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seas Trip]낙후된 섬의 재발견...일본 시코쿠 여행

2025. 12. 8.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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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칸센·프로야구팀 없는 느린 여행지 시코쿠
88사찰 원형으로 걷는 오헨로 순례길 유명
우동의 섬 ‘시코쿠’에서 먹는 사누키 우동
하루키『해변의 카프카』 배경지 ‘다카마쓰’ 여행

느린 여행, 소소한 여행, 걷기 여행, 먹거리 여행, 힐링 여행…. 이 모든 것의 골자는 바쁜 현대인의 일상과 정반대되는 개념이다. 천천히, 잔잔히 그리고 유유히 흘러가는 여행의 시간을 바란다면 요즘 뜨는 여행지, 일본 시코쿠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낙후된 섬이 선사하는 위로와 휴식은 나직한 울림과 함께 강렬한 기운을 느끼게 할 것이다.

시코쿠 순례길 1번 료젠지 사찰 내부
시코쿠에서는 모두가 순례자다

일본 열도를 구성하는 4개의 주요 섬, 혼슈를 중심으로 북쪽으로 홋카이도, 남쪽으로 규슈와 시코쿠 가운데 면적이 가장 작은 시코쿠는 다른 3개의 섬과 달리 관광산업이 비교적 덜 발달한 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시코쿠에는 주요 섬을 잇는 신칸센 노선이 없고, 면적 대부분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 발전이 더디기 때문이다. 또한 4개의 섬 중 유일하게 활화산이 없는 데다 정령지정도시(일본 내각에서 제정하는 법정인구 50만 명 이상의 시)와, 일본 프로야구팀도 없다.

시코쿠 순례길 1번 료젠지 사찰 입구 전경(위)과 사찰 본당 모습(아래)
일본 내에서도 시코쿠는 가장 인지도가 낮은 섬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심지어 오키나와(일본의 제주도라 불리는 최남단에 위치한 작은 섬)보다도 뒤쳐질 정도. 이는 결과적으로 이곳 지역사람들의 폐쇄성에도 영향을 끼쳐, 관광산업의 발전을 더디게 하는 요인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시코쿠의 더딘 발전이 오히려 ‘느린 여행’이라는 시각과 맞물려 최근 들어 소소한 여행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색다른 목적지로 급부상하고 있다. 소도시가 선사하는 위로와 휴식이 느린 템포로 여행자를 맞이하는 곳, 시코쿠의 재발견이 반가운 이유다.

시코쿠 순례길 88번(마지막 사찰) 오쿠보지 사찰 본당(위)과 그 입구(아래)
시코쿠가 느린 여행의 목적지로 인기를 얻고 있는 데에는 ‘시코쿠 순례길’의 커다란 관심에서 비롯된다. 시코쿠는 섬 크기에 비해 사찰이 상당히 많은 편인데, 그 배경에는 일본 불교 최대 종파 중 하나인 신곤슈의 시조 승려 쿠카이(Kukai)의 고향이라는 점 때문이다.

9세기경 일본 헤이안 시대 초기에 활동한 일본 불교의 초석을 다진 승려로 알려진 쿠카이는 당시 그가 시코쿠 전역에 세우거나 수리 및 중창한, 또한 수행하며 머물렀던 절이 88곳에 이른다. ‘시코쿠 순례길’은 이러한 88개의 사찰을 순례하는 것으로, 1번부터 88번 사찰까지 총 거리 약 1,200km에 달한다. 이는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원형 순례길 중 하나기도 하다.

