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트왕 된 홈런왕... 두산 팬들은 “나가라”

양승수 기자 2024. 10. 4.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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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서울 송파구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KT 위즈와 두산 베어스의 포스트시즌 와일드카드 결정전 2차전에서 패하며 가을야구를 마무리한 두산 이승엽 감독이 인터뷰를 마친 후 굳은 표정으로 더그아웃으로 향하고 있다. /뉴스1

두산과 KT의 프로 야구 와일드카드 결정전 2차전이 끝난 지난 3일 잠실야구장.

선수단 전용 출입구 주변에 몰려든 팬 1000여 명이 줄기차게 “이승엽, 나가!”를 외치며 이승엽(48) 두산 감독의 자진 사퇴를 요구했다. 정규 리그 4위 두산은 이날 5위 KT에 0대1로 패배, 1~2차전을 모두 내주며 2015년 와일드카드전 도입 이후 사상 처음으로 업셋을 당한 팀으로 역사에 남게 됐다.

2년 연속 ‘가을 야구’를 와일드카드전에서 마감한 이승엽 감독은 “제가 아직 부족하다. 팬분들께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오랜 시간 야구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던 ‘국민 타자’는 왜 두산 팬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을까.

한일 프로야구 통산 626홈런을 때리며 아시아의 거포로 군림한 이승엽 두산 감독은 지휘봉을 잡고는 번트를 자주 대고 작전을 수시로 거는 ‘스몰볼’을 펼쳐 선 굵은 야구를 기대한 두산 팬들에게 실망을 안기고 있다. 사진은 2014년 삼성 시절 홈런을 날리는 이승엽. /허상욱 스포츠조선 기자

◇홈런왕 감독의 스몰볼

이승엽 감독은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거포다. 현역 시절 KBO 리그 시즌 홈런왕 타이틀을 5차례 따냈고, 베이징 올림픽 등 각종 국제 무대에서 시원한 홈런포로 한국에 승리를 안겼다.

일본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4번 타자로 뛰었던 이승엽 두산 감독은 취임 기자회견에서 “일본 야구를 경험하면서 디테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디테일을 앞세워 ‘허슬두’의 팀 컬러를 다시 구축하겠다”고 했다. ‘허슬두’는 끈질긴 투지와 함께 선 굵은 공격 야구로 2010년대에만 세 차례(2015·2016·2019) 한국시리즈 정상에 오른 두산의 애칭. 두산 팬들은 이승엽 감독에게 화끈한 야구를 기대하며 희망에 부풀었다.

하지만 이 감독은 ‘허슬두’보다는 ‘디테일’에 방점을 찍은 듯했다. 1회 주자가 나가면 번트부터 대는 등 ‘스몰볼(작전 야구)’로 팬들의 실망을 샀다. 대량 득점이 수시로 나오는 ‘타고투저(打高投低)’ 시대에 작전을 통해 점수를 쥐어짜는 이 감독의 스타일이 통하지 않는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올 시즌 이승엽 감독의 두산은 리그 10팀 중 둘째로 많은 85회의 희생 번트를 댔다. 더구나 그중 30번을 실패, 성공률(64.7%)도 뒤에서 둘째로 효율도 크게 떨어졌다.

16년 차 두산 팬이라는 박동근(31)씨는 “두산은 전통적으로 강공 위주의 ‘빅볼 야구’로 정상에 올랐는데 왕년의 홈런왕이 스몰볼을 추구해 실망스러웠다”며 “두산다운 야구를 하지 않은 데다 결과까지 나쁘니 팬들은 화가 난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두산은 와일드카드전에서 두 경기 모두 타선이 침묵하며 18이닝 무득점이란 치욕을 당했다. 주전 포수이자 중심 타자인 양의지가 부상으로 빠졌는데 공백을 메워줄 선수가 보이지 않았다.

두산은 오랜 시간 ‘화수분 야구’로 불리며 젊은 야수들이 끊임없이 발굴되고 성장하던 팀이었지만, 이승엽 감독 체제에선 젊은 타자를 육성하기보다 베테랑 위주 운영을 이어가면서 타선이 활력을 잃었다.

이 감독은 “젊은 선수들이 올라오지 못하면서 주전과 백업 선수 간 실력 차이가 크게 난다”고 올 시즌을 돌아봤다.

◇역대 최다 구원 등판 부른 ‘투마카세’

두산은 올 시즌 외국인 투수들이 부상에 시달리며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등 선발진이 무너진 탓에 불펜 중심 운영을 이어갔다. 그래도 불펜 평균자책점에서 리그 1위(4.54)를 기록하면서 ‘가을 야구’ 무대에 올랐다.

그래픽=조선디자인랩 김영재

하지만 두산 팬들은 한 이닝에 투수 3명을 올리는 등 이 감독의 잦은 투수 교체에 극심한 피로감을 호소했다. 일식(日食) 코스 요리인 오마카세(맡김 상차림)처럼 바로바로 투수가 교체되어 나온다며 ‘투마카세(투수+오마카세)’란 비아냥거림이 섞인 신조어까지 나왔다.

야구 통계 사이트 스탯티즈에 따르면, 올 시즌 두산에서 구원 투수가 등판한 횟수는 628회. 이는 2015년부터 144경기 체제로 프로 야구가 치러진 이후 역대 한 시즌 최다 기록이다.

두산 불펜진이 소화한 이닝도 600과 3분의 1이닝으로 올 시즌 10팀 중 가장 많았다. 프로 3년 차 이병헌은 77회 구원 등판해 SSG 노경은과 함께 가장 자주 마운드에 오른 투수가 됐다.

이 감독은 고교 시절 혹사 논란을 겪었던 루키 마무리 김택연에 대해 개막 전 40이닝 내외로 관리하겠다고 공언했으나 65이닝을 맡겨 팬들의 원성을 자아냈다. 불펜에 지나친 부담을 지우는 시즌 운용에 “이승엽 감독은 정규 리그에도 혼자 한국시리즈를 치르고 있다”란 비판이 나온다.

이승엽 감독이 두산 출신인 아닌 것도 두산 팬들에겐 감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는 대구 라이온즈파크에 초상화가 그려져 있을 만큼 삼성의 상징이자 전설로 통하지만, 두산 팬들은 “그래서 어쩌라고”란 반응을 보인다.

3일 일부 두산 팬은 삼성의 대표 응원가 ‘엘도라도’에 ‘삼성의 전설 이승엽’을 넣어 부르며 “삼성으로 돌아가라”고 외쳤다.

반면 난맥 속에서 팀을 2년 연속 가을야구에 진출시킨 건 성과라는 평가도 있다. 이승엽 감독에게만 책임을 묻기에는 외부 요인들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난 4월 두산 출신 오재원이 후배들에게 수면제를 대리 처방받은 일로 구속되는 사건이 터지며, 8명 선수가 2군 경기 출전조차 불가능하게 됐다. 이 중 몇몇은 1.5군급으로 팀 전력에도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험난했던 여정을 이겨낸 결실이 있었고 2022시즌 9위 팀을 지난해 정규리그 5위, 이번 시즌 4위까지 끌어올렸지만, 팬들의 시선은 냉정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팀의 정체성을 지키는 야구, 그리고 그 안에서 성공이다. 가을은 이승엽 감독에게 잔인했고, 그 또한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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