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랠리에서 들었던 셔틀콕 소리가 유난히 또렷했습니다. 코리아오픈 준우승의 아쉬움을 씻겠다는 마음이 라켓에서 바로 전해지는 듯했습니다. ‘셔틀콕 여제’ 안세영입니다. 덴마크 오덴세에서 열린 BWF 월드투어 슈퍼750 덴마크오픈 32강, 스페인 클라라 아주르멘디를 33분 만에 2-0(21-15, 21-9)으로 꺾고 16강에 올랐습니다. 내용까지 깔끔했습니다. 1게임 11-12에서 연속 5점을 뽑아 흐름을 틀었고, 2게임에서는 두 차례의 7연속 득점으로 완전히 경기를 잠갔습니다. 스코어보다 더 반가운 건 몸의 반응과 표정입니다. 자신 있게 앞으로 달려들고, 뒤로 빠질 때도 흔들림이 적었습니다. ‘다시 달릴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였습니다.

이번 대회는 안세영에게 각별합니다. 9월 코리아오픈 결승에서 야마구치 아카네에게 0-2로 졌습니다. 올 시즌 결승 패배가 처음이었기에 충격이 남았습니다. 게다가 여름엔 무릎도 괴로웠습니다. 7월 중국오픈 4강 기권, 8월 세계선수권 4강 탈락. 그럼에도 그녀는 중국 마스터스에서 실점 관리가 완벽에 가까운 우승으로 돌아왔고, 곧장 덴마크오픈을 선택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흔들린 리듬을 다시 세계무대에서 바로 세우려면, ‘강한 대회에서 강한 상대’를 이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진표에는 천위페이와 야마구치가 함께 있습니다. 도망치지 않고 그 정면을 택한 선택 자체가 메시지입니다. “정상은 내가 지킨다”는 선수의 말 없는 선언입니다.
32강은 경기 운영 교과서였습니다. 초반에는 길게 받아내며 아주르멘디의 타점과 템포를 읽었습니다. 11-12 뒤진 국면에서 네트 앞 낙하와 길게 뽑는 클리어를 섞어 상대의 스텝을 끊었습니다. 그다음은 안세영의 시간입니다. 코트 전후를 늘였다 줄이며 상대의 허리를 비틀었고, 카운터 드라이브 각도를 조금 더 예리하게 가져가 실수를 유도했습니다. 2게임 9-7에서 7연속 득점이 탄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받는 공의 높이를 낮춰 드라이브를 줄였고, 길쭉한 하이클리어로 두 번째 볼을 억지로 때리게 만들었습니다. 상대는 결국 선택지를 잃었습니다.

몸 상태도 중요합니다. 오늘은 방향 전환이 가벼웠습니다. 무릎을 세워 세컨드 스텝으로 전환하는 장면에서 움찔거림이 없었습니다. 2게임 중반 이후에도 스트레이트 푸시 스텝이 흔들리지 않았고, 백코트에서 전위로 뛰어들 때 중심이 낮게 유지됐습니다. 시즌 중반의 ‘무릎 아끼는 모션’이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체력 분배 역시 좋아졌습니다. 길게 가는 랠리 뒤에도 첫 서브 루틴이 일정했고, 라켓 헤드가 끝까지 살아 있었습니다. 덴마크의 건조한 공기와 조명 반사에 민감한 선수도 많은데, 셔틀 터치가 초반부터 안정적이었습니다.
기술적으로 보면, 올 시즌 안세영의 승승장구는 ‘속도 차이’와 ‘길이 싸움’에서 나왔습니다. 말레이시아·전영·인도네시아 같은 슈퍼1000 세 대회 우승을 합치면, 결정적인 포인트는 대부분 그 두 가지에서 해결했습니다. 상대가 빠르게 밀어붙이면 안세영은 한 박자 늦춰 낙하로 끊고, 다시 직선 푸시로 템포를 올립니다. 길이는 코트 끝선 10~20cm에 걸치는 ‘가장 보기 싫은 곳’으로 보냅니다. 오늘도 그 무기가 그대로 작동했습니다. 여기에 네트 앞에서 라켓 페이스를 늦게 열어 주는 ‘딜레이드 네트샷’이 몇 개 더 늘었습니다. 이 한 수가 있어야 천위페이의 촘촘한 수비를 흔들 수 있습니다.

