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깅노트] 8조원 잃고도 웃는 SK하이닉스의 역설

기업의 8조원 손실 공시를 보고 놀라지 않을 투자자는 없다. 더구나 올해 들어 주가가 나날이 최고가를 경신하며 파죽지세인 SK하이닉스라면 더더욱 그렇다. 최근 SK하이닉스는 지난해 8조3660억원의 파생상품 관련 손실이 발생했다고 공시했다. 파생상품 관련 손실이란 주식 등 기초자산의 가격 변화에 따라 미리 맺은 계약(파생상품)의 가치가 변하면서 발생하는 ‘회계상 손실’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보면 이미 계약을 청산하거나 만기 정산 과정에서 실제 손익이 확정된 ‘거래손실’ 4조2027억원과 아직 계약이 종료되지 않았지만 결산 시점의 시장 가격을 기준으로 다시 계산해 장부에 반영한 ‘평가손실’ 4조1633억원이다. 도대체 승승장구하는 기업이 왜 8조원을 잃었다는 것일까. 현상을 이해하려면 먼저 하이닉스가 3년 전 투자자들과 맺었던 ‘특별한 약속’을 들여다봐야 한다.

앞서 지난 2023년 4월 반도체 업황은 바닥을 기었고 하이닉스의 곳간은 비어갔다. 막대한 투자로 현금이 절실했던 SK하이닉스는 투자자들에게 돈을 빌리면서 한가지 약속을 했다. 투자자에게 돈을 빌리는 대신 나중에 원하면 그 돈 대신 회사가 보유한 자기주식을 주당 11만1180원에 가져갈 수 있는 권리를 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번 사태의 시발점이 된 교환사채(EB)다. 당시 SK하이닉스의 주가가 8만원 중후반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약 30%에 달하는 프리미엄을 붙인 가격이었다.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당장 현금이 부족해 자기주식까지 활용해 무리하게 자금을 조달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확산했다. 교환사채 발행 며칠 전에는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가 SK하이닉스의 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하며 재무 건전성에 경고음을 울린 상태였다. 당시 시가보다 30% 가량 높은 교환가 역시 경영진의 자신감이라기보다는 자금 확보를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해석됐다. 실제로 EB 발행 공시 다음 날 주가는 3% 넘게 하락했다.

반전은 지난해 일어났다. 2023년 EB 발행 당시 8만원대였던 주가는 인공지능(AI) 시대 개화와 함께 폭등하며, 작년 마지막 거래일 기준 65만1000원까지 치솟았다. 발행 시가 대비 약 7.5배, 투자자들과 약속한 교환가(11만 원) 대비로도 약 6배로 돌아온 것이다.

투자자들이 약속대로 11만원에 주식을 바꿔가자 회사 입장에서는 시장에서 65만원에 팔 수 있는 주식을 11만원에 내어준 셈이 됐다. 8조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 고스란히 ‘회계상 손실’로 잡힌 배경이다. 물론 이는 실제 현금이 빠져나가는 손실이 아니며 미리 확보해둔 자기주식을 활용하기 때문에 자본 항목 내에서 처분이익으로 상쇄되어 실제 재무 건전성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이 ‘행복한 손실’은 당분간 규모를 더 키울 전망이다. SK하이닉스 주가는 최근 100만원을 돌파하며 황제주 반열에 등극했다. 지난해 말 종가(65만원)를 기준으로 산정된 4조1633억원의 평가손실은 100만원이라는 현재 주가를 대입하는 순간 그 규모가 수조원대 이상 추가로 불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가가 오를수록 회계장부에는 더 큰 손실을 적어야 하는 이 역설적인 상황은 올해 실적 발표에서도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 최근 맥쿼리 증권은 보고서를 통해 SK하이닉스의 목표주가를 170만원으로 상향하며 “메모리 공급 부족이 더 심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하이닉스 입장에선 8조원이라는 수업료가 쓰라릴 법도 하다. 하지만 11만원의 확신이 100만원의 현실이 된 지금 이 손실은 패배의 기록이 아니라 HBM 시대를 제패했다는 가장 화려한 영수증으로 남을 것이다. 8조원을 잃고도 웃을 수 있는 기업,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곳은 하이닉스가 유일해 보인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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