로 자신이 말한 ‘행성적 교육’을 실시한다. “기술적인 정복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이 거대한 행성 속에서 우리 위치가 어디인지 체감하는 감각을 기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아이들은 하늘과 태양과 빛의 변화를 살피고 때론 “정말 지구가 내 발밑에서 움직이는 거냐”고 세계적 석학에게 조심스레 묻곤 한다.
스피박은 “이런 느리고 답답한 과정, 아주 작은 변화 속에서 욕망의 배열이 천천히 바뀐다. 아이들 중 하나는 언젠가 내가 전혀 답하지 못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길로 스스로 나아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또한 인문학으로 욕망을 재배치하도록 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세상을 바꾼다’는 구호보다 시적이고 철학적인 언어가 필요하다고 했다.
“‘세상 전체가 내 집이다. 그 중심의 불(지구의 핵)에서부터, 멀리 이어지는 바닷물까지 모두 나를 받쳐준다. 누구도 나를 이 세계에서 내쫓을 수 없다. ‘소유’란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온 세상을 소유할 수 없고, 오직 모두가 세상에 기여하면서만 소유할 수 있다.’ 이런 말이야말로 행성적 관점과 관련이 있죠.”
서발턴 학생 교육은 “자선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이라며 그는 행성적 윤리를 실천하는 방법으로 “기다림, 들리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를 유심히 살피는 것, 잠시라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욕망해 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느린 과정을 함께 견뎌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행성적 윤리를 실천한다는 것은 정복이 아니라 알아차리고, 마음을 쓰고, 유용함이나 이익 너머까지 돌보는 일입니다. 꾸준한 가르침, 상상력의 지속, 새로운 시선, 다른 생각이 튀어 오르길 기다리는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입니다. 세상이 ‘다르게’ 되기를 바라는 작은 마음으로요.”
글·사진 이유진 선임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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