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햄버거와 HBM, 김동선이 마주할 '나노의 벽'

한화 3남 김동선 부사장의 한화세미텍이 국가전략기술의 요체인 HBM 공급망을 넘어 글로벌 AI 산업의 심장부로 진격하고 있다. SK하이닉스라는 거대 우군을 등에 업고 한미반도체가 수성해온 TC본더 시장의 독점 체제에 강력한 균열을 냈다. 연간 수천억 원의 확실한 매출원을 단숨에 쥔 셈이니 경영권 승계 시험대에 오른 오너 3세에게 이보다 화려한 데뷔 무대도 없다.

하지만 반도체 현장의 시선은 기대보다 냉정하다. 김 부사장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갤러리아, 호텔, 그리고 최근 '파이브가이즈'로 대표되는 F&B와 유통의 영역이었다. 그가 누벼온 유통과 F&B는 감각적인 브랜딩으로 대중의 기호를 선점하는 '심리 공략'의 전장이었다.

반면 그가 손에 쥔 TC본더는 나노미터(nm) 단위의 오차조차 허용하지 않는 극한의 정밀 공학이다. 햄버거의 맛은 잘 짜인 레시피와 마케팅으로 지킬 수 있지만 반도체 장비의 수율은 레시피 너머의 집요한 기술적 직관을 요한다. 지금 한화세미텍이 누리는 호황이 한화의 실력인지, 아니면 AI라는 거대한 파도가 모든 배를 띄워 올린 결과인지는 머지않아 판가름 날 것이다.

이면을 들여다보면 재무적 숙제 또한 산적해 있다. 감사보고서가 증명하는 악화된 현금흐름과 부채 구조는 단기간의 수주 실적만으로 가릴 수 없는 난제다. 특히 승계의 정당성과 맞물린 RSU 보상 체계 아래에서 김 부사장의 경영 성과는 단순한 숫자를 넘어선다. HBM 수주라는 화려한 성적표가 '이익'이라는 실속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에겐 의미가 없다.

물론 삼성전자 출신의 기술 전문가 김재현 대표를 전면에 내세운 포석은 영리하다. 다만 전문 경영인이라는 방패는 기술 변곡점에서 유효기간이 짧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 산업은 2~3년 주기로 기술의 판 자체가 뒤집히는 가혹한 전장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보고서상의 숫자가 아니라, 수조원의 적자를 감수하고서라도 미래 공정에 명운을 걸 수 있는 오너의 '재무적 결단력'과 기술의 방향성을 꿰뚫어 보는 '전문가적 안목'이다. 유통업에서 익힌 브랜딩의 마법은 반도체 클린룸의 미세 먼지 하나조차 해결해주지 못한다.

당장 내년이면 HBM 시장은 '하이브리드 본딩(Hybrid Bonding)'이라는 거대한 기술 절벽을 마주하게 된다. 기존 '범프(Solder Bump)' 기반 장비 생태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공법인 하이브리드 본딩으로 넘어가는 변곡점을 맞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양산 시점은 이르면 2029년으로 점쳐지지만 장비업계의 시계는 늘 그보다 2~3년 앞서 흐른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화세미텍에게 골든타임은 지금이다.

이 변곡점에서 필요한 것은 관리 효율이 아닌 기술 담판이다. 매출 대비 10% 초반에 머물고 있는 현재의 R&D 투자 규모로는 하이브리드 본딩 선두주자인 베시(Besi)나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AMAT) 같은 거인들이 구축한 기술 장벽을 넘기엔 역부족이다. 이들은 단순한 장비 공급을 넘어 차세대 AI 반도체의 '표준'을 설계하며 시장을 독식하는 포식자들이다. 한화세미텍이 SK하이닉스라는 안방 수성에 만족하지 않고 이들과 진검승부를 벌이려면 오너의 결단이 담긴 파격적인 자본 투입과 기술 집착이 전제돼야 한다.

국가적 차원에서도 대기업 한화의 반도체 장비 시장 진출은 의미가 크다. 특정 외산 장비나 국내 독점 업체에 의존하던 후공정 생태계에서 공급망을 다변화한다는 명분은 확실하다.

그러나 시장은 '한화'라는 이름표에 점수를 주지 않는다. 오직 칩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붙이느냐는 '수율'로만 말할 뿐이다. 실력을 증명하지 못한 채 그룹의 후광과 수혜만 입는 오너에게 시장은 더 이상 관대하지 않다. 김 부사장의 이번 반도체 장비 시장 진출이 단순한 '치적 쌓기용 외도'로 남을지, 한화를 진정한 기술 강자로 탈바꿈시킬 신의 한 수가 될지는 오로지 김 부사장의 몫으로 남았다.

김 부사장은 이제 화려한 조명 아래 마케팅 대신 차디찬 웨이퍼의 무게와 나노미터 압박을 견뎌내야 한다. 한국 전자산업은 '오너 김동선'의 홍보 문구가 아닌 장비 생태계를 리딩하는 '전략가 김동선'의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

장소희 미래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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