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배운 빅테크의 쿠데타[IT 칼럼]

2024. 10. 18.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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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기술 쿠데타’, 도발적인 말이다. 유럽의회 의원 출신 마리에트예 스하커가 꺼내든 화두다. ‘혁신’이라는 미명 아래 기술 기업들이 규제를 성공적으로 회피하며 정부로부터 권력을 빼앗아가는 현실을 폭로한 그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빅테크로 불리는 기술 기업과 실리콘밸리 거부들이 민주주의와 시민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 담겨 있다.

그는 미국 워싱턴의 정책 입안자를 대상으로 한 로비만으로 쿠데타가 현실이 되는 건 아니라고 설파한다. 학계와 미국 내 싱크탱크를 후원하고 공개된 콘퍼런스나 포럼, 토론회에서 기술에 대한 긍정적인 편향을 갖도록 지원하는 작업도 포함돼 있다. 물리적인 폭력만 동원하지 않을 뿐,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의 대표성과 힘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쿠데타와 진배없다고 강조한다. 기술을 정부나 정치인이 이해하는 건 버겁기 때문에 기술 기업들이 침투할 기회가 반복적으로 열린다는 메시지도 전한다.

쿠데타의 종착점은 기술 리더들이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고 당선되는 정경이다. 막대한 자본과 로비력을 갖춘 기술 집단이 그러지 않을 이유가 더는 없어졌다는 것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벤처캐피털리스트 마크 앤드리슨은 “대부분의 기술 업계는 지금까지 정치와 무관하게 운영됐다. 하지만 앞으로 기술에 반대하는 후보들과 경쟁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

오픈AI는 지난 8월 빌 클린턴 정부 때 백악관에서 일한 베테랑 로비스트 크리스 르헤인을 글로벌 정책 부사장직에 앉혔다. 그는 미국 내에서 ‘정치 암흑술의 대가’라 불린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요커’의 보도를 보면 그는 ‘에어비앤비’ 재직시절 단기 주택 임대를 제한하는 주민투표 발의안을 돈으로 무력화시켰다. 2023년 코인베이스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며 많은 정치인에게 암호화폐 지지 메시지를 내도록 압력을 넣었다. 그가 기획한 대부분의 프로젝트는 성공으로 귀결됐고, 실리콘밸리 기술 리더들이 추앙하는 인물로 우뚝 서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그가 구사하는 정치적 압력 과정은 해당 IT 서비스의 고객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지지자를 동원하고,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로비를 한 뒤 그럴듯한 유화 제스처로 정치인들의 행동을 유발하는 순서로 구성된다. 특히 기술 반대론자를 악으로 구분하고, 중국에 대항하는 미국의 미래 경쟁력을 갉아먹는 집단으로 프레이밍 한다. 그의 프레이밍 전략은 여당, 야당 모두를 친기술 집단으로 돌려세우기 위한 정교한 기법이다. 미국 의회의 특성상 양당의 지원이 없이는 관련 법안 통과가 어려워서다. 자신들의 로비와 압력이 당파성을 띠게 되면 그들이 꿈꾸는 ‘기술 쿠데타’는 일어날 수 없어서이기도 하다.

정치에 무관심했던 기술 기업들은 정치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저 돈으로 로비만 하던 세력에서 지지세를 규합하고 규제를 무력화하며 필요한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적극적 개입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축적된 마케팅 노하우는 합법적 쿠데타의 무기체계가 됐다. 반면 미국이나 한국 할 것 없이 정치인들은 여전히 기술에 무지하고, 고성에만 익숙하다. 정치인들의 게으름과 함께 민주주의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이다.

이성규 미디어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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