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부동산 스릴러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이 글은 스포일러의 불안을 고려합니다. 줄거리 설명은 거의/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예민한 독자는 이 글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쿵 소리가 났겠는가? 안 났겠는가?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2024)
드라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이하 ‘숲속에서’)는 매회 주인공을 달리하며 이렇게 독백한다. 이 독백은 드라마의 진실을 관통하는 수수께끼 같다. 이 수수께끼를 함께 풀어보고 생각하는 것, 그게 이 글의 목적이다.
본질주의와 구성주의
이 질문은 뻔한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다. 이 질문은 과학적 논쟁 대상이기까지 하다.
A. 소리는 어떤 물체의 운동에 의해 공기 중에 생기는 진동이다. 소리는 났다.
B. 소리는 가청기관이 있는 생물에 상대적으로 의존하는 개념이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소리가 가청기관에 의해 특정한 주파수에 해당하는 경우에만 ‘들리는 어떤 것’이라면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그 소리를 들을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B). 하지만 소리가 어떤 물체의 운동에 의해 공기 중에서 생기는 진동이라면 소리는 났다고 해야 한다(A).
소리가 가청기관에 (상대적으로) 의존한다고 구성하는 입장을 구성주의라고 하고, 객관적 실체로서 소리는 그 자체로 존재하며 어떤 주체의 의해 구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 본질주의(객관주의)다. 이 질문은 감정의 실체를 다루는 명저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리사 펠드먼 배럿, 2017 한글)에도 인상적으로 다뤄진다.
“숲에서 나무 한 그루가 쓰러졌는데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소리가 난 것인가? 철학자들과 초등학교 교사들이 수도 없이 던진 이 케케묵은 물음은 인간의 경험에 관해, 그리고 특히 우리가 어떻게 감정을 경험하고 지각하는지에 관해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이 수수께끼에 대한 상식적인 답변은 “예”다. 당연히 나무가 쓰러지면 소리가 난다. 만약 당신과 내가 당시에 그 숲을 걷고 있었다면, 우리는 분명히 나무가 쩍 갈라지는 소리,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나무 몸통이 땅바닥에 쿵하고 부딪히는 굉음을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과 내가 그 자리에 없었더라도 이 소리가 났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 수수께끼에 대한 과학적 답변은 “아니오”다. 나무가 쓰러진다고 해서 그 자체로 소리가 나는 것은 아니다. 나무가 쓰러지면 공기와 지면에 진동이 일어날 뿐이다. 이 진동이 소리가 되려면, 이것을 받아들여 변환하는 뭔가 특별한 것이, 즉 뇌에 연결된 귀가 있어야 한다. 포유동물의 귀라면 이 일을 훌륭히 해낼 것이다.
공기 압력의 변화가 외이로 수집되어 고막에 집중되면 중이에서 진동이 산출된다. 이 진동으로 내이 안의 유체가 움직이면, 그곳의 섬모를 통해 압력 변화가 뇌에서 받아들이는 전기 신호로 변환된다. 이 특별한 장치가 없다면 소리도 없으며 오직 공기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 리사 펠드먼 배럿,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제7장 ‘감정은 사회적 실재다’, 2017, 중에서
죄와 벌, 그 상처의 가청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리사 교수는 마치 이 수수께끼에 대한 과학적 답변을 ‘아니오’라고 단정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리사 교수의 서술은, 나는 이 책을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여길 만큼 높게 평가하고 좋아하는데,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사적(레토릭) 함정에 가깝다.
오히려 질문에 대한 과학계 다수의 답변은 ‘그렇다’ 즉, ‘소리가 났다’이다. 리사 교수는 과학계의 소수인 상대주의 입장에서 과학계 다수인 본질주의에 도전하고 항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항변, 그 도전은 마치 이 드라마의 비전과 닮았다. 이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인터뷰를 참고하기 바란다.
