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의 과학세상] '쉬운' 과학용어보다 '익숙한' 과학용어가 더 중요하다
마트에서 파는 가공식품과 음료수에는 예외 없이 ‘구연산’(枸櫞酸)이 들어있다. 환경부에서는 ‘시트릭 애씨드’라고 부르는 살생(殺生)물질이다. 가공식품의 유통기한을 늘여주기 위해 사용하는 대표적인 보존제다. 그런 구연산이 사실은 레몬이나 감귤류의 신맛을 내는 쳔연 유기산(有機酸)이다. ‘레몬산’이라고 부르면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물질이다. ‘안식향산’(安息香酸)‧‘낙산’(酪酸)도 불편한 한자말이다. ‘벤조산’‧‘뷰틸산’이 훨씬 편하다. ‘삼중수소’(三重水素)와 ‘비말’(飛沫)도 언론에 자주 등장한다. ‘트리튬’과 ‘침방울’이 훨씬 더 익숙하다.
쉽고 편한 과학용어
과학용어가 어렵다는 불평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자를 배우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 익숙하지 않은 한자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 가장 흔한 불평이다. 물론 한자어가 언제나 불편한 것은 아니다. ‘말산’‧‘폴산’보다는 ‘사과산’(沙果酸)‧‘엽산’(葉酸)이 오히려 더 편하고, ‘글루콘산’보다는 ‘포도당산’이 훨씬 더 쉽다.
그렇다고 영어권에서 사용하는 과학용어를 흉내 낸 외래어가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다. 팬데믹(pandemic)‧엔데믹(endemic)‧에피데믹(epidemic)은 아무리 들어도 낯설 뿐만 아니라 서로 구분하기도 어렵다. ‘박테리아’(bacteria)는 오래 전부터 쓰던 외래어이지만 아직도 ‘세균’(細菌)이라는 한자어가 훨씬 더 쉽게 느껴진다.
영어권의 외래어를 표기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2002년에 유행했던 ‘SARS’(중증급성호흡기중후군)은 ‘사스’라고 적으면서, 2015년의 ‘MERS’(중동호흡기증후군)는 ‘메르스’라고 부른다. 마찬가지로 박쥐에서 유래된 코로나바이러스의 변종에 의한 ‘COVID-19’은 엉뚱하게 ‘코로나19’라고 한다. (질병관리본부 전문가들의 의견이 충분히 반영된 선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2009년의 H1N1은 난데없이 ‘신종 플루’라고 적어서 정확하게 발음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훨씬 더 편한 ‘독감’을 포기해버린 이유는 분명치 않다.
순우리말(토박이 말)을 고집하기도 어렵다. 물리학에서 사용하는 ‘superstring theory’를 옮겨놓은 ‘초끈 이론‘은 아무리 들어도 어색하다. 한자어 ’초‘(超)와 토박이 말 ’끈‘(弦)을 섞어놓은 탓이다. 오히려 일본‧중국에서 사용하는 ’초현(初弦) 이론‘이 더 그럴 듯하다. 2009년에 유행했던 ’신종 플루(flu)‘은 발음하기도 쉽지 않다. 일본에서는 ’신형 인플루엔자‘(新型インフルエンザ)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갑형유감병‘(甲型流感病)이라고 불렀다.
낯설 수밖에 없는 과학용어
과학용어가 어렵고 불편하다는 지적은 우리의 언론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언론이 기자들에게 요구하는 과학적 지식의 수준이 ‘중학교 2학년’이기 때문이다.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 사회를 중학교 2학년 수준의 과학 지식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섣부른 것일 수밖에 없다. 과학용어는 빠르게 변화하는 과학기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사실 과학용어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우리의 언어 환경에서는 모든 용어가 어렵고 불편할 수밖에 없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새로운 신조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무차별적으로 등장하는 신조어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개딸’과 ‘핵관’의 어원과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고 개딸‧핵관을 ‘어렵다’고 느끼지는 않는다.
우리가 과학용어를 유난히 어렵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따로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려운 것’과 ‘익숙한 것’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과학은 전문 과학자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이 과학용어에 대한 극복하기 어려운 거대한 진입장벽으로 작용한다는 뜻이다. 실제로 정치판의 ‘개딸’이나 ‘핵관’은 누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전문 과학자들이 이해하는 정확한 과학적 지식을 이해하지 못하면 과학용어를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의 정제되지 않은 언어 관행도 과학용어에 대한 거부감을 증폭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오늘날 과학은 가장 높은 수준으로 세계화된 지식이다. 세계화된 과학을 전공하는 과학자들에게 영어로 된 과학용어는 소통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다. 과학자들에게 영어 과학용어는 더 이상 ‘외국어’가 아니다. 그런 과학자들에게 우리말 과학용어는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굳이 우리말 과학용어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다고 믿는 과학자들도 적지 않다. 대학의 이공계 강의실의 현실이 가장 확실한 증거다. 이공계의 전공 강의에서는 영어 교과서와 교재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강의에서도 과학용어는 영어를 사용한다. 언어학적으로 이공계 강의실의 언어 현실은 참혹한 수준이다. 토씨를 빼고 나면 거의 대부분 영어로 된 과학용어로 채워져 있다. 심지어 형용사와 부사도 영어를 사용한다.
