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는 인기가 없는 경차. 모닝이나 레이 같은 베스트셀러도 있고 최근엔 캐스퍼도 인기를 끌었었는데 대형화에 밀려 전체적으로 판매량이 부진하다. 하지만 유럽이나 일본에서는 경차를 많이 타는 걸로 유명한데 요즘은 여기도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일본과 유럽에서도 곧 경차가 사라질 거라던데 왜 그런지 알아봐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취재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전세계적으로 경차가 경쟁력을 잃고 입지가 줄어가는 건 사실이다. 특히 경차 사랑으로 유명했던 유럽은 최근 몇년간 경차가 뚜렷하게 줄고 있다.
유럽에선 차량을 분류할 때 세그먼트(segment)라는 단위를 쓰는데, 경차는 이 중에서 가장 작은 A세그먼트(A-segment)라고 부른다.
유럽자동차제조협회(ACEA) 통계에 따르면 신차 중에서 경차를 포함한 소형차의 비중은 2011년만 해도 34%로 압도적 1위였지만, 2022년 기준 22%까지 쪼그라들었다.
유럽에선 낮은 구매력과 실용주의적 성향, 길이 좁고 주차공간도 부족한 영향으로 경차의 비중이 높은 걸로 알려져 왔다.
국내 자동차 회사들도 경차를 열심히 팔아왔는데, ‘피칸토’라는 이름으로 팔리는 모닝은 올해도 9월까지 유럽의 기아차 모든 제품 중 3번째로 많이 팔렸다. 현대차에서도 경차 i10(아토스)가 4번째로 많이 팔렸다.
하지만 경차로 짭짤한 이익을 내온 국내 업체들도 지금은 상황이 좀 변했다고 보고 준비를 하는 중이라고 한다.
[업계 관계자]
"대략 5~6년 전부터 유럽에서 A세그먼트가 사양세긴 해요. 그래도 아직 한국 경차는 판매량이 꾸준한 편이라 당장 전략 자체에 큰 변화를 주진 않지만 B세그먼트 정도 해당하는 캐스퍼나 EV2 같은 모델을 곧 유럽에 내놓으면서 차츰 그쪽으로 비중을 옮기는 구상 정도는 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실제로 유럽 유수의 자동차회사들은 새로 경차 모델을 개발하는 걸 그만둔지 오래다. 그나마 경차 모델을 전기차로 전환해서 내놓은 회사들도 있지만, 가격 경쟁력이 너무 형편없어 죽을 쑤는 중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건 경차 자체가 전기차로 전환했을 때 불리하기 때문이다. 경차는 크기 자체가 작기 때문에 달 수 있는 배터리의 크기도 작다. 배터리가 작으니 충전량도 적어지는데, 가뜩이나 배터리 기술도 없는 마당에 이걸 해결하자니 가격이 치솟는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
"들어갈 수 있는 배터리 용량이 작다 보니까 주행거리가 짧아지잖아요. 주행거리가 짧아지는데 그 주행거리가 짧아진 것만큼 충전 인프라나 이런 보급이 좀 늦어진 것이 한몫하는 거죠."
일례로 들 수 있는게 이탈리아의 피아트 500이다. 영화에도 종종 등장할 정도로 유럽의 대표적인 경차다.
이 차는 내연기관을 쓴 2019년만 해도 1만3000유로, 우리돈 1930만원 정도였는데, 지금은 하이브리드 버전이 1만8700유로(2790만원)로 가격이 많이 뛰었다. 전기차 버전은 우리돈 4500만원이 넘는다.
그렇다고 전기차를 외면하고 내연기관을 고집하자니 각종 배기가스 규제 때문에 어렵고, 또 규제왕국 유럽답게 의무로 설치해야 하는 이런저런 장비가 많아져 가격이 더 오른다.
[이호근 대덕대 자동차학과 교수]
"자동차의 각종 첨단 안전장치나 이런 것들이 의무화되면서 그런 가격이 올라가는 부분들이 체감적으로 비율로 따지면 경차에서는 훨씬 높다."
이런 사정이다보니 유럽 자동차 회사들은 경차 개발 대신 마진이 많이 남는 D세그먼트 이상 중대형 전기 SUV에 집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 덕분에 2011년만해도 신차 점유율 14%에 불과했던 SUV가 지금은 절반에 가까운 49%를 차지하고 있다. 유럽 소비자들 역시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가족들이 함께 탈 수 있는 SUV로 수요가 옮겨갔다고 한다.
반면 일본은 좀 다른데 일본 경차 시장은 아직 별다른 변화의 조짐이 없다. 일본에서 경차 비중은 1993년 이래 단 한 번도 줄어든 적이 없는데 이건 최근도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도 2035년까지 신차를 전부 전기차로만 생산하겠다고 선언하긴 했지만 일본 자동차 회사들의 경차 판매량도 별 변화가 없다. 왜 일본만 이런 걸까.
이건 일본 시장에서 경차의 특수한 지위를 이해해야 한다. 일본에서 경차 수요를 주도하는 계층은 노인과 여성, 그리고 지방 소도시 주민들이다. 인구의 30%가 65세 이상인 고령화 사회 일본에서 수입이 적은 고령층이 구매할 차량이 경차 밖에 없고, 도시에서 떨어져사는 주민도 도시에 비해 수입은 적지만 대중교통 연결성이 떨어져 이동할 일이 많다. 이렇게 의존도 강한 소비자층이 확고하다 보니 수요가 잘 변하지 않는 거다.
코트라 자료를 보면 여전히 세금 혜택도 매력적이고, 차고지 증명이 까다로운 일본에서 주차공간 확보의 문제, 일본의 좁은 주택에 들어선 기계식 주차장 규격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점도 영향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선 전기차 중에도 전기 경차 비중이 46%를 넘을 정도로 매우 높다. 앞서 말한 배터리 용량 부족 등 단점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의 하루 평균주행거리 자체가 매우 짧은 편이라 전기 경차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어서다.
다만 장기적으로 보면 일본 역시 경차 왕국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할 순 없는데 정부 방침대로 전기차를 내놔야 하는 자동차 회사들이 결국 마진이 많이 남는 중대형 차량 쪽으로 신차를 집중 개발하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