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광주 너머 5·18] ③ 1980년 부산·경남 무슨일 있었나

임지섭 기자 2026. 5. 11.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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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은 학생회 조직 구축, 경남은 거리시위
‘서울의 봄’ 국면 학생사회 재건 활동
5·17 계엄 속 광주, ‘불쏘시개’ 역할
유신 청산 국면 속 87년 헌법까지 연결
광주와 단절 아닌 ‘연결된 5월’ 증명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기간 중 김탁돈 당시 국제신문 사진기사가 촬영한 대열을 만들어 행진하는 시위대.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1979.10~1980.03
부마항쟁 뒤에도 대학가 '후끈'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은 유신체제를 뒤흔든 결정적 사건이었다. 부산대·동아대·경남대 등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시민 수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유신 철폐'를 외쳤다. 같은 달 26일엔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됐다. 유신 체제의 종결이 눈 앞에 다가온 듯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계엄은 유지됐고, 최규하 정부나 군부 등 유신체제를 떠받치던 권력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의식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대학가는 다시 들끓었다. 부마항쟁 당시 구속되거나 강제징집됐던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오면서 학원 자율화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이 시기 부산·경남 학생운동은 부마항쟁 경험을 토대로 재조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학내에서는 스터디그룹과 야학 활동도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사회과학 서적과 금서가 학생들 사이에서 은밀히 돌았다. 하숙집과 다방, 동아리방에서는 시국 토론이 이어졌다.

학생들이 가장 먼저 문제 삼은 것은 학도호국단이었다. 유신체제 시절 학생 통제기구 역할을 했던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총학생회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요구가 빠르게 확산됐다.
 
1979년 10월 18일, 부산 시내에서 계엄 포고문을 읽는 시민들. 김탁돈 당시 국제신문 사진기자가 촬영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제공

1980.03~04
'서울의 봄' 속 총학생회 부활

1980년 봄이 되자 대학가는 더욱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이른바 '서울의 봄' 분위기 속 대학생들은 단순한 시위 차원을 넘어 조직 재건 단계로 들어갔다.

부산대에서는 1980년 2월 26일 10명의 학회장이 '학내자율화추진발기회'를 구성했다. 이어 3월 8일에는 59개 학과 학회장과 1학년 대표들이 참여한 학생대표자회의가 출범했다. 이후 단과대 학생회 선거가 잇따라 진행됐고, 5월 16일 총학생회장·총여학생회장 선거까지 치러졌다.

동아대에서도 흐름은 비슷했다. 4월 4일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꾸려졌다. 같은 달 12일에는 1천여 명이 참석한 학칙개정 공청회가 열렸다. 6년 만에 총학생회도 부활했다.

경남대에서도 3월 14일 600여 명이 참석한 학칙 개정 공청회가 열렸고, 4월 3일 총학생회장 직선제가 실시됐다. 부산수산대(현 부경대) 학생 600여 명도 학원 자율화와 학장 퇴진 등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을 벌였다.

학생들은 유인물과 대자보를 통해 계엄 해제와 유신 잔재 청산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동아대에서는 변재관 등을 중심으로 비합법 학내 신문인 '무명지'도 제작됐다. 1980년 4월 22일 창간된 '무명지'는 1호만 1천 부가 인쇄·배포됐다.

1980.05.14~16
부산은 '조직화', 경남은 '거리'

1980년 5월 중순, 전국 대학가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서울역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고, 부산·경남 지역 학생사회 내부에서도 "서울만 바라볼 수 없다"는 분위기가 강해졌다.

다만 지역별 양상은 차이를 보였다. 부산은 교내 농성과 조직 재건 중심 흐름이 강했다. 부산대·동아대·경성대·해양대 등에서는 시국토론과 철야농성이 이어졌고, 학생회 조직 정비 작업도 동시에 진행됐다.

반면 경남 지역은 보다 직접적인 가두시위 양상을 띠었다. 경남대와 마산대 학생들은 시내로 진출해 시민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고, 진주 경상대 학생들도 거리 집회에 나섰다.

당시 부산 지역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김종세 부울경 5·18 민주유공자회 회장은 "부산은 학생운동 조직의 코어가 내부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학교 내 내실을 다지는 흐름이 강했다"며 "반면 경남은 도시 규모가 작고 학교와 시내가 가까워 거리 시위로 바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대학 밖 움직임도 있었다. 부산 지역 사회운동 세력은 1980년 초부터 학생·노동·종교·지식인 조직을 연결하는 논의를 이어갔다. 결국 5월 16일 부산 보수동 애린유스호텔에서는 민주청년협의회가 결성됐다. 당시 김재규 씨 등 7명이 창립에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부마항쟁을 경험했던 부산·경남 역시 독자적인 민주화 흐름을 이어가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1980.05.17
계엄군 투입…총·칼 앞에 멈춰서

흐름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0년 5월 17일 밤,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대학은 휴교됐고 학생회 간부와 재야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연행과 예비검속이 시작됐다.

부산·경남 지역에도 곧바로 계엄군이 투입됐다. 당시 부산·경남 14개 대학에 13개 부대 병력이 배치됐고, 계엄군 주둔은 같은 해 8월 말까지 이어졌다. 부산·경남 지역에서만 약 130명이 예비검속 또는 수배 대상에 오른 것으로 전해진다.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다. 계엄 확대 직후인 5월 18일 부산 남포동 일대에서는 대학생 30여 명이 기습 시위를 벌였다는 기록도 계엄사 정보보고에 남아 있다. 학생들은 짧은 시간 구호를 외친 뒤 곧바로 흩어졌고, 연행자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시각 광주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계엄군 투입과 유혈 진압 소식은 부산·경남 학생사회에도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일부 학생·재야 세력은 광주 상황을 외부에 알리려는 움직임을 시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79년 부산과 마산에서 시작된 민주화 요구가 1980년 5월 광주에서 가장 치열한 형태로 폭발했고, 그 폭발이 다시 부산·경남의 민주화 열망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 셈이다. 부마와 광주는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유신체제와 군부 권력에 맞서 이어졌던 하나의 흐름이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김종세 회장은 "부마와 광주는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같은 역사적 국면에 있었다"며 "유신 철폐와 계엄 해제 요구는 지속됐고, 결국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헌법 개정을 쟁취해 냈다"고 말했다. 이어 "부마와 5·18, 6월 항쟁은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군부 권력에 맞선 하나의 역사적 국면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지섭 기자 ljs@namdo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