고즈넉하고 특색 있는 도시를 기대한다면

(위)도쿠시마 중앙공원에 위치한 옛 기차역 (아래)시코쿠 순례에 관한 역사적 기록을 엿볼 수 있는 ‘헨로 뮤지엄’ 외부
시코쿠 순례길은 순례자를 뜻하는 일본어인 헨로(お遍路)를 따서 ‘오헨로(Ohenro)’라 불리며, 순례자에게는 ‘오헨로상’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이들은 흰색 상하의를 갖춰 입고, 사초 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짚고 순례길을 걷는 것이 통상적인 차림새다.
“1번부터 88번 사찰까지 총 거리 약 1,200km에 달하는 시코쿠 순례길은 순례자를 뜻하는 일본어인 헨로(お遍路)를 따서 ‘오헨로(Ohenro)’라 불리며, 순례자에게는 ‘오헨로상’이라는 명칭이 붙는다. 이들은 흰색 상하의를 갖춰 입고, 사초 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짚고 순례길을 걷는 것이 통상적인 차림새다.”
(좌)헨로 뮤지엄에 전시된 순례자의 복장 (우)총 88개의 사찰을 순례하는 시코쿠 순례길 지도
순례는 전통적으로 도보로 진행되지만, 현대 순례자들은 자동차나 버스, 기차, 자전거, 오토바이 등을 이용해 순례길을 돌기도 한다. 도보로 순례길을 완주하는 데 약 50일이 걸린다고 한다. 과거에는 승려나 독실한 불교신자들을 중심으로 순례길을 걸었다면, 최근 들어서는 사람마다 걷는 이유가 제각기 다양하다.

종교적인 이유를 떠나 심신의 치유나 자연 속에서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오헨로상’을 자처한다. 외딴 섬과 같았던, 오래도록 일본 역사의 변방이었던 시코쿠. 그렇기에 순례길은 때묻지 않은 자연환경과 합일을 이루며 길 위에서 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힘을 싣는다. 순례의 이유나 배경이 무엇이건 간에 시코쿠는 걷는 자에게 아낌없이 길을 내어준다.

오쿠보지 사찰에 순례를 마친 순례자들이 남기고간 곤고즈에(지팡이), 곤고즈에는 매년 봄과 여름에 불에 태워 의례적으로 처리된다
시코쿠는 동서남북으로 나뉜 4개의 현, 즉 가가와, 도쿠시마, 고치, 에히메로 구성되어 있다. 각 현의 중심도시 가운데 다카마쓰(Takamatsu)와 도쿠시마(Tokushima)가 대표적인 여행지다. 더욱이 최근 두 도시를 연결하는 인천발 직항 노선이 운항되면서 이동의 편의가 두 도시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배경이 되고 있다.

다카마쓰는 일본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현으로 꼽히는 가가와현의 현청 소재지다. 이 도시의 항구는 1988년 혼슈를 잇는 세토대교가 개통되기 전까지 시코쿠 섬으로 향하는 주요 관문으로 통했다. 역사적으로 교통의 중심지이자 순례길의 출발점으로 인식됐던 곳이다.

순례길의 고즈넉한 자연 풍경
다카마쓰는 시코쿠를 대표하는 도시 중 하나지만 규모 면에서 보면 소도시에 불과해 도쿄나 오사카 등 일본의 일반적인 도시를 기대한다면 첫인상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즈넉하고 특색 있는 도시의 분위기를 기대했다면 다카마쓰는 완벽한 목적지가 아닐까 싶다. 이곳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의 주요 배경이 된 곳으로 유명하다.

소설 작품 속 장소를 직접 거닐어 보는 재미가 쏠쏠한데, 그중 도심에 위치한 ‘리쓰린 공원’이 다카마쓰 고유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다. 1745년에 건설된 리쓰린 공원은 일본 최대 규모의 문화재 정원으로 약 400년간 관리되어 온 중요 문화재다. 에도 시대 봉건 영주를 위해 조성되어 개인 산책 정원과 별장으로 쓰였던 이곳이 대중에 공개된 건 1875년 무렵에 이르서였다.

