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베팬알백] ㊲김진욱 감독 시대 결별과 송일수 감독 시대 개막

“오늘 먼저 들어오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인지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직접 만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바로 들어와 주세요.”
2013년 11월 27일 오전. 일본 미야자키에서 마무리캠프 훈련을 지휘하던 김진욱 감독은 서울에서 걸려 온 김승영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두산 선수단은 당초 11월 28일 하루 휴식 후 29일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그러니까 이날은 훈련 마지막 날이었다. 이틀만 지나면 선수단과 함께 한국에 들어가는데 구단 사장의 긴급한 귀국 요청에 김 감독은 영문을 모른 채 짐을 쌌다.
김 감독은 두산 선수단에 “집안에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간다”는 말을 남긴 채 귀국길에 올랐다.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 김 감독은 곧장 약속 장소로 갔다. 잠실야구장 인근 봉은사 맞은편에 있는 인터컨티넨탈 코엑스 호텔 커피숍. 김승영 사장이 미리 와 앉아 있었다.
“그만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김 사장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유가 뭔지….”
“성적 때문에….”
김 감독은 그 자리에서 말없이 눈을 감았다. 김 감독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두산 베어스 제8대 감독으로 3년 계약을 했다. 아직 계약기간이 1년 남은 상황에서 해임 통보를 받은 것이었다.
『프로야구 두산의 김진욱 감독이 경질됐다. 두산은 27일 김진욱 감독을 해임하고 송일수 2군 감독을 신임 사령탑으로 선임했다고 밝혔다. 김진욱 감독은 2012년 두산 사령탑으로 선임됐으나 계약기간 3년을 채우지 못하고 중도하차했다.』 <뉴시스 2013년 11월 27일자>
[베팬알백_베어스 팬이라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시즌2-두산 베어스 시대’ 37번째 이야기는 두산 베어스 제8대 사령탑 김진욱 감독 결별 과정과 제9대 사령탑 송일수 감독 시대 이야기다.

◆ 3승1패 후 3연패 준우승이 결정타
“호텔에서 이야기가 끝나고 바깥으로 나왔는데 그날따라 찬바람이 쌩쌩 불더라고요. 그 찬바람이 가슴에 맺히던 그 느낌은 지금도 안 지워지네요.”
지금은 야인이 된 김진욱 전 감독은 11년 전 그날의 스산했던 초겨울 바람을 여전히 잊지 못한다. 만나면 헤어지는 게 인생사. 그러나 예상보다 일찍 찾아온 이별 통보였다.
김진욱 감독은 두산 사령탑 데뷔 후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2012년에는 가을야구 첫판인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지만, 2년째인 2013년에는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해 준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올라 넥센에 2연패 후 3연승의 드라마를 썼고, 플레이오프에서는 잠실 라이벌 LG를 꺾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 정규시즌 1위 삼성을 상대로 3승1패 우위를 점하고도 내리 3연패를 당하면서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3승1패에서 우승하지 못한 최초의 사례였다.
두산 구단과 그룹에서는 이 부분에서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김 감독에 대해 승부처에서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승부사 기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5차전에 대해 여러 말이 나왔다. 4-1로 뒤지다 4-4 동점까지 만들어 흐름을 가져왔을 때 가장 강한 투수를 투입해 수세에 몰린 사자의 숨통을 끊었어야 했다는 지적이 주를 이뤘다. 결과적이지만 6차전과 7차전에 대비해 더스틴 니퍼트와 유희관의 투입을 아끼면서 지나치게 신중한 승부를 펼치다 상대에게 반격의 기회를 제공한 부분이 치명적이었다.
결국 김진욱 감독은 KBO 역사상 한국시리즈 준우승 후 교체된 역대 7번째 감독으로 이름을 올렸다. 종전에는 1983년 MBC 김동엽 감독, 1986년 삼성 김영덕 감독, 1990년 삼성 정동진 감독, 2002년 LG 김성근 감독, 2004년 삼성 김응용 감독, 2010년 삼성 선동열 감독이 한국시리즈 준우승 직후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바 있다. 이들 중 김응용 감독은 구단 사장으로 영전한 사례였지만, 나머지는 구단의 신임을 받지 못한 케이스였다.
“한국시리즈 3승1패 후에 우승을 하지 못한 건 저로서도 많이 아픈 부분이었습니다. 당시 말 못할 내부 사정들도 있었지만 다 말씀드리기는 어렵고…. 어쨌든 외부 평가는 제가 받아들이는 게 맞는 거죠. 베어스 구단에서 선수, 코치, 1군 감독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행복한 인연이었습니다. 다만 2군 감독이 꿈이었는데 그 꿈을 이루지는 못한 게 좀 아쉽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지금이라도 2군 감독은 꼭 해보고 싶은데 말이죠. 허허.”
김진욱 전 감독은 베어스 구단과 이어온 깊은 인연을 반추하며 옅은 웃음을 흘렸다.

