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버티는 법”을 배우던 팀이 이제는 “이기는 법”을 안다. 페퍼저축은행이 GS칼텍스를 풀세트 접전 끝에 3–2(26-24, 25-19, 22-25, 22-25, 15-5)로 제압하며 창단 최다 타이인 3연승을 달렸다. 시즌 초반 전적 4승 1패, 승점 10점으로 2위에 오르며 페퍼의 이름 앞에 처음으로 ‘상위권’이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게 붙었다. 순위표의 위치만 달라진 게 아니다. 경기의 내용, 승부처에서의 대응, 그리고 팀이 보여주는 에너지의 결이 전혀 다르다.

이날 승부를 가른 두 줄의 숫자가 있다. 블로킹 18개와 범실 22개. 이 두 수치가 오늘 페퍼저축은행의 완성도를 말해준다. 페퍼는 네트 위에서 18개의 블로킹으로 상대 공격의 리듬을 끊었고, 스스로 범한 실수는 22개에 불과했다. 반면 GS칼텍스는 블로킹 7개에 범실이 32개로, 공격 기회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네트를 완전히 장악한 미들블로커 시마무라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혼자서 7개의 블로킹을 기록하며 중앙을 봉쇄했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타이밍을 읽어 상대 공격을 끊어냈다. 외국인 주포 조이는 30득점을 올리며 공격의 중심에 섰지만, 이전보다 한결 절제된 샷 선택으로 안정감을 더했다. 결과적으로 페퍼는 ‘강한 공격’이 아닌 ‘스마트한 운영’으로 승리를 챙겼다.
1세트는 경기의 성격을 규정했다. GS칼텍스가 중반까지 리드를 잡았지만, 페퍼는 시마무라와 조이의 연속 득점으로 21-21 동점을 만들었다. 이후 24-24 듀스 상황에서 시마무라와 임주은의 연속 블로킹이 터지며 세트를 따냈다. 단순히 운이 아닌, 집중력으로 상대의 흐름을 차단한 장면이었다. 2세트는 초반부터 페퍼의 흐름이었다. 빠르게 20점을 넘어 조이의 강타와 임주은의 서브 에이스로 여유 있게 세트를 끝냈다.

하지만 경기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GS칼텍스는 3세트부터 반격에 나섰다. 실바가 혼자 32점을 몰아치며 공격을 이끌었고, 권민지와 최유림이 블로킹으로 힘을 보탰다. 실책이 줄자 세트가 따라왔다. 3세트와 4세트를 모두 25-22로 잡아내며 경기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러나 마지막 세트에서 페퍼는 완전히 다른 팀이 됐다. 초반부터 조이와 시마무라가 연속 득점을 올리며 6-1로 앞서 나갔고, 이후 GS의 연속 범실이 쏟아졌다. 실바의 백어택 범실, 유서연의 공격 실패, 김미연의 서브 아웃이 이어지자 분위기는 완전히 페퍼로 기울었다. 박정아의 서브 에이스가 코트를 스치며 15-5로 마무리되자 광주 홈팬들의 함성이 터졌다.
이날 경기를 요약하면 결국 ‘블로킹과 범실 관리’였다. 페퍼가 18개의 블로킹으로 네트를 지배하는 동안, GS칼텍스는 10개의 추가 범실로 스스로 발목을 잡았다. 시마무라는 중앙을 중심으로 수비 라인을 단단히 묶었고, 조이는 리스크를 최소화하며 결정적인 순간마다 득점을 만들어냈다. 박정아는 베테랑답게 승부처마다 리시브 안정과 팀 사기를 끌어올렸다.

더 놀라운 것은 팀의 성장 방향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페퍼저축은행은 ‘리시브가 약하고 사이드 의존이 심한 팀’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미들라인이 살아 있고, 서브 전술이 명확하며, 결정구가 분산된 완성형 팀으로 변했다. 중앙의 시마무라가 공수의 중심축이 되고, 조이와 박정아가 좌우에서 균형을 맞춘다. 세터 박사랑과 임주은은 상황에 따라 빠른 템포와 안정적인 연결을 번갈아가며 운영을 조율했다. 서브는 상대 약점을 정확히 겨냥하는 ‘목적타 서브’로 진화했다. 단순히 강하게 넣는 것이 아니라, 상대 리시버를 흔들어 블로킹 라인을 유리하게 만드는 계산된 구질이다.
GS칼텍스는 실바의 폭발력으로 두 세트를 따냈지만, 결국 범실 관리와 블로킹에서 밀렸다. 실바 혼자 12개의 범실을 기록했고, 팀 전체로는 32개의 실책이 나왔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리시브가 흔들렸고, 세터의 볼 배급이 흔들리면서 속공 타이밍도 무너졌다. 경기 중반 이후 세터와 레프트를 교체하며 반전을 꾀했지만, 페퍼의 기세를 꺾기엔 역부족이었다.

경기 후 장소연 감독은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한다. 선수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페퍼는 아직 완성형 팀은 아니지만, 확실히 ‘이기는 감각’을 찾았다. 3연승이라는 숫자는 기록일 뿐이다. 중요한 건 경기마다 반복되는 패턴 속에서 팀의 체질이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리그 꼴찌에서 2위로의 반전은 단순한 순위 상승이 아니라, “팀이 스스로를 믿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창단 첫해엔 “그래도 열심히 했다”는 위로를 받았던 팀이, 이제는 “이길 줄 아는 팀”이 됐다. 블로킹은 단단했고, 범실은 줄었으며, 무엇보다 마지막 세트에서의 집중력은 그 어떤 강팀에도 뒤지지 않았다. 페퍼저축은행은 지금, ‘버티는 팀’에서 ‘이기는 팀’으로 진화 중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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