다시 드라마로 돌아오자. 어떤 죄가 저질러졌다(커다란 나무가 쓰러졌다). 하지만 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 소리는 왜 들리지 않는가. 이 드라마는 왜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를 묻는다. 거기에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혹은 거기에 ‘귀를 가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또는 거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귀를 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커다란 나무가 쓰러진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본격 부동산 스릴러 (농담 아님)
이 드라마의 탁월한 점은 이전에는 그 어떤 드라마도 주목하지 않은 죄와 벌, 그 피해와 상처의 ‘가청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드라마는 놀랍게도, 범죄가 일어난 그 공간, 그 모텔 혹은 별장식 펜션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모텔 주인 부부와 펜션 주인의 삶을 미시적으로 파고든다. 이런 드라마적 접근은,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본 모든 범죄 드라마를 통틀어서, 한번도 본 적 없는 접근이다.
그렇게 [숲속에서]는 대한민국에서 부동산이 가지는 의미를 범죄 드라마의 관점에서 해체한 뒤에 그 의미를 이야기의 요소로 재배치한다. 대한민국에서 ‘집’은 마지막으로 남은 중산층의 성채다. 그 안전한 집, 마지막 보루로서의 집이 무너질 때 그 집에 사는 인간도 파괴된다. 그렇게 파괴된 집에서 생존한 아들은 복수를 다짐하고, 먼저 떠난 아내의 기억이 남겨진 집이 낯선 이방인에게 허물어지려고 하자 사내(김윤석)는 타협과 투쟁 사이에서 고민한다.
모텔은 과거의 사건이 일어난 장소이고, 펜션은 사건이 현재 진행 중인 공간이다. 이 두 공간은 시간을 달리하며 서로에게 교신하듯 사건의 모자이크 조각을 구성한다. 이 드라마적 구성은 그 완성도가 아주 높아서 결론으로 향하는 속도와 긴장감을 높여준다.
‘개구리’를 위하여
[숲속에서]는 서로 다른 목소리, 서로 다른 관점을 통해 매회 주인공을 달리하면서 사건을 재구성한다. 그렇게 당사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는 ‘(재)구성’된다. 여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전체적인 비중이 크진 않지만, 진짜 범인을 놓친 ‘개구리’들의 상처를 바라보는 ‘술래’ 형사 윤보민(이정은)이다. 엉키고 뒤섞인 사건의 공통분모로서 그 시공간을 관통하면서 이 드라마의 전언을 매력적인 캐릭터로 구현한다.
윤보민은 이 드라마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파괴와 범죄에 끌리는 유성아의 짝말이다. 윤보민은 마치 술래잡기가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형사로 태어난 인물인데, 그럼에도 아니 그래서 윤보민 형사에게 중요한 건 범죄자를 처벌하고 벌주는 그 자체보다는 그 술래잡기 자체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상처받은 ‘개구리'(범죄의 부수적 피해자들)에도 깊은 연민과 공감을 드러낸다, 그것도 아주 시크하게. 이런 매력적인 캐릭터는 정말 오랜만이다.
이 드라마는 우리 사회가 죄와 벌을 바라보는 방식에 관해 질문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드라마는 우리 사회가 죄의 스펙터클에 주목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범죄자는 마치 연예계 스타처럼 미디어를 통해 떠들썩하게 전시되지만, 그 죄와 벌 이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피해와 상처’에 우리는 무관심하다.
고민시가 연기한 유성아(USA, 이니셜은 키치적 농담 같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작품을 전시해야 하는 화가다)에는 고유정과 재벌의 부정적 이미지가 포개져 보인다. 그렇게 전시되는 스펙터클과 가려지는 (직접적 피해자보다 더 보이지 않는 부수적) 피해자의 상처는 더 큰 대조를 이룬다.
커다란 나무가 쓰러졌지만(죄가 저질러졌고), 그리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피해자의 고통스러운 외침을 들어야 했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않는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숲에서는 오늘도 커다란 나무들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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