◆ 김진욱 감독이 남긴 것들
김진욱 감독은 온화하면서도 합리적인 성품의 소유자였다. 2군 코치 시절부터 선수들과 소통하는 지도자였다. 아울러 해박한 야구 지식을 갖춘 뛰어난 이론가로 평가받았다. 이런 점이 부각되면서 제8대 사령탑에 올랐다. 하지만 ‘우승’이라는 ‘화룡점정(畵龍點睛)’에 성공하지 못하면서 베어스와 오랜 인연을 마감했다.
김진욱은 1984년 데뷔해 1992년까지 9년간 OB 베어스에서 강속구 사이드암 투수로 활약했다. 1993년 쌍방울로 이적하기 전까지 베어스에서만 통산 53승71패16세이브, 평균자책점 3.62를 기록했다. 고질적인 허리 통증으로 기대만큼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1980년대 ‘해태 킬러’와 ‘선동열 킬러’로 명성을 얻었다.
통산 34차례 완투를 기록했다. 53승 중 완투승만 32승이었고, 완봉승도 12차례나 달성했다. 1980년대 후반 암흑기에 팀 내에서 유일하게 2년 연속(1988~1989년) 10승을 거두며 에이스의 자존심을 지켰다.
베어스 감독으로서도 2년 동안 정규시즌 261경기를 지휘하며 139승6무116패로 높은 승률(0.545)을 올렸다. 최종순위는 2013년 3위, 2014년 2위. 역대 베어스 감독 중 재임 기간 모든 해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인물은 김진욱 감독이 유일하다.

당연히 공과가 있지만, 당시 백업 요원에 머물던 김재호를 비롯해 야수들의 멀티 포지션 소화를 이끌어 낸 점과 선발투수진의 안정화를 꾀했다는 점은 김진욱 감독 시대의 공이라고 볼 수 있다.
2년 연속 10승을 올리며 알에서 깨어난 노경은도 수확이었지만, 최고의 발견은 ‘느림의 미학’ 유희관이었다. 2009년 대졸(중앙대) 신인으로 들어온 뒤 느린 구속 때문에 2군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던 유희관을 군복무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2013년 1군 개막 엔트리에 발탁했다. 또한 더스틴 니퍼트의 부상 때 과감하게 선발로 기용하면서 향후 100승 투수로 가는 길을 열어줬다. 유희관이 2010년대 베어스 토종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으로 고정되면서 훗날 두산 왕조의 밑바탕이 됐다.
2013년 당시 해임 통보를 받은 뒤 전화기를 꺼놨던 김 감독은 며칠 후 담당 기자들에게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로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두산 베어스 감독으로 지낸 2년의 시간 동안 희로애락이 많았지만 제가 사랑하고 좋아했던 사람들이 많았기에 많이 행복했습니다. 주어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 아쉽지만 모두가 저의 부족함으로 겸허히 받아들이고 재충전하겠습니다. 저와 함께했던 우리 선수들, 늘 그라운드 안에서 밝게 최선을 다해 뛰어줘서 고맙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번 한국시리즈까지 불굴의 투혼으로 두산 베어스의 야구를 보여주고 모두가 일심동체로 하나가 되어 투혼을 펼친 우리 선수들의 모습은 제 심장이 멈추는 날까지 제 가슴속에 담아두겠습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었을 때 엄청난 힘이 된다는 것을 우리 선수들도 잊지 않고 내년에도 선전을 기원합니다. 저와 함께 사명감과 열정을 갖고 지도해주신 우리 코칭스태프들 정말 고맙고 미안합니다. 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음지에서 묵묵히 정말 열심히 선수들 뒷바라지에 힘써주신 현장 직원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두산 베어스 팬 여러분들의 열정적인 성원은 우리 선수들이 불굴의 투혼을 발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끊임없는 응원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 “김태형은 아직 어리잖아”…송일수 감독 선임
두산은 마무리캠프 기간에 김진욱 감독을 교체하기로 내부 방침을 정하고 후임 감독 후보군까지 빠르게 추려 나갔다. 그중 2012년부터 SK 와이번스에서 배터리 코치를 맡고 있는 김태형도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됐다.
김태형 코치는 2011년 말 김진욱 감독이 선임될 때도 내부 코치진 중에서 감독 후보로 입에 올랐던 인물. 김승영 전 사장의 말에 의하면 당시 김태형 코치 이름이 잠시 나왔지만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최종 후보에는 올라가지 못했다. 1967년생인 김태형 코치의 당시 나이가 44세였다. 김태형은 결국 SK의 코치 영입 제안을 받고 선수 시절부터 입어 온 베어스 유니폼을 벗고 처음으로 타 팀으로 이적했다.
그런데 김진욱 감독 후임으로 김태형 SK 코치가 또 언급됐다. 이번엔 그룹에서 “아직 나이가 어리잖아”라며 후보에서 제외했다.
그러면서 결국 재일교포 송일수 2군 감독이 두산 베어스 제9대 감독으로 발탁되기에 이르렀다.

