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돈 빼는 외국인들… 美 빅테크 ‘차이나 런’ 가속화
중국 개혁·개방 총설계자인 덩샤오핑(1904~1997)이 1979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한 말로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상관없이 중국 인민을 잘살게 하면 그것이 제일"이라는 뜻이다.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1980년대부터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해 개혁·개방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퇴색하는 덩샤오핑의 유산
중국공산당이 1989년 톈안먼 민주화운동을 무력 진압하면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은 후퇴 조짐을 보였고, 덩샤오핑은 1992년 1월 18일부터 2월 22일까지 우한·주하이·선전·상하이 등 남부 지방 경제도시를 시찰하면서 개혁·개방 확대 필요성을 역설했다. 당시 순시에 나선 덩샤오핑의 담화들을 '남순강화(南巡講話)'라고 부른다. 덩샤오핑은 남순강화에서 "개혁·개방 노선은 100년간 추호의 흔들림 없이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남순강화 다음 해인 1993년부터 외국인직접투자(FDI) 유치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당시 FDI는 275억 달러(약 37조 원)를 기록했다.
대표 사례가 중국에 대한 FDI의 급격한 감소다. 중국 국가외환관리국에 따르면 지난해 FDI는 전년보다 80% 급감한 330억 달러(약 44조3000억 원)로 집계됐다. 이는 1993년 이후 30년 만의 최저치다. 2022년 1802억 달러(약 242조 원)와 비교하면 82%나 줄었고, 2021년 3441억 달러(약 462조1600억 원)와 비교하면 10분의 1 수준이다.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와 경기침체, 정치적 통제 강화, 미국과 갈등 등으로 외국 기업들의 대중(對中) 투자 의욕이 감퇴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 정부가 지난해 7월부터 시행 중인 반(反)간첩법(방첩법) 때문에 중국에서 외국 기업들의 불확실성이 증가했다는 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반도체 분야의 경우 미국의 중국 통제 여파로 미국 기업들이 중국을 떠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미국 정치·경제 분석기관 로듐그룹에 따르면 2018년 반도체 분야에서 48%를 중국에 투자하던 각국 기업은 2022년 투자를 1% 수준으로 축소했다.
중국의 올해 FDI는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 경제에 대한 비관론이 비등하면서 중국에 대한 FDI가 대폭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국가외환관리국에 따르면 올해 2분기 FDI는 -148억 달러(약 -19조8700억 원)를 기록했다. 외국 기업들이 중국에 투입한 자금보다 빼낸 자금이 더 많다는 뜻이다. 분기별 FDI가 마이너스를 기록한 건 지난해 3분기 이후 이번이 역대 두 번째다. 규모는 국가외환관리국이 1998년부터 관련 데이터를 집계하기 시작한 이래 최대다. 미국 블룸버그 통신은 이런 흐름이 올해도 이어진다면 사상 처음으로 FDI가 순유출을 기록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중국 직원 1000명 해고한 IBM
미국 등 외국 기업들의 '차이나 런'(China run: 중국 빠져나가기) 현상도 심각하다. 미국 휴대전화 제조사 애플은 판매뿐 아니라, 생산 부문에서도 중국발(發) 리스크 회피에 적극 나서고 있다. 애플은 중국시장이 전체 매출의 17%를 차지하지만 판매망을 계속 줄이고 있다. 애플은 7년 전 인도 폭스콘 공장에서 첫 아이폰 생산을 시작한 이래 올해 처음으로 아이폰16 프로 라인업 생산까지 맡기는 등 생산기지를 중국이 아닌 다른 지역들로 옮기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애플이 아이폰16 프로 기종을 인도에서 생산하는 것은 중요한 이정표라면서 미국과 중국의 갈등 및 대립이 앞으로 더욱 심화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애플처럼 미국 빅테크 기업이 대거 중국에서 사업을 접거나 축소하고 있으며, 인력도 감축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반도체 기업 IBM은 중국에 있는 R&D(연구개발)센터를 인도로 옮기고 직원 1000여 명을 해고하기로 했다. 1984년 중국시장에 진출해 매년 사업 규모를 키워왔던 IBM은 지난해 중국 매출이 20% 가까이 감소하자 대대적인 사업 축소 결정을 내렸다. 중국 경기침체 상황이 장기화하고 있는 데다, 현지 기업들과 경쟁까지 치열해져 더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마이크로소프트(MS), 테슬라, 인텔 등도 잇따라 중국에서 사업을 철수하거나 직원 재배치에 나섰다. MS는 5월 중국 법인 직원 800여 명을 미국, 호주, 캐나다 근무지로 옮기기로 했다. 테슬라는 중국 내 영업 및 서비스, 엔지니어, 생산 등 전반적인 부문에서 인원을 감축하기로 했다. 미국 자동차 제조사 GM도 중국 내 R&D 부문 구조조정을 검토하고 있다. 특히 미국 빅테크 기업은 반도체 등 첨단산업에서 정부의 중국 견제 정책이 강화되자 더는 중국에서 사업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미국 상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의 중국 직접투자액은 51억 달러(약 6조8400억 원)로 전년 대비 40% 감소했다.
