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40위·아시아 7위권 밖… 차상현 감독이 꺼낸 '불편한 진실

"립서비스 할 필요가 없다." 차상현 여자배구 대표팀 감독이 20일 서울 올림픽회관 기자회견장에서 던진 이 한마디는, 오랫동안 한국 배구 팬들이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을 정면으로 건드렸다. 도쿄 올림픽 4강 신화로부터 불과 5년, 한국 여자배구는 세계랭킹 40위·아시아 7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차 감독은 위기를 위기로 부르는 것에서 재건이 시작된다고 봤다. 이 불편한 진단이 팬들에게 충격으로 읽힐지, 아니면 새 출발의 신호탄으로 읽힐지는 앞으로 수개월이 결정한다.

한국 여자배구의 전성기는 2021년 도쿄 올림픽 4강 진출로 정점을 찍었다. 김연경의 압도적인 개인 기량과 양효진의 높이, 그리고 조직력의 결합이 만들어낸 성과였다. 하지만 그 직후부터 내리막이 시작됐다. 두 레전드가 태극마크를 내려놓은 뒤 세대교체는 순탄하게 이뤄지지 않았고, 대표팀은 방향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2024 파리 올림픽 출전권 획득 실패는 상징적인 추락 신호였다. 세계 무대에서의 부재는 젊은 선수들이 국제 경험을 쌓을 기회 자체를 박탈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해에는 국제배구연맹(FIVB)이 주관하는 최상위 리그인 발리볼 네이션스리그(VNL)에서 강등되며 국제배구 주류 무대에서 사실상 퇴출 수순을 밟았다.

도쿄 이후 스테파니 라바리노 감독에 이어 세사르 에르난데스, 페르난도 모랄레스까지 외국인 감독 체제가 이어졌으나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결국 대한배구협회는 2026년 시즌을 앞두고 차상현 감독에게 지휘봉을 맡겼다. 2018년 차해원 감독 이후 8년 만의 국내 감독 체제 복귀다. 이는 단순한 인사 교체가 아니라, 외국인 감독 실험의 사실상 종료 선언으로도 읽힌다.

차 감독은 GS칼텍스에서 오랜 기간 지도자 경험을 쌓은 현장파다. 주장 강소휘와는 GS칼텍스에서 8시즌을 함께한 인연이 있어, 초반 호흡 맞추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 지난달 20일 충북 진천 국가대표선수촌에 선수단을 소집해 고강도 체력훈련을 4주 이상 이어오며 새 시즌 준비에 본격적으로 들어간 상태다.

현재 한국 여자배구의 위치를 수치로 정리하면 충격적이다. FIVB 세계랭킹 40위. 아시아권만 좁혀봐도 일본(5위), 중국(6위), 태국(18위), 베트남(28위), 카자흐스탄(35위), 대만(37위)에 밀려 7번째다. 과거 아시아의 강호로 군림하던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지형도다.

차 감독이 특히 문제로 꺼낸 것은 '20점 이후 득점력'이다. 한 세트에서 승부가 갈리는 결정적 고비, 즉 20점 이후 상황에서 공격 점유율 10%를 넘기는 선수가 현재 14인 엔트리 안에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주전으로 실전 경험을 쌓고 있는 선수도 전체의 3분의 1 수준에 그친다.

이 문제의 구조적 원인은 V리그의 외국인 선수 의존 구조에 있다. 국내 선수들은 리그에서 외국인 에이스의 뒤에 서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 공격의 핵심을 맡아 압박 상황을 돌파하는 훈련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대표팀에 왔을 때 비로소 주도적 역할을 요구받지만, 리그에서 그 경험을 해본 적이 없으니 몸이 따라가지 못한다.

차 감독은 이에 대한 구체적 해법으로 세터 김다인(28·현대건설)을 중심으로 한 전술 다변화를 구상 중이다. 미들블로커 활용에 능한 김다인의 배분력을 바탕으로 측면과 중앙을 고루 쓰는 공격 패턴을 만들어, 특정 선수 의존도를 낮추겠다는 복안이다. 컨디션 조율 중인 아웃사이드 히터 박은서(23·페퍼저축은행), 육서영(25·IBK기업은행)과 리베로 문정원(34·한국도로공사)이 6월 합류하면 전력 윤곽이 더 선명해질 전망이다.

올해 목표는 8월 중국 톈진에서 열리는 2026 아시아여자선수권과 9월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입상이다. 한국이 아시아선수권에서 메달을 딴 것은 2019년 서울 대회가 마지막이고, 아시안게임 메달은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이 마지막이다. 두 대회 모두 이미 7~8년 전의 일이다.

차상현 감독의 발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수위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통상 대표팀 취임 기자회견은 희망과 목표를 전면에 내세우는 자리다. 그런데 차 감독은 반대로 갔다. 먼저 바닥을 짚고, 그 위에서 방향을 제시했다. 이 접근법은 단순한 솔직함을 넘어 하나의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

팬들의 기대치가 현실과 괴리될수록 감독과 선수는 소모적인 여론 압박 속에서 운영된다. 차 감독은 그 기대치를 먼저 조율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셈이다. 동시에 선수들에게는 외부의 날선 시선을 함께 받아들이며 책임감을 공유하자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주장 강소휘의 발언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연경 언니처럼 혼자 팀을 캐리할 수 없다"는 고백은 자기 비하가 아니라, 현실적 역할 분담의 선언이다. 김연경이라는 절대적 에이스가 없는 지금, 팀 배구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냉정한 판단이 담겼다. 강소휘는 GS칼텍스 시절부터 차 감독과 8시즌을 함께한 만큼, 단순한 격려성 발언이 아닌 공동의 청사진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배구 팬 커뮤니티에서도 이번 기자회견은 분위기가 달랐다는 반응이 나온다. "드디어 현실을 말해주는 감독이 왔다", "희망 고문 없이 출발해서 오히려 신뢰가 간다"는 목소리와 함께, "말뿐이면 또 실망"이라는 냉소도 공존한다. 이 두 시선의 간극을 결과로 좁히는 것이 차 감독의 핵심 과제다.

지금 이 기자회견이 주목받는 타이밍도 단순하지 않다. 아시아선수권과 아시안게임이 불과 두세 달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서 출범 회견을 연 것은, 대중과의 소통 채널을 일찍 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파리 올림픽 좌절 이후 침묵하거나 소극적이었던 이전 기조와 달리, 이번엔 먼저 말을 꺼냈다. 그 자체로 팬 심리를 붙잡는 작은 신호가 될 수 있다.

V리그 시스템 개편 필요성을 공개석상에서 언급한 것도 눈길을 끈다. 아시안게임 등 주요 대회가 있는 해에는 외국인 선수 없는 라운드를 신설해 국내 선수들이 주도적으로 경기를 치를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대표팀 운영을 넘어 한국 배구 구조 자체를 향한 문제 제기다. 이 발언이 협회와 구단 측에서 어떻게 수용될지도 앞으로의 관전 포인트다.

차상현 감독이 꺼낸 '불편한 진실'은 이제 팬들에게도 공이 넘어온 셈이다. 세계 40위라는 현실을 도전자의 자세로 받아들이고 응원할 것인가, 아니면 과거 영광의 잣대로만 대표팀을 바라볼 것인가. 한국 여자배구가 다시 설 수 있는 기반은 코트 안팎에서 동시에 만들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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