그런 과학자들이 우리말 과학용어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대한화학회가 1960년대부터 우리말 원소 이름과 화학술어를 정하는 노력을 시작했지만 지금도 만족스러운 형편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우리말에 대한 충분히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도 심각한 걸림돌이다. 혼란스러운 표준어 맞춤법, 외래어 표기법, 띄어쓰기 원칙이 혼란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쉬운 과학용어를 위한 노력
누구나 쉽고 편리하고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좋은 과학용어를 개발하는 일은 절대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우리말 과학용어는 영어 용어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과학용어를 언제까지나 ‘외국어’로 남겨둘 수는 없다. 우리말과 우리글에 어울리는 ‘외래어’로 만드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온전한 우리말(토박이 말)을 개발하는 노력도 중요하다.
합리적인 외래어 표기법이 필요하다. 한글이 다른 어떤 문자보다 다양한 자음과 모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한글을 사용하더라도 세계의 모든 언어를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 특히 한글에서는 강약과 장단을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한글로 적은 우리말 과학용어가 영어의 발음을 충실하게 반영할 것이라는 기대는 과도한 것일 수밖에 없다. 한글로 적은 과학용어가 영어 용어와 다르게 발음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의 어문 규정도 근본적인 손질이 필요하다. 특히 첫음에 된소리와 ‘ㄹ’을 금지하는 규정은 서둘러 개정해야 한다. 우리말을 순화시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우리의 주식인 ‘쌀’과 갓난아이의 ‘까까’도 좋은 말이 아니라고 우기는 억지는 버려야 한다. 원음에 더 가까운 ‘뻐스’를 되살리는 것도 통일을 대비해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외래어가 많은 과학용어의 다양성을 살릴 수 있다.
우리말 과학용어가 반드시 영어 용어의 의미를 충실하게 반영하는 서술식이 되어야 한다고 고집할 이유도 없다. 물리학에서의 ‘쿼크’(quark)는 본래 물리학과 아무 상관없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피네간의 경야(竟夜)》에서 빌려온 것이다. 본래 quark라는 단어의 의미는 물론 저자가 의도했던 ‘콰크’라는 음운까지도 무시해버렸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아무도 개의치 않는다.
과학용어에 대한 불필요한 논쟁은 의미가 없다. 새로운 우리말 과학용어에 반드시 적용해야만 하는 언어 원칙이 따로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과학용어의 정확한 의미는 과학 교과서나 백과사전을 통해서 설명할 일이다. 19세기 일본에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던 니시 마마니(.西周)와 우다가와 요안(宇田川榕菴)의 노력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 ‘철학’(philosophy)‧’과학‘(science)‧’화학‘(chemistry)‧경제(economy)가 모두 그들의 창의적 노력의 산물이다.
과학용어에 대한 분야 사이의 과도한 갈등도 서둘러 해소해야 한다. 화학 용어와 물리학 용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의학 용어는 반드시 의학자들이 만들어야 한다는 법이나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과학용어에 대한 섣부른 ‘소유권’ 분쟁은 부끄러운 것이다.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만들어놓은 우리말 과학용어도 존중해줘야만 자신들이 만든 과학용어도 존중받게 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과학용어가 어렵고, 정확하지 않다고 불평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과학용어에 대한 진입장벽을 획기적으로 낮춰서 누구나 과학용어를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언어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언론이 나서줘야 한다. 코로나19 팬데믹과 현대 산업의 쌀이라는 반도체는 중학교 2학년 수준의 과학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누구나 허준이 교수의 필즈 메달 수상 업적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할 이유도 없다. 누가 보더라도 ‘백신 패스’를 표절한 ‘방역 패스’가 대단한 정책이라는 억지가 과학용어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훼손해버렸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표준어 어문 규정을 총괄하고 있는 국립국어연구원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어학자의 새로운 옹고집이 아니다. 과학자들의 전문성과 창의성을 최대한 존중해서 만든 좋은 과학 용어를 적극적으로 보급하는 공인된 권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말은 논리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훌륭한 과학용어는 우리의 말과 정신을 모두 살찌우는 촉매가 된다.
※필자소개
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대한화학회 탄소문화원 원장을 맡고 있다. 2012년 대한화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과학기술,교육,에너지,환경, 보건위생 등 사회문제에 관한 칼럼과 논문 2500편을 발표했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를 번역했고 주요 저서로 《이덕환의 과학세상》이 있다.
[이덕환 서강대학교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 명예교수 duckhwan@sogang.ac.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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