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유골’ 1700기 묻힌 장흥 묘역…130년전 학살 ‘동학농민군’ 일까?
동학혁명 최후 ‘석대들 전투’ 희생자들 추정
일본군에 학살…“체계적 연구·보전 필요성”
일렬로 빼곡하게 늘어선 무덤들은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가로 35m, 세로 130m 길이의 묘역은 봉분들이 주저앉아 밭이랑처럼 보였다. 1700기가 넘는 유골이 안장된 이 묘역은 인근의 다른 묘역과는 확연히 달랐다.
묘지 주인을 알 수 있는 비석이 서 있는 봉분은 7기에 불과했다. 14기는 ‘1992년 농공단지 조성과정에서 이장된 무명 분묘’라는 묘비가 서 있었다. 나머지는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지난 7일 찾은 전남 장흥군 장흡읍 장흥공설공원묘지 제4묘역에서는 가을이 내려앉고 있는 석대들판이 내려다보였다. 장흥군과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등 동학관련 단체들은 이 묘역이 130년 전 일본군에 학살된 동학농민군의 집단 무덤으로 판단하고 있다.
묘역 입구에는 2018년 설치한 ‘장흥 동학농민혁명군 묘역’ 이라고 쓰인 표지석과 제단, 동학혁명이 일어났던 ‘1894년’을 기념하는 조형물이 서 있었다. 동학 단체들과 지자체, 지역 주민들이 묘역 주인이 ‘무명 동학농민혁명군’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장흥에서 벌어진 동학혁명 최후 전투와 연관이 있다.
이 묘역의 유골들은 원래 장흥읍 충렬리 공동묘지에 묻혀있었다. 장흥군은 1989년 이곳에 공설운동장을 조성하기 위해 대규모 무연교 분묘들을 발굴해 지금의 공원묘지로 이장했다.
충렬리 묘지는 국가 사적 제498호로 동학 농민군 최후 전투가 벌어졌던 석대들과 인접한 야산이다. 1894년 9월부터 시작된 2차 봉기에 실패한 동학 농민군들은 장흥으로 모여들었다. 석대들은 당시 강진현과 전라병마절도사영, 장흥도호부 길목에 있는 요충지였다.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패해 쫓기던 3만 여명의 농민군들은 1895년 1월 초 장흥으로 모여들었다. 장흥은 동학 대접주가 5명이나 활동했을 정도로 전국에서도 세가 강했다. 석대들에 모인 농민군들은 1월7일부터 토벌에 나선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다.
하지만 기관총 등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농민군들은 무차별 학살당했고 동학혁명도 끝내 좌절됐다. 일본군과 관군은 한 달 가까이 장흥 지역에 머물며 농민군들을 찾아내 학살했다.
2018년 장흥군의 의뢰로 진행된 ‘장흥 동학농민군 학술조사 보고서’를 보면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된 농민군 전사자는 1510명에 달하고 이중 무명 전사자는 1165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히고 있다.
연구자들은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2000∼3000여명의 농민군이 장흥 등지에서 일본군에 의해 학살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장흥군 관산읍과 유치면 등에도 일본군과 농민군의 전투 이후 ‘무연고 공동묘지’가 생겨나기도 했다.
장흥지역에는 그동안 ‘충렬리 무연고 공동묘지’가 동학 토벌군 철수 이후 생겼다는 말이 전해졌다. 당시 조선 관군 지휘관으로 동학 토벌에 앞장섰던 이두황이 남긴 <우선봉 일기>에도 이를 뒷받침 하는 기록이 있다.
1895년 2월24일(음력 1월5일) 일기에는 “너희 읍의 이민들은 감정과 분노를 풀고 은혜를 베풀어 시체를 안장하고 수습하기를 기대한다”고 적혀있다.
고재국 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이사장은 “공설운동장 조성 당시 무연고 묘역에 대해 충분한 검토를 하지 않고 이장한 아쉬움이 크지만 이제라도 동학농민군 집단 묘역에 관한 연구가 진행돼야 한다”면서 “이를 통해 국가가 대규모 동학농민군 묘역을 보존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형대 전남도의원은 최근 전남도·장흥군·동학관련 단체 등이 참여한 가운데 장흥 무명농민군묘역 성역화를 위한 간담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박 의원은 “‘장사 등에 관한 법률’에는 역사적·문화적으로 보존 가치가 있는 묘지는 정부나 지자체에서 ‘보존묘지’로 지정할 수 있다”면서 “무명 동학농민군 묘지를 성역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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