◆ 제9대 사령탑 재일교포 송일수 파격 선임
두산이 김진욱 감독 후임으로 송일수 2군 감독을 신임 사령탑으로 선임했다고 발표하자 다들 놀랐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깜짝 카드였기 때문이다.
물론 재일교포 출신이 KBO리그 감독이 된 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1982년 베어스 초대 감독으로 원년 우승을 이끈 김영덕 감독과 베어스 제2대 감독을 지낸 김성근 감독도 재일교포 출신. 여기에 1993년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을 맡은 신용균도 재일교포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들 3명은 모두 1960년대 한국에 들어와 실업야구에서 선수를 한 뒤 줄곧 한국에 머물며 오랜 세월 선수와 지도자 생활을 해왔다. 그런 면에서 송일수 감독은 이들과는 다소 결이 다른 케이스였다.
송일수는 1950년생으로 교토 출신의 재일교포 야구인. 헤이안 고교 졸업 후 1969년 긴테쓰 버펄로스(오릭스의 전신)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해 1983년까지 일본프로야구에서 수비형 포수로 활약했다.
일본프로야구에서 은퇴한 그는 1984년 KBO리그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재일교포 투수 김일융의 전담 포수로서 삼성 안방을 맡았다. 이만수가 주전 포수였고, 송일수는 백업 포수였다. 김일융이 1984년 16승, 1985년 25승, 1986년 13승을 거두는 등 3년간 54승을 올린 뒤 일본프로야구로 돌아가자 송일수는 곧바로 포수 마스크를 벗었다.

송일수는 그 이후 일본프로야구 구단에서 코치와 스카우트 등으로 활동하면서 국내 야구계와도 꾸준히 관계를 이어왔다. 특히 두산이 일본 미야자키로 마무리 캠프나 스프링캠프를 갈 때면 도움도 많이 받았다.
그러다 2013년 두산 2군 감독이 되면서 처음으로 한국야구계에서 지도자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두산은 송 감독을 새로운 사령탑으로 선임하면서 “원칙과 기본기를 중시하면서도 경기 중 상황 대처 능력이 뛰어나 창의적으로 공격적인 야구를 구사한다”고 설명했다. 야구 이론에 밝을 뿐만 아니라 오랜 스카우트 경험을 통해 선수 보는 눈도 탁월하다는 평가였다. 2군 감독 시절 어린 선수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서는 등 리더십도 발휘해 높은 점수를 얻었다.
송 감독은 “(1군 감독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하고 있던 터라 놀랐다”면서 “팬들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멋지게 이기는 야구를 보여드리는 것인 만큼 내가 가진 모든 열정과 능력을 남김없이 쏟아 붓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송일수 감독의 당시 나이는 63세였다. 프로야구 ‘역대 최고령 초보 감독’이 되는 새 역사를 썼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프로 1군 감독 경험이 전무했다. 그야말로 파격적이자 전격적인 발탁이었다.

