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은 물파초를 만나러 가는 길
일본 오제국립공원
장마를 앞 둔 6월 초, 강렬한 태양 대신 구름이 가득한 오제尾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웠다. 2000m급 고봉이 둘러싼 거대한 습원은 습기를 머금어 투명하기만 하다. 수많은 이들이 밟고 지나간 목로를 따라 습원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면 오제는 숨겨뒀던 비경을 하나씩 꺼내 놓는다.
봄의 오제는 습원 가득 물파초가 가득하다. 수면 위로 빼꼼히 머리를 내민 새하얀 물파초는 연둣빛 꽃이삭을 소중하게 보호하고 있다. 수줍은 물파초가 그득한 습원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면 마음은 황홀과 몽환, 그 어디쯤에서 맴돈다.
오제는 일본 후쿠시마현과 군마현, 니가타현, 토치기현을 아우르는 규모 372㎢의 국립공원으로 일본 100대 명산에 속하는 동북부 최고봉 히우치가타케燧ケ岳(2356m) 산과 시부츠至仏山(2228m) 산 등이 둘러싼 고층 습원이다. 어마어마한 습원은 도쿄돔 170개를 합쳐 놓은 규모로 일 년에 약 6개월(4월 말~11월 초)만 제 모습을 공개하니 쉽사리 그 비경을 드러내지 않는다.
신비로운 오제 습원으로 향하는 길은 쉽지 않다. 험한 히우치가타케 산을 중심으로 둘레길을 형성하고 있는 오제국립공원의 들머리는 누마야마토게, 하토마치토게, 미이케타시로로 트레커들은 누마야마토게와 하토마치토게를 가장 많이 찾는다. 8년 전에는 후쿠시마현의 누마야마토게에서 트레킹을 시작했으니 이번에는 군마현의 하토마치 고개를 들머리로 삼았다. 도쿄에서 누마야마토게까지는 차로 약 5시간, 하토마치토게는 4시간 정도가 소요되니 이동에 1시간가량 절약되는 점도 주효했다.
일본의 경승지는 개인 차량으로 이동이 불가한 곳들이 많다. 오제국립공원도 마찬가지. 군마현 도쿠라까지는 개인 차량으로 이동할 수 있지만, 이곳부터 하토마케토게까지는 전용 버스를 타고 30분 더 들어가야 한다. 신비로운 물파초가 만발하는 봄의 오제는 일본 전국 각지에서 찾아온 트레커들로 북적거렸다. 부산함도 잠시, 버스가 하토마치 고개에 닿자 오제의 풍경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픈 트레커들은 채비를 마치고 습원을 향해 발길을 서둘
하토마치 고개를 출발해 야마노하라까지는 숲길이 이어졌다. 습한 숲길은 이내 오제의 트레이드 마크인 목로로 바뀐다. 1시간가량 내리막을 통과하면 오제의 비지터센터가 자리한 야마노하라. 이곳에서 본격적인 습원 여행이 시작되는데, 8년 만에 다시 만난 오제라니, 감격스러운 마음에 웃음이 절로 난다.
여름의 오제와 봄의 오제는 다르다. 초록이 무성하고 야생화가 만발한 여름의 오제가 화려함이라면 이제 막 움튼 새싹과 새하얀 물파초가 어우러진 봄의 오제는 순수하고 청초하다. 여름만큼의 강렬한 맛은 없지만 수수한 오제의 맨얼굴을 마주하는 일은 은은한 감동이다.
이제 길은 습원을 가르는 목도다. 오제에는 총 65km에 달하는 목도가 퍼져있다. 가는 이와 오는 이를 위한 단 두 개의 평행한 목도 위에서 트레커들은 추월할 수도 멈출 수도 없다. 끝없이 이어지는 습원 너머 거대한 산군이 줄달음친다. 일본 동북부 최고봉 히우치가타케 산을 비롯해 시부츠 산, 다이교 산, 시라오야마 산, 핫캇이산 등 2000m를 넘나드는 산군의 파노라마. 그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바쁨도, 재촉도 말고 오롯이 자연을 느끼라는 오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거대한 습원은 규모를 달리하며 변주한다. 거대한 습원과 작은 연못인 치토우가 번갈아 인사를 전하고, 수면 위 물파초가 수시로 얼굴을 마주한다. 오제 습원에는 치토우가 1800여 개에 달한다. 약 5만 년 전, 화산 폭발로 히우치가타케 산이 솟아났고, 이때 흘러나온 토사가 쌓여 1만 년 전 사방이 막힌 분지가 형성됐다. 오제를 관통하던 골짜기가 막히자 겨우내 쌓인 눈은 갈 곳을 잃고 그 자리에 온전히 남아 거대한 습원을 형성했다. 오제의 풍부한 물은 외부가 아닌 제 위에 쌓인 눈과 비의 산물이다.
오제의 신비를 만끽하며 걸은 지 4시간. 길은 이제 첫날의 목적지 미하라시에 닿았다. 미하라시는 서쪽의 오제가하라 습원과 동쪽의 누마지리가와강~오제누마 호수 구역을 나누는 언덕에 자리한다. 산장들이 여럿 모여 있어 오제에서 하루를 묵는 이들이 많이 찾는 곳. 멋들어진 통나무로 지어진 산장에서의 하루는 오제의 멋진 노을과 고요한 밤을 즐기기에 그만이다. 당일 여행객들도 많지만 가능한 1박 이상을 권유하는 이유다. 그래서일까. 오제의 산장은 늘 만원이다. 오제로 오는 길이 쉽지 않고, 숙박도 일반 숙박 사이트에서 예약하기 힘들다 보니 한국 여행자들은 여행사 패키지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8년 전, 오제의 저녁은 환상 그 자체였다. 날씨가 내내 화창해 에디터 인생 최고의 노을을 습원에서 경험했다. 그러나 오제는 그 모습을 두 번 보여주지 않았다.
밤이 되자 고원의 오제는 겨울처럼 얼어붙었다. 1000m를 훌쩍 넘는 고원의 땅은 6월 초임에도 불구하고 초겨울 날씨다. 다운을 꺼내 입고 산장을 나와 목로를 따라 걸었다. 불빛 하나 없는 오지의 땅. 숨 막힐 듯 고요함이 내려앉은 습원에서 진정한 평온을 경험한다. 다음에 만나는 오제는 가을이 되기를, 이 여행이 인생의 작은 쉼표가 되기를 바라본다.
오제국립공원은 후쿠시마현, 니가타현, 군마현, 토치기현 4개의 현으로 이루어진 규모 372㎢의 고층습원으로 1960년 특별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후 닛코국립공원에 속해 있다가 2007년에 독립해 일본의 29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공원에는 약 65km의 목도가 조성돼 있으며, 습지 보호를 위해 목도 외에는 통행할 수 없다. 습원은 1700~2300m 급 봉우리가 둘러싼 분지로 물파초, 각시원추리, 참나리, 엉겅퀴, 앉은부채 등 다양한 산나물과 야생화가 철마다 피어나 다양한 식생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다. 오제국립공원은 히우치가타케 산을 중심으로 둘레길이 형성돼 있으며, 미이케타시로와 누마야마토게, 하토마치토게 들머리가 대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