중국 정부는 올해 증시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자금이 순유출될 가능성이 커지자 증시에서 외국인 투자 관련 주요 데이터 공개를 제한하는 조치를 내렸다. 중국 증권당국은 8월 19일자로 상하이와 선전 등 본토 증권거래소를 통한 해외 투자자금 일일 거래 동향 자료를 비공개로 전환했다. 해당 데이터는 당분간 분기별로 발표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8조3000억 달러(약 1경1100조 원) 규모 시장의 핵심 지표를 알 수 없게 됐다.
이번 조치는 경제침체로 외국 자본이 지속적으로 빠져나가면서 증시에 급격한 변동성이 발생하자 이를 줄이려는 중국 정부의 고육지책으로 보인다. 홍콩 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들어 중국 증시로 유입된 외국인 자금은 마이너스 상태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6월 초부터 중국 본토 주식에서 120억 달러(약 16조 원)를 빼내면서 순유출로 돌아섰다. 서방 경제 전문가들은 중국 경제가 갈수록 악화하고 있기 때문에 올해 중국 증시에서 외국인 자금이 한 해 기준 최대 순유출을 기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의 7월 청년 실업률은 17.1%였다. 정부가 지난해 12월 16∼24세 청년 실업률 통계 방식을 바꾼 후 최고치를 기록한 것이다. 7월 산업생산 증가율도 석 달째 둔화했다.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중국 부동산 리스크와 청년 실업률 고공행진 등에 주목하면서 중국 증시와 관련해 2026년까지 반등이 어려울 수 있다고 내다봤다.
삼성전자·SK 하이닉스 中 매출 2배 늘어
중국 빅테크 등 정보기술(IT) 기업들은 미국 정부의 더욱 강력한 첨단 반도체 및 기술 제재 조치에 대비해 D램 등 메모리 반도체 사재기에 나서고 있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올해 상반기 반도체 대중 매출액이 전년 대비 2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최근 공개한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주요 지역별 매출 현황 가운데 중국 매출은 두 회사가 합해서 40조9513억 원으로 지난해 상반기(21조6901억 원) 대비 2배 가까이 늘어났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 반도체업체들은 미국의 새로운 규제가 발표되기 전 반도체 제품을 비축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화웨이·바이두 등 중국 빅테크 기업은 미국의 제재가 더욱 강화되기 전 인공지능(AI) 개발을 위해 고대역폭메모리(HBM)까지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중국 업체들이 추가 수출 제한에 대한 두려움으로 AI 칩과 메모리 재고 비축량을 크게 늘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대중 매출은 하반기에도 상승세를 보일 전망이다. 미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력 제품인 메모리 반도체의 대중 수출에는 별다른 제재를 가하고 있지 않다.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기업인 대만 TSMC도 중국 기업들의 사재기 덕분에 대중 매출이 2배로 늘어났다. TSMC 재무보고서에 따르면 2분기(4∼6월) 중국에서 발생한 매출은 1078억 대만달러(약 4조5000억 원)로 1분기(1∼3월) 대비 102%, 전년 동기 대비 86.8% 늘었다. 대만 '경제일보'는 "미국 정부의 강력한 규제 확대에 앞서 중국 기업들이 비축해두기 위해 TSMC에 반도체를 대거 주문했다"고 분석했다. 중국 경제는 FDI 감소와 미국 정부의 제재 조치 강화 등에 따라 앞으로도 상당 기간 경기침체 늪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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