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칼럼] 최덕근 영사 암살범들 모두 확인됐다

양상훈 기자 2024. 9. 26.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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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0월1일
국정원 러시아 파견관이
北에 무참히 살해돼
오랜 추적 끝에
北 범행 조직, 책임자
공작원 3명 신원 밝혀내
반드시 대한민국 법으로 심판해야
국정원 보국탑 '이름없는 별' 추모석. 최덕근 영사는 새겨진 별 중 유일하게 실명이 공개된 요원으로, 그중에서도 '첫 번째 별'로 알려졌다. /뉴스1

벌써 28년이 됐다. 1996년 10월 1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근무하던 최덕근 영사(국정원 파견관)가 퇴근해 귀가하다 집 앞에서 북한 요원 3명에 의해 칼, 도끼와 독침으로 무참히 살해됐다. 아내가 뛰어나왔지만 사망한 뒤였다. 국정원은 북한이 살인용으로 사용하는 독극물 샘플을 러시아 측에 제공했고 러시아는 부검에서 이 독극물을 검출했다고 한다. 하지만 러시아는 부검 결과 발표에서 이 독이 검출된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밝히면 북한 소행이 입증되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는 북 요원들 도주로도 차단하지 않았다. 외교적으로 골치 아픈 사건이 빨리 덮이기만을 바랐다. 최 영사 시신이 국내로 온 뒤 다시 실시한 부검에서 예상대로 북한이 쓰는 그 독이 검출됐다.

당시 북한은 식량 배급이 끊기는 이른바 ‘고난의 행군’으로 수십, 수백만 명이 굶어 죽고 있었다. 돈이 궁해진 김정일은 전 세계에서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달러를 벌었다. 대표적인 것이 위조 달러, 마약 판매와 외교관 신분을 이용한 밀수였다. 국정원은 북한의 이런 불법행위를 추적하고 있었다. 최 영사도 이런 추적 활동을 하다 북한에 살해당한 것으로 추측됐다. 필자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이병호 전 국정원장이 쓴 책 ‘좌파 정권은 왜 국정원을 무력화시켰을까’를 읽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전 원장은 북이 한국 공무원을 살해한 이유에 대해 다른 추정을 했다. 최 영사는 부임 3개월째로 업무 인수인계 중이어서 본격적인 대북 추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북한이 최 영사를 살해한 것은 그의 어떤 활동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한국 정부 요원 살해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살해 수법이 필요 이상으로 잔인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시 북한 잠수함이 우리 제1함대 사령부를 정찰하기 위해 특수부대원들을 태우고 강릉으로 들어왔다가 암초에 걸리는 사건이 있었다. 북한 무장 대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려 북으로 귀환을 시도하다 전원 자살 하거나 사살·체포됐다. 우리 군의 이 작전은 47일 동안 계속됐다. 최 영사는 이 작전 기간 중에 피살된 것이다. 북은 연일 백 배, 천 배 보복을 공언하고 있었다. 이 전 원장은 최 영사가 북한 보복의 희생양이 된 것으로 추정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는 북의 보복 목적에 최적의 장소였다. 러시아 당국이 수사를 적극적으로 할 리가 없었고 북으로 도주하기도 좋았다.

이 전 원장은 최 영사 사망 두 달 뒤에 차장으로 국정원을 퇴직하면서 후배 요원들에게 “우리가 언젠가는 평양에 들어갈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일은 북한의 정보 파일을 뒤져서 누가 최 영사 살해범인가를 밝히는 일이다. 여러분이 이 추적을 계속해 달라”고 당부했다.

그로부터 18년 뒤인 2015년 이 전 원장은 국정원장이 돼 국정원으로 돌아왔다. 국정원장으로서 그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이 전 원장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의 퇴직 때 당부대로 최 영사 사건 추적이 간단없이 이뤄졌음을 알게 됐다. 국정원 요청으로 러시아의 사건 공소시효도 무기한 연기됐다. 국정원은 이제는 안다. 북한의 어떤 조직이 테러를 주도했고, 누가 지휘했으며 누가 실제로 범행했는지를 안다. 이 정보를 확인하고 또 확인해 나갈 것이다.’

최 영사 살해 지시자가 김정일이란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지만 국정원이 범행을 실행한 조직, 책임자는 물론이고 실제 실행자 3명의 이름까지 알고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이들 전원이 대한민국 법의 심판을 받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우리는 ‘기억이 짧은 나라’라고 자조한다. 큰 사건이 나면 그때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망각한다는 것이다. 실제 그런 경우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국정원이 최 영사 살해범들을 오랜 세월 추적해왔다는 사실은 의외였다. 놀랍고 대견했다. 북한의 아웅산 테러와 KAL기 폭파 테러, 소련의 KAL기 격추 등 우리 국민을 떼죽음시킨 만행에 대한 추적과 심판에도 시효가 있어선 안 된다. 이 전 원장 표현대로 우리도 기억이 긴 나라로 바뀌어야 한다.

지금 최 영사는 국정원 정문 옆 보국탑에 한 개의 별로 새겨져 있다. 최 영사 피살 석 달 뒤 북한 주체사상 최고 권위 황장엽 국제 담당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했다. 황 비서는 김씨 왕조의 실정에 절망하고 있었다. 김씨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역사의 시계는 멈출 수 없으며 분단이 끝나는 날도 막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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