오쿠보지 사찰에 자리한 순례 중의 모습을 나타내는 승려의 동상
시운산 기슭의 75헥타르에 달하는 넓은 부지에 자리잡고 있는 정원에는 6개의 연못과 13개의 언덕, 독특한 모양의 돌과 식물이 조화롭게 조성되어 있으며, 사계절마다 변화하는 꽃의 풍경, 수백 년간 정성껏 가꿔온 1,000여 그루의 소나무가 공간을 채우고 있다.

남쪽과 북쪽 정원으로 나눠 각기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데, 산책길 중간마다 표시된 안내판을 쉼 없이 따라가다 보면 마치 비밀의 정원에서 보물찾기 놀이라도 하듯 흥미진진한 정원 탐방의 시간에 빠진다.

(좌)리쓰린 공원의 호수 위에서 즐기는 나룻배 체험 (우)언덕에서 바라다본 리쓰린 공원의 초록빛 유려한 경치
계절마다 자연의 시간을 머금은 채 정원의 색과 향, 분위기가 변화한다고 하여 ‘일보일경(一步一景)’이라는 표현이 붙은 리쓰린 공원. 즉, 한 걸음 한 걸음마다 풍경이 바뀌어 언제 방문해도 변화무쌍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신비의 정원이다.
자연의 강인함과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리쓰린 공원 소나무의 존재감
리쓰린 공원 호수에서 살아가는 거북이와 물고기
우동의 섬, 탱탱한 면발의 사누키 우동

“당신은 우동파인가요? 라멘파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나의 선택은 무조건 우동이다. 어떤 스타일의 우동을 선호하는지 질문이 이어질 텐데, 이것 또한 망설임 따윈 필요 없이 ‘사누키 우동’이다. 삼시세끼 사누키 우동으로 배를 채울 수 있을 정도이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나처럼 당당히 우동파를 외치는 사람이라면 시코쿠는 먹는 즐거움만으로 여행의 8할이 채워지는, 그야말로 ‘우동의 섬’이다. 그도 그럴 게 사누키 우동의 본고장이기 때문이다. 사실 원조 우동을 직접 맛보기 위해 시코쿠 여행을 결정한 배경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이 될 것이다.

(위) 윤기가 흐르는 길고 탱탱한 면발이 특징인 사누키 우동, (아래) 노포 스타일의 일반적인 우동집 내부 전경
사누키 우동은 사누키국(현재의 가가와현에 해당) 일대에서 생산되는 우동의 일종이다. 전래 시기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으나, 에도 시대 전기의 병풍에 그려진 그림에서 우동집을 여럿 찾아볼 수 있다고 하여 사누키 우동의 대략적인 역사를 16세기 말 혹은 17세기 초로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사누키 우동이 일본 전역에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건 1960년대 들어서 시작된 변화다.

가가와현에서 우동은 일상을 구성하는 주된 요소 중 하나다. 일단 수치상으로 살펴보면 가가와현이 일본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현임에도 불구하고 1인당 연간 우동 소비량이 230그릇으로 일본 내 1위에 해당한다. 일본 내의 우동 총생산량 또한 가가와현이 연간 60만 톤에 달해 압도적인 수치를 나타낸다.

노포 스타일의 일반적인 우동집 내부 전경
사누키 우동의 특징은 우동 면을 만드는 기본 재료인 ‘밀’에 그 비밀이 있다. 가가와현에서 전통적으로 재배되어 온 특정 밀을 사용하여 생산된 우동 면은 쫄깃한 식감이 특징이다. 윤기가 흐르는 탱탱한 면발이 사누키 우동의 맛을 좌지우지하는 핵심 키워드로 손꼽힌다.

‘우동의 섬’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시코쿠에서 우동집 찾기란 편의점 찾기 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대다수의 우동집이 노포 스타일로 오래되고 허름한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으며, 그 특유의 분위기가 소박한 우동의 맛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져 그것 자체로 깊고 진한 경험을 안겨준다.

