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WBC가 남긴 씁쓸한 현주소, 한국 야구는 이제 강하지 않다

남정훈 2023. 3. 11.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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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야구가 세계 무대에서 통한다는 인식, 아니 나아가 세계를 호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계기는 200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4강과 2008 베이징 올림픽 9전 전승 금메달, 2009 WBC 준우승이 결정적이었다. DL후 2013 WBC와 2017 WBC에서 연이어 본선 1라운드 탈락을 했지만, 2015 프리미어12 우승과 2019 프리미어12 준우승은 아직은 한국 야구의 경쟁력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기회가 됐다.

2019 프리미어12로부터 4년이 흘러 2023 WBC를 맞이하는 야구 대표팀의 어깨는 무거웠다. 2021년 열린 2020 도쿄 올림픽에서의 노메달 수모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인한 국내 프로야구의 침체, 일부 선수들의 방역 수칙 위반 등이 겹치며 한국 야구 ‘위기론’이 대두됐다. 이 위기를 한 번에 날려줄 ‘특효약’이 바로 2023 WBC에서의 4강 이상의 호성적이었다.
10일 오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B조 본선 1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경기가 한국의 4대13 패배로 끝났다. 경기를 마친 한국 투수들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이제는 인정할 때가 된 것 같다. 더 이상 한국 야구는 세계 무대에서 명함을 내밀 만한 경쟁력이 없다는 사실을. 2000년대 중후반의 신화는 그 시대를 호령했던 스타급 선수들의 ‘특출난 재능’과 ‘하드캐리’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었다는 사실, 아울러 그들의 바통을 이어받은 후배들에겐 당시의 영광을 재현할 힘이 없음을 2023 WBC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이강철 감독이 이끄는 2023 WBC 대표팀이 그렸던 4강 이상의 그림이 단 2경기로 엉망이 됐다. 8강 진출의 분수령으로 꼽혔던 9일 호주전에선 연이은 불펜진의 방화로 7-8 석패한 게 시작이었다. 당초 그렸던 그림의 스케치엔 두 번째 경기였던 일본전은 ‘이기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져도 조 2위는 가능하다’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호주전 패배로 일본전은 갑자기 절대 지면 안 되는 경기가 바뀌어버렸지만, 객관적인 전력 차이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3회초까진 이길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투수진 맏형인 김광현이 혼신의 힘을 다한 투구에 일본이 자랑하는 좌타 5인방으로 구성된 상위타선이 줄줄이 추풍낙엽처럼 연신 방망이를 헛돌렸다. 여기에 그간 국제대회만 나서면 부진해 ‘국내용’이란 꼬리표가 붙었던 양의지가 전날 호주전에 이어 2경기 연속 홈런포(2점)를 가동했고, 뒤이어 이정후의 적시타까지 터져나오며 3-0으로 앞서나갔다.
10일 오후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2023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B조 본선 1라운드 한국과 일본의 경기가 한국의 4대13 패배로 끝났다. 경기를 마친 일본 선수들이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김광현은 앞선 2이닝에 혼신의 힘을 다 한 듯, 3회 제구 난조와 구위 저하가 겹치며 2점을 내준 뒤 무사 2,3루에서 내려갔다. 좌타자 3명을 더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구창모, 이의리 등 김광현과 양현종의 후계자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었던 좌완투수들은 꺼내지 못한 채 원태인(2이닝 1실점)에 이어 곽빈(0.2이닝 1실점), 정철원(0.1이닝 1실점), 김원중(0이닝 3실점)까지 우완투수만 줄줄이 냈다. 김광현이 마운드를 내려갈 시점만 해도 3-2로 앞서 있던 경기는 어느새 4-10으로 크게 벌어졌다.

뒤늦게 김윤식(0.1이닝 1실점)과 구창모(0.1이닝 2실점), 이의리(0.1이닝 3볼넷) 등 좌완 요원들을 꺼냈지만, 이들을 왜 먼저 꺼낼 수 없는지만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이의리가 만들어 놓고 간 7회 2사 만루 위기 상황을 박세웅(1.1이닝 무실점)이 불을 꺼줘서 다행이지, 한 명의 주자만 더 홈플레이트에 들여보냈다간 콜드게임의 수치를 당할 뻔 했다.

경기 뒤 이강철 감독은 자신의 책임을 인정했다. 그는 “초반에 승기를 잡았는데, 내 투수 교체가 좀 늦었다”면서 “공격 쪽으론 일본의 좋은 투수를 상대로 잘 따라갔지만, 투수들은 좋은 투수들인데 자기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날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한 일본 기자는 이 감독에게 “이날 나온 13대4 스코어가 지금의 본야구와 한국야구의 차이를 나타내는 수치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선수들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다소 무례하게 느낄 법한 질문에 이 감독은 “일본이 잘했다. 잘한 건 인정한다. 그렇지만 오늘 경기가 한국 선수들이 갖고 있는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선수들이 성장하고 나면 충분히 좋은 경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침착하게 답했다.
이강철 감독. 연합뉴스
모든 선수들을 감싸 안아야 하는 사령탑의 역할상, 이 감독의 대답은 국가대표 사령탑으로서 내놓을 수 있는 최상의 코멘트이긴 했다. 하지만 진실은 외면해선 안 된다. 이날 한국야구와 일본야구의 레벨 차이는 확실히 드러났다. 한국이 세계적인 야구 강국이라는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져서 과거의 얘기가 됐다. 이제 한국 야구는 결코 강하지 않다.

도쿄=남정훈 기자 ch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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