◆ FA와 2차드래프트 이적…급격한 세대교체와 전력 변화
[베팬알백] 35편에서 소개했듯이 홍성흔은 2013년 포스트시즌 첫 관문인 준플레이오프를 앞두고 미디어데이에서 “우리에겐 생계가 걸린 한판"이라는 각오를 밝힌 한 바 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 얘기지만 실제 가을야구가 끝난 뒤 이말은 그대로 실현됐다.
두산에겐 포스트시즌이 생계가 걸린 한판이 된 셈이다. 감독 교체뿐만 아니라 대대적인 선수단 개편이 이뤄졌다. 한국시리즈 준우승의 쓰라린 아픔 속에 많은 이들이 팀을 떠나거나 유니폼을 벗었다. 자의 반 타의 반 세대교체가 진행됐다.
우선 프리에이전트(FA) 시장에서 주전 3명이 빠져나갔다. 외야수 이종욱과 유격수 손시헌이 스승 김경문 감독이 둥지를 튼 NC로 이적했고, 중심 거포 최준석은 다시 고향 팀 롯데 유니폼을 입었다.
여기에 2차 드래프트에서도 주력 선수들이 대거 유출됐다. 1라운드에서만 3명이 지명됐다. 외야수 임재철은 LG, 투수 김태영(개명 전 김상현)과 이혜천은 각각 KIA와 NC의 지명을 받았다. 투수 서동환은 2라운드에서 삼성에 호명됐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잦은 부상 속에 부진한 성적을 올린 베테랑 김선우도 방출됐다. 두산은 은퇴 후 지도자 연수를 제안했지만 김선우는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는 의지가 강했다. 결국 양측의 합의로 방출을 선택했고, 김선우는 옆집 LG로 이적했다.
메이저리그를 거쳐 2008년 두산에 입단한 김선우는 6시즌 동안 151경기에 출장해 57승47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4.27을 기록했다. 2011년 16승7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13으로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지만, 두산에서의 마지막 해인 2013년에는 5승6패, 평균자책점 5.52에 그쳤다.
게다가 11월 26일에는 내야수 윤석민과 넥센 외야수 장민석(개명전 장기영)을 1대1 트레이드했다. 윤석민은 2004년 입단 후 줄곧 ‘포스트 김동주’라는 평가 속에 유망주에 머물다 두산을 떠나게 됐다.
두산은 ‘화수분 야구’를 통해 마르지 않는 샘물을 만들어 온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팀.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그동안 백업과 2군 팜에 머물던 유망주들이 다시 새로운 중심 세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종욱이 떠난 주전 중견수에는 정수빈이 들어가고, 2013년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인 민병헌이 주전 외야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1루수 최준석 자리에는 오재일과 외국인타자가 대안으로 등장했다.

2004년 1차지명을 받고 입단한 김재호는 ‘신고선수(현 육성선수) 신화’를 쓴 손시헌으로 인해 오랜 기간 백업 유격수와 2루수를 오가며 힘든 시간을 보낸 만년 유망주. 손시헌이 자리를 비우면서 비로소 김재호가 확고한 주전 유격수 자리를 꿰찼다.
2013년 두산은 9개 구단 중 투수력(팀 평균자책점 4.57 7위)이 부족했을 뿐 공격력(팀타율 0.289 1위)은 리그 최상위권이었다.
2014년에도 투수력은 여전히 물음표이긴 했다. 그러나 선발 투수진에 대한 기대는 컸다. 2년 연속 10승을 올린 노경은과 2013년 10승을 거두며 혜성처럼 나타난 유희관은 김진욱 감독 시절 발굴한 토종 선발투수들. 여기에 3년 연속(2011~13년) 10승 이상을 기록한 외국인투수 니퍼트(203㎝), 니퍼트보다 더 장신인 새 외국인 투수 크리스 볼스테드(207㎝)까지 새로 영입해 기대감을 높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외국인 타자. 2014년에는 외국인 선수 제도도 구단당 3명(신생팀 NC는 4명) 보유로 확대했다. 다만 동일 포지션 전원 등록 불가 규정을 도입했다. 두산은 이에 따라 새 외국인 타자로 메이저리그 출신 호르헤 칸투와 계약하면서 공격력을 극대화할 꿈에 부풀었다.

◆ 타선 폭발! ‘송일수호’의 시즌 초반 돌풍
준우승 감독을 경질한 이상 새 감독에게 기대하는 것은 당연히 우승이었다. 실제로 2014년 시범경기에서 두산은 4승5무2패(승률 0.667)로 1위에 올라 기대감을 키웠다. 두산이 시범경기에서 1위에 오른 건 양대리그로 치러진 2000년 드림리그 1위 이후 14년 만이었다.
'개막전의 팀'답게 3월 29일 시즌 개막전에서도 잠실 라이벌 LG를 5-4로 꺾고 산뜻한 출발을 했다. 무엇보다 새 외국인 타자 호르헤 칸투가 1-3으로 뒤진 3회말 역전 결승 3점홈런을 날린 것이 기분 좋은 포인트였다. 칸투는 KBO리그 데뷔전부터 메이저리그 통산 104홈런을 기록한 타자다운 호쾌한 장타력을 선보이면서 두산뿐만 아니라 국내 야구팬들을 흥분시켰다.

