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과 교수가 원어민 발음 지적하면 벌어지는 일

2022년 4월 영어듣기능력평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전국 16개 시·도교육청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ㅇㅇ학년도 제2회 고등학교 3학년 영어능력듣기평가를 시작하겠습니다”

학창시절 지겹게 들었던 이 정제된 목소리는 4월 초 또다시 전국의 학생들 고막을 시험에 들게 할 영어듣기평가 안내멘트다. 각종 사설·평가원 모의고사나 수능에서도, 성인이 되어서도 토익 텝스 토플 등까지 합치면 우린 살면서 영어듣기 시험을 수십번 치러야 한다.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피할 수 없는 영어듣기 시험. 과연 누가, 어떻게 만드는 걸까. 유튜브 댓글로 “영어듣기평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취재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취재했다.

일단 우리에게 익숙한 ‘전국 중·고등학교 영어듣기 능력평가’는 1년에 2번 EBS FM라디오를 통해 실시된다. 하지만 출제와 주관 자체는 수능, 모의고사 출제기관인 평가원(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출제한다. 이 과정은 100% 대외비다. 출제한 사람도, 녹음한 사람도 관련 사실을 발설하면 안된다는데. 녹음 계약 자체를 포함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에피소드조차 말하고 다녀선 안된다는데 관련 계약서만 3~4번 쓸 정도로 엄중한 사안이라고 한다.

평가원 관계자
"이 부분 전체가 대외비라서 저희가 좀 말씀드리기가 힘들거든요. 모의평가도 수능에 준해서 보안을 저희가 지키고 있거든요. (성우 본인이) 섭외 받았다 이것도 다 얘길 하시면 안돼요.”

평가원 관계자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의뢰를 받았으니 취재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설 모의고사 듣기평가는 어떨까. 과정은 대략 이렇다.
①업체가 수능 등 출제 경험이 있는 선생님들을 섭외한다.
②선생님과 편집자가 모여 문항검토회의를 한 뒤 문제를 선별하고, 중고등학교 수준에 맞지 않는 단어가 있으면 걸러낸다.
③원어민 성우들을 섭외해 비로소 녹음이 시작된다.
평가원 주관의 수능이나 모의고사도 전체적인 틀은 비슷할 것으로 추정된다.

대형학원 관계자
"매번 섭외하는 건 아니고 녹음 회사들이 있습니다. 거길 통해서 원어민들을 섭외하고, 원어민들한테 미리 대본을 넘겨요. 녹음 전에 실질적으로 원어민이다 보니 표현 잘못된 부분들, 그런 걸 녹음 과정에서 담당자에게 얘기하면서 수정을 거칩니다. (이후엔) CD로 굽는다든가 MP3 파일로 만든다든가. 전체 17문제를 통으로 만들기도 하고, 통으로 만들어진 걸 각각 자르기도 하고요."

그렇다면 녹음엔 어떤 사람들이 참여할까. 수소문 끝에 영어듣기 시험 문제를 녹음해온 업체 관계자와 연락이 닿았다. 모의고사뿐 아니라 초창기 토익 텝스 토플 등 많은 영어시험과 교재 등을 녹음해 온 곳이다. 이 분에 따르면 대략 2000년대 초까지의 녹음 과정은 이랬다.
①미국 성우 조합과 계약서를 체결한 뒤 남녀 각각 성우 샘플을 받는다.
②처음 의뢰한 국내 출제기관·업체에 받은 샘플을 넘긴다.
③업체가 성우를 선택하면 직접 미국으로 날아가 성우들과 녹음을 해서 들고 온다.

물론 국내에서 외국인을 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 미군 부대 방송 AFKN에서 인력을 섭외하는 에이전트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외국인 성우를 구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미군 부대까지 거쳐야 했던 것.

녹음 업체 관계자
"조심스러운 표현이지만 아무래도 백인을 선호하더라고요. 너 원래 부모가 아메리칸이니 (하고 따지고) 흑인들도 선호하지 않아요. 교수님들이 많이 오잖아요. 영문과 교수님들이 출제를 많이 하고 그래서 오셔가지고 흑인하고 얘기하다가 발음 가지고 트집 잡아가지고, 실랑이하다가 녹음 못하고 간 적도 있어요."

출제진인 교수, 선생님들과 원어민들이 ‘이 발음이 맞다’며 다툰 일은 꽤 많았다고 한다. 문제 출제를 주도한 이들이 원어민 발음을 지적하는 일이 많았다는 건데 출제자들은 표준화된 ‘스탠다드 잉글리시’로 해달라고 한 반면, 원어민 입장에서는 내 영어가 맞는데 무슨 소리냐고 한 거다.

녹음 업체 관계자
"예전에 한국인 박사 출신 교수들이 와서 디렉팅을 하면은 외국인들하고 많이 다퉜어요. 특히 이제 파닉스(발음 교재) 녹음하는 거라든가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느낌이 표현이 안 되는 거잖아요. 당신이 알고 있는 원어민 (영어 발음이 아니라고). 이거 뭔가 사투리 쓴대요. 근데 들어보는 모든 사람들은 아닌데 싸울 때 보면은 박 터지죠. 그리고 나중에 외국인이 녹음 안 하고 가죠”

당시에 이렇게 다툼이 생기는 경우 대부분은 출제진인 교수·선생님의 의견이 관철된 채 성우가 교체됐다. 하지만 요즘엔 이런 다툼 자체가 적다고 한다. 예전에는 해외 유학파보다는 국내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많아 자신들이 공부해온 발음만 맞다고 생각해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 많았지만, 요즘은 워낙 해외 문물이 익숙해져 다르다는 설명이다.

2000년대 중반이 넘어서면서부터는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 고급인력도 많아 인력을 구하기가 훨씬 쉬워졌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모이는 구직 페이지나 커뮤니티에 공고를 올리기도 하고, 성우들의 SNS로 메시지를 보내 섭외하기도 한다.

녹음 업체 관계자
"특히 이제 요즘 각 대학의 영문과 교수들이 원어민들이 많지 않습니까? 거의 다 대부분 보면 한국인 부인 그리고 한국인 남편 따라온 사람들 제일 많고 그 다음에 각 대학의 영문과 교수들이 많다고 보시면 좋을 것”

당사자인 성우들 생각도 들어봤는데 국내에서 2년 넘게 활동해온 호주 출신 성우는 외국의 경우 성우들 조합이 보수 협상을 도와주지만, 한국에선 각자 알아서 해야 해 경력이 얼마 안되는 성우들은 ‘가격 후려치기’를 당할 일이 종종 있다고 했다.

원어민 성우
"일감도 많고 좋은 회사도 많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불만은 없지만, 성우들 각자가 제대로 보수를 받기 위해선 외로운 싸움을 해야 하거든요. 우리를 대표해주거나 보호해 줄 곳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