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북, 그리고 재회》
– H.O.T. 이재원이 벌어들인 수십억, 그 모든 돈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
1996년, 대한민국 가요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그 중심에는 단연 H.O.T.가 있었습니다.

10대 팬들을 열광시킨 전설의 아이돌, H.O.T.의 막내 이재원.
그의 얼굴이 실린 팬시용품은 전국을 휩쓸었고, ‘캔디’, ‘빛’, ‘전사의 후예’ 같은 히트곡은 세대를 아울렀습니다.

공연장은 늘 매진이었고, 팬클럽 수는 수십만에 달했습니다.
H.O.T.는 한국 최초의 대형기획 아이돌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현재의 체계를 확립시켰고, K-POP이라는 말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미 하나의 문화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시절, 어린 이재원이 무대 위에서 웃고 노래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북한에 갇혀 있는 할아버지였습니다.
“연락이 왔어요.“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대요…”

이산가족의 아픔은 전쟁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1950년 6.25 전쟁. 피난을 가고, 끊기고, 끌려가고, 갈라진 채로 70여 년이 흘렀습니다.
이재원의 아버지는 겨우 세 살이었을 때, 징집 통지서를 받고 떠난 아버지와 생이별하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북한 군에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남쪽에서 자라난 아들과 손자는, ‘북한 어딘가에 있을’ 그를 평생 기다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믿기지 않는 연락이 왔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십니다. 탈북을 원하십니다.”
하지만 이 연락은 기쁨이기보다는 곧 두려운 현실을 동반했습니다.
탈북 비용.
브로커를 통해 사람을 데려오는 데는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 심지어 경로와 위험성에 따라 수십억 원까지 요구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불법 경로, 단속과 고문,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여정.
그 대가로, 브로커들은 거액을 요구합니다.
한 번의 실패는, 곧 목숨을 잃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모셔와야죠. 돈은 제가 쓸게요.”
그 말을 꺼낸 사람은 다름 아닌 이재원이었습니다.
그는 H.O.T. 시절 벌어들인 수입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차도 사지 않았고, 집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의 유일한 목표는 단 하나였습니다.
“할아버지를 무사히 데려오는 것.”

브로커와 접촉하고, 경로를 짜고, 도주를 감추고, 여권과 위조 신분을 만들고...
그 일련의 과정은 마치 영화 같았습니다.
수십 억 원이 그 어두운 세계로 흘러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할아버지는 탈북에 성공했습니다.

52년 만의 재회2000년대 초반.세 살의 아이가 이제는 중년이 된 아들이 되어, 그 앞에 서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반세기 넘게 불러보지 못한 단 한 마디.

이재원의 아버지는 눈물로 그를 안았습니다.
그리고 곁에 선 이재원은, 자신이 지켜낸 가족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남한에서 10년을 더 살아갔습니다.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적어도 가족의 품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모두에게 가능한 건 아닙니다이재원의 이야기는 한 편의 감동 실화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이 재회를 꿈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수만 명의 이산가족이 존재합니다.

생사를 알 수 없는 북의 가족을 향해 편지 한 장조차 보내지 못한 채, 살아생전 마지막 인사를 단 한 번도 나누지 못하고 기다림으로 늙어가는 분들이 계십니다.
탈북 브로커에게 주어야 할 수억 원의 비용은 그분들께는 감당할 수 없는 벽입니다.
불법, 위험, 사기, 그리고 실패.
이 길은 돈만 있다고 모두가 안전히 건널 수 있는 다리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이산의 고통을 잊지 않기를”
이재원이 벌어들인 돈은 가족을 되찾는 데 쓰였습니다.
그는 유명인이었고, 재정적으로 가능했기에 선택할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그가 그 기회를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는
“언젠가는 만나게 되겠지…”
하며 하늘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분명히 계실 텐데요.
이분들 역시 기적이 일어나 다시 가족을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