그러나 두산은 개막전 승리 이후 2연패, 1승 후 다시 3연패를 당하면서 첫 7경기에서 2승5패로 불안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 이후 조금씩 안정을 찾더니 5월 10일부터 잠실 삼성전부터 17일 잠실 NC전까지 7연승을 올리며 반등에 성공했다.
특히 5월 10일부터 30일 롯데전까지 15경기 연속 두 자릿수 안타로 KBO 신기록 작성했다. 종전 연속 경기 두 자릿수 안타 기록은 12경기였는데, 이 역시 ‘우동수 트리오’ 시절이던 2000년 두산이 보유하고 있었다.
그만큼 2014년 초반 두산 타선의 파괴력은 가공할 만했다. 5월 30일까지 팀타율이 무려 0.314로 압도적 1위였다. 이날까지 주전 라인업 중 오재원(0.382), 민병헌(0.380), 홍성흔(0.347), 김현수(0.322), 김재호(0.318), 칸투(0.310), 양의지(0.307) 등 7명이 3할대 타율을 기록 중이었다. 정수빈(0.296)과 허경민(0.263)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두산은 이날까지 시즌 28승19패(승률 0.596)를 기록하며 3위를 달렸다. 1위 삼성에도 3.5게임차여 언제든 선두 싸움에 치고 들어갈 수 있는 범위에 있었다.

◆ 용두사미로 끝난 2014시즌
하지만 기쁨도 잠시. 두산은 5월 31일 잠실 롯데전에서 1-23 대패의 수모를 당했다. 롯데에게 헌납한 29안타는 역대 1경기 최다 피안타 신기록. 22점차 역시 역대 최다 점수차 타이기록(1997년 5월 4일 대구 삼성 27-5 LG)이었다. 다음날(6월 1일)에도 롯데에 5-14로 대패했다. 그러면서 6월 7일 목동 넥센전까지 시즌 첫 6연패를 당했다.
불운까지 겹쳤다. 6월 21일과 22일 잠실 KIA에서는 경기 도중 쏟아진 빗줄기로 사상 최초 2경기 연속 강우 콜드게임 패배를 당했다. 22일에는 2-4(5회)로, 23일에는 0-1(6회초)로 졌다.
불타오르던 방망이도 6월부터 식었다. 월간 팀타율이 0.267로 최하위를 찍자 문제점으로 지적돼 온 마운드가 버티지 못했다. 6월 팀평균자책점은 7.06. 결국 6월에 5승15패, 7월에 6승10패를 기록하면서 추락했고, 시즌이 종료될 때까지 한 번도 월간 승률 5할 이상을 올리지 못했다.

시즌 막판까지 가을야구 진출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9월 15일부터 30일까지 인천아시안게임으로 16일간 휴식기에 들어간 뒤 10월 1일부터 리그가 재개됐다. 두산은 그때까지 113경기에서 52승1무60패(승률 0.464)로 6위에 머물고 있었지만 4위 LG(56승2무60패)와는 2게임차에 불과했다. 당시엔 4위까지 포스트시즌 티켓이 주어졌다.
하지만 10월 2일 광주 KIA전부터 5일 마산 NC전까지 내리 4연패. 순위도 7위로 주저앉았다. 사실상 가을야구에서 멀어졌다. 10경기를 남겨둔 시점에서 4게임차로 벌어진 4위 LG를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마무리도 깔끔하지 못했다. 10월 11일 잠실 라이벌 LG에 무기력하게 2-15로 대패하면서 팬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선발투수 유네스키 마야가 4회초 LG의 희생번트를 놓고 상대 사령탑인 양상문 감독과 신경전을 벌이면서 양 팀의 벤치클리어링까지 벌어진 그 경기였다. 16일 잠실 SK전에서는 5-0으로 앞서다 5-7로 역전패했다. 중심타자 홍성흔과 김현수를 조기에 교체하면서 역전패를 자초했다.
시즌 마지막 경기인 10월 17일 잠실 NC전에서 연장 12회말에 터진 김진형의 끝내기 안타로 2-1 승리를 거뒀지만 버스가 떠난 뒤에 손 흔드는 격이었다. 시즌 최종 성적은 59승1무68패(승률 0.465)로 6위였다.

