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일본 전투기 개발 위기, "영국 차세대 전투기 기술공유 회피"

지난 4월 14일 이탈리아 국방장관 귀도 크로세토(Guido Crosetto)장관은 영국의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이기주의는 국가의 최악의 적이다"라고 발언했습니다.

이 한마디는 현재 영국, 이탈리아, 일본이 공동으로 추진 중인 차세대 전투기 개발 프로젝트(GCAP)의 현 상황을 날카롭게 꿰뚫고 있습니다.

2035년 완성을 목표로 하는 이 야심찬 프로젝트는 최첨단 기술의 결정체가 될 예정이지만, 기술 공유를 둘러싼 갈등의 조짐이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구이도 크로세토 국방장관이 4월 14일 로마에서 로이터 통신과 인터뷰하고 있다.(출처:로이터통신)

이어서 그는 "이탈리아와 일본은 거의 완전히 기술 장벽을 허물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이를 꺼리고 있습니다." 이 발언은 표면적으로는 협력을 강조하는 3국 공동 프로젝트의 내부 긴장을 드러내는 단서로 보입니다.

영국의 딜레마, 공유할 것인가? 보호할 것인가?


GCAP 프로젝트는 단순한 전투기 개발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국가 안보, 산업 주권, 그리고 글로벌 군사 질서의 미래가 걸린 거대한 전략 게임입니다.

영국 국방부는 크로세토의 비판에 대해 "우리가 함께 개발하고 있는 기술과 구축하고 있는 능력은 과학과 엔지니어링의 최첨단에 있다"며 방어적 입장을 취했지만, 왜 특정 기술을 공유하지 않는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은 피했습니다.

핵심 전투기 기술은 단순한 산업 자산이 아닌 국가 안보의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변수의 등장 '사우디아라비아'


이 3국 공조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습니다.

바로 사우디아라비아의 GCAP 참여 가능성입니다.

이탈리아 총리 조르자 멜로니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참여를 공개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우리는 사우디가 참여하는 것을 지지합니다. 물론 이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난 2025년 1월 26일에 사우디를 방문한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멜로니는 지난 1월 사우디아라비아와 약 100억 달러 규모의 협약을 체결하며 양국 관계를 강화했습니다.

이 협약에는 방위산업 협력도 포함되어 있어, 사우디의 GCAP 참여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한 셈입니다.

아시아 전투기 시장의 패권을 꿈꾸는 일본의 계산


하지만 모든 참가국이 사우디의 합류를 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일본은 사우디아라비아의 GCAP 참여에 강한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전략적이고 경제적입니다.

일본은 아시아 지역에서 유일한 GCAP 제조국 지위를 유지함으로써, 거대한 아시아 전투기 시장에서의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GCAP에 참여하게 되면, 아시아 지역에 두 개의 GCAP 제조국이 존재하게 되어 일본의 시장 지배력이 약화될 수 있습니다.

GCAP 목업

동남아시아와 인도-태평양 지역 국가들은 향후 수십 년간 수백억 달러 규모의 전투기 구매가 예상되는 핵심 시장입니다.

일본은 이 시장을 독점적으로 공략하기 위해 GCAP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술 이전의 그림자, 일본의 우려가 현실이 될까?


일본의 가장 큰 우려는 기술 이전 문제입니다.

일본은 GCAP 참여를 통해 첨단 전투기 기술을 획득하고, 자국 방위산업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투기 독자 개발이 제한되었던 일본에게 GCAP는 방위산업 도약의 황금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기술 공유 부족은 이러한 기대에 찬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일본이 GCAP를 통해 확보하고자 했던 핵심 기술은 크게 네 가지 영역입니다.

첫째, 레이더 파장을 흡수하는 스텔스 코팅 기술과 레이더 파장 반사를 최소화하는 기체 설계 기술입니다.

영국은 이 분야에서 F-35 개발 과정에서 미국과 협력하며 상당한 노하우를 축적했습니다.

둘째, 전자전에 필수적인 AESA(능동 전자주사 배열) 레이더 기술로, 영국의 BAE 시스템즈는 이 분야의 선두주자 중 하나입니다.

셋째, 롤스로이스가 보유한 고성능 엔진 제조 기술입니다.

특히 초음속 비행과 초고속 순항이 가능한 차세대 엔진 기술은 일본이 독자적으로 개발하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마지막으로, 통합 항공전자(avionics) 시스템으로, 센서 융합과 인공지능 기반 의사결정 지원 시스템은 현대 전투기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입니다.


이러한 기술들을 충분히 이전받지 못한다면, 일본은 GCAP에서 단순 자금 제공자나 하청 생산자 역할에 그칠 가능성이 큽니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F-2 전투기 개발 과정에서도 유사한 경험을 했습니다.

미국과 공동 개발한 F-2는 표면적으로는 일본의 독자 모델이었지만, 핵심 기술은 여전히 미국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일본의 항공우주 산업은 독자적 성장에 한계를 경험했습니다.

GCAP에서도 이러한 역사가 반복된다면, 일본의 장기적인 국방 전략에 심각한 차질을 빚을 수 있습니다.

일본의 F-2 전투기

더욱 우려되는 점은 일본이 GCAP에 투자하는 막대한 자금입니다.

일본 정부는 이미 수천억 엔의 예산을 이 프로젝트에 배정했으며, 향후 10년간 총 투자액은 수조 엔에 이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만약 충분한 기술 이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거대한 투자는 단순히 외국 방위산업체의 이익만 채워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아직 공식적으로 이탈리아와 같은 불만을 표출하지 않고 있지만, 크로세토 이탈리아 국방장관의 발언은 일본 역시 비슷한 불만을 가지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합니다.

크로세토가 언급한 "일본은 거의 완전히 장벽을 허물었다"는 말은 일본이 자국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으로부터 상응하는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세 나라의 숨겨진 전략적 의도들


GCAP 프로젝트를 둘러싼 3국의 행보는 단순한 산업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지정학적 경쟁의 한 단면을 보여줍니다.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 글로벌 방위산업에서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 핵심 기술을 보호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자국 방위산업의 경쟁력이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는 계산입니다.

이탈리아는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협력을 통해 중동 방산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습니다.

멜로니 정부의 100억 달러 규모 협약은 이러한 전략의 일환입니다.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방위산업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장기적 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의 군사적 팽창에 맞서기 위한 역내 안보 협력 강화에 GCAP를 활용하고자 합니다.

전투기 동맹의 미래, 협력인가? 경쟁인가?


GCAP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는 이러한 복잡한 이해관계와 기술 공유 문제를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참여국들은 각자의 전략적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해야 하는 미묘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만약 영국이 계속해서 핵심 기술 공유를 꺼린다면, 일본은 프로젝트 참여 조건의 재협상을 요구하거나 대안을 모색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참여 여부 역시 프로젝트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변수입니다.

2035년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지만, GCAP 전투기가 첫 비행을 하기도 전에 참여국들 사이의 신뢰와 협력은 이미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전투기 개발 협력의 이면에 숨겨진 전략적 계산과 국익 추구의 복잡한 게임이 어떻게 전개될지, 그 귀추가 주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