다음 상대는 일본의 니다이라 나츠키입니다. 정교한 디펜스와 버티는 랠리가 강점입니다. 관건은 초구 주도권입니다. 리시브 라인을 한 반걸음 앞으로 당기고, 첫 네트볼에서 길게 뽑아 뒤를 먼저 보여주면 상대의 스텝이 느려집니다. 서브 루틴도 변주가 필요합니다. 토스 높이를 한두 번 바꾸고, 에이밍을 백핸드 힙 쪽으로 살짝 붙이면 니다이라의 준비가 늦어집니다. 무엇보다 길고 지루한 랠리를 겁내지 않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오늘처럼 득점 뒤 호흡을 길게 가져가며 템포를 주도하면, 2게임 중반 이후 체력 우위가 드러납니다.
덴마크오픈은 ‘리듬 회복’과 ‘자존심 회복’의 교차점입니다. 시즌 8승에 도전하는 무대이기도 하고, 12월 월드투어 파이널스를 앞둔 마지막 큰 점검이기도 합니다. 야마구치와의 최근 패배는 분명 숙제로 남았습니다. 야마구치의 플랫 드라이브 연속과 네트 앞 작은 흔들림에 대응할, 더 담대한 길이 변화가 필요합니다. 천위페이를 넘으려면 반코트 길이의 하프클리어와 백코트 스매시 각의 교차가 필수입니다. 오늘 보여준 몸의 반응과 템포 조절이면, 숙제를 풀 재료는 충분합니다.
마음도 가벼워 보였습니다. 1게임 뒤 라켓을 쓰다듬고 살짝 웃는 표정이 화면에 잡혔습니다. 자신이 하는 배드민턴의 리듬을 되찾았다는 신호입니다. 안세영은 경기 후 “더 나은 선수가 되겠다”고 자주 말합니다. 그 문장을 빈말로 듣기 어려운 이유는, 다음 대회에서 실제로 문장을 증명해 왔기 때문입니다. 연초 7회 우승이 우연일 수 없듯, 여름의 흔들림도 영원할 수 없습니다. 선수의 커리어는 파도처럼 오르내리지만, 중요한 건 파도를 타는 기술입니다. 오늘 그 기술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팬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언제나 욕심이 앞섭니다. “매번 우승해 달라”, “항상 완벽해 달라”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하지만 스포츠는 균형의 예술입니다. 최고조의 컨디션과 작은 통증, 불타는 동기와 누적된 피로가 매주 섞입니다. 그러니 오늘 같은 경기가 더 소중합니다. 무너진 뒤 다시 세우는 리듬, 불안한 발을 다시 단단히 딛는 용기, 여왕의 자리를 다시 스스로 확인하는 눈빛. 우리는 그 장면을 확인했습니다.
덴마크의 바람은 차갑지만, 코트 위 그녀의 걸음은 따뜻했습니다. 16강, 8강, 그리고 그다음. 길은 늘 멀어 보이지만, 한 포인트씩 밟으면 어느새 정상 근처입니다. 팬으로서 이렇게 응원하고 싶습니다. “세영 선수, 건강이 먼저입니다. 오늘처럼만 가볍게, 때로는 과감하게, 당신의 리듬을 믿습니다. 우리가 사랑한 건 우승 트로피만이 아니라, 지고 나서 더 강해지는 당신의 태도였습니다. 덴마크의 코트 끝까지, 그리고 12월 파이널까지 함께 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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