◆ 비극으로 끝난 송일수 감독 시대…1년 만에 결별
송일수 감독을 새 사령탑을 선임한 것은 우승에 대한 갈증이 컸기 때문이었다. 2001년 김인식 감독 시절 우승한 뒤 4차례(2005, 07, 08, 13)나 한국시리즈에 올랐지만 모두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두산으로선 세밀한 전략과 전술, 승부사적 기질로 우승을 이끌어달라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송 감독은 무사나 1사에 주자가 있으면 기계적인 희생번트를 대거나 히트앤드런 등 과도한 작전으로 경기에 개입하려고 했다. 당시 두산 타선이 시즌 초반부터 팀타율 1위를 달릴 정도로 폭발적인 화력을 자랑하고, 리그 전체가 극심한 ‘타고투저’로 진행되는 상황에서 1점을 짜내는 작전으로는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마운드 사정도 나아지지 않았다. 2014년 팀평균자책점은 5.43으로 6위에 그쳤다. 앞서 2년 연속 10승을 거뒀던 노경은은 3승15패(평균자책점 9.03)로 그해 최다패 투수가 됐다. 대량 득점 대신 스몰볼로 자주 1점차 승부를 펼치다 보니 불펜의 힘도 불가피하게 약해졌다.
특히 외국인 투수 볼스테드의 부진이 아쉬웠다. 시즌 첫 등판(4월 2일 목동 넥센전)에서 6.1이닝 4실점(3자책점)으로 승리투수가 될 때만 해도 기대가 컸다. 그러나 그것이 4월의 마지막 승리였다. 5월에 3연승으로 반등하는가 했으나 이후 5연패에 빠지면서 결국 7월에 퇴출의 칼날을 맞았다.
외국인 타자 칸투도 승부처에서 제 몫을 하지 못했다. 전반기에만 18홈런을 때리며 선전했으나 후반기에는 부상과 부진으로 홈런이 0개에 그쳤다.
가장 큰 문제는 감독과 선수단 사이의 소통. 송 감독은 재일교포로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 알아듣기는 해도 한국말이 서툴다 보니 선수, 코치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지 못했고 리더십에서도 타격을 입었다.

통역과 관련한 해프닝도 많았다. 일례로 7월에 볼스테드 대체 외국인 투수로 영입한 유네스키 마야는 쿠바 출신인데 영어를 하지 못하고 스페인어만 구사했다. 그러다 보니 마야가 마운드에 오를 때면 몇 단계의 통역을 거쳐야만 했다.
이를테면 송일수 감독이 일본어로 이야기하면 감독을 보좌하는 일본어 통역이 한국말로 권명철 투수코치에게 전해줬다. 결국 권 코치가 영어가 가능한 통역을 대동하고 마운드에 오르면 영어와 스페인어를 동시에 할 줄 아는 내야수 칸투가 마운드로 가서 가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통역을 위해 마운드에 4~5명이 모여 있는 광경이 흔해졌다.
그런데 마야가 뭔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자 하면 다시 역순으로 통역이 진행돼야만 했다. 칸투가 중간에서 듣고 통역에게 영어로 이야기하고, 통역이 다시 한국말로 권 코치에게 설명했다. 만약 덕아웃에 있는 송 감독이 이들의 대화 내용을 궁금해하면 권 코치가 또 덕아웃에 돌아가 일본어 통역을 통해 감독에게 설명을 해줘야 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결국 두산은 송 감독과 2년의 계약기간이 남아 있었지만 빠르게 실패를 인정하고 1년 만에 또다시 사령탑을 경질하기에 이르렀다.
두산 구단에서 송 감독에 대한 거취를 고려하기 시작한 것은 아시안게임 브레이크 직후였다. 리그 재개 후 4연패에 빠지며 4위와 격차가 더욱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10월 11일 LG전 대패, 16일 SK전 역전패는 교체를 결심하는 결정타였다.
오히려 송일수 감독 카드가 실패로 끝난 것이 결과적으로 전화위복이 됐는지 모른다. 두산 베어스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여는 감독을 영입했기 때문이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OBS라디오 프로야구 해설위원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