시코쿠를 여행하는 동안 적어도 하루에 한끼는 우동을 먹었는데, 우동의 종류가 다양해 매일같이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사누키 우동은 쫄깃한 면발 그대로의 맛을 추구하기 때문에 양념을 덜하거나 조리법이 심플한 것이 특징이다. 소소하고 깔끔한 우동의 맛이 단조로운 일상과 어우러져 매일의 한끼를 책임졌다.

밥과 반찬 등이 곁들여진 우동 정식
우동 면을 삶아 즉시 찬물로 헹군 뒤 진한 쯔유에 찍어 먹는 ‘자루 우동’, 삶은 우동 면에 국물을 끼얹어 먹는 ‘붓카케 우동’, 생 달걀과 간장을 넣어 먹는 ‘가마타마 우동’이 인기 메뉴다. 사누키 우동을 처음 맛본다면 자루 우동을 가장 먼저 시도해볼 것을 추천한다. 사누키 우동의 특징인 쫄깃, 쫀득한 탄성이 느껴지는 면발을 오롯이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전통이 살아 숨쉬는 이색 볼거리

도쿠시마현 북부를 지나던 길에 주변 우동집을 찾다가 우연히 일본의 전통적인 거리 풍경을 발견한 일화가 있다. ‘우다츠 거리’라 불리는 이곳, 관광명소이긴 하지만 위치상 도쿠시마 도심과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외진 시골마을에 자리해 일부러 우다츠 거리를 방문하기 위해 발걸음을 하는 관광객은 그리 많지 않다. 미마시 와키마치에 위치한 우다츠 거리는 도쿠시마현 북부를 둘러볼 계획을 갖고 있다면 한번쯤 방문할 만한 이색적인 볼거리 중 하나다.

(좌)지붕 아래 옆집으로의 화재 확산을 방지하는 방화벽, ‘우다츠’가 설치된 모습 (우)일본의 전통 가옥이 즐비한 우다츠 거리
‘우다츠’는 ‘벽’을 가리키는 건축양식 용어다. 에도 시대 상가 건축에서 옆집으로의 화재 확산을 막기 위해 튀어나오게 만든 회반죽 방화벽을 일컫는 말로서, 당시 우다츠가 설계된 주택이나 건물은 부와 번영의 상징과도 같았다고 한다. 다시 말해 부잣집의 표본으로 인식되는 건축 구조였던 것. 우다츠 거리가 위치한 와키마치는 당시 상거래 중심지로서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호상이 많았기 때문에 거대한 저택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자동네로 유명했다고 한다.

1988년 국가의 중요한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구로 지정된 우다츠 거리는 에도 시대부터 쇼와 시대 초기까지의 전통 가옥들이 이곳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그만큼 역사적 가치가 높은 장소다. 전통 가옥과 함께 카페나 식당, 기념품 상점 등이 곳곳에 자리해 가볍게 산책하며 둘러보기 좋다. 또한 주변 요시노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며 한적한 시골마을의 정취를 느끼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백만 년에 걸쳐 형성된 아와 모래 기둥 전경
우다츠 거리에서 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이색 볼거리를 마주했다. 사실 이곳은 우동집 사장님의 추천을 받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일본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곳의 명칭은 ‘아와 모래 기둥’ 혹은 ‘아와 흙 기둥’이라 일컬어진다. 말 그대로 흙으로 형성된 거대 기둥이 위용을 뽐내는 곳. 비밀의 정원 같이 숨어 있듯 자리한 독특한 모래 기둥이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게 한다. 사암과 자갈 덩어리로, 풍화 작용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모양을 띠는 얇은 암석 기둥을 형성하고 있다.

특히 이 흙 기둥은 100만 년에 걸쳐 아교산맥에서 흘러나온 토사가 여러 층에 축적되어 모래층이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도 자연의 영향을 받아 시시각각 그 형태가 변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아와 모래 기둥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서기 8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예로부터 일본의 많은 학자와 예술가들이 토주(土柱)를 바라보며 영감을 얻어 예술작품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1007호(25.12.02)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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