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산행기] 백발이 된 친구들과 오대산 산행

석의영 수원시 권선구 수성로 2024. 12. 23.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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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영폭포를 배경으로 나란히 앉으니 웃음이 난다.

단풍이 지고 겨울이 내려앉은 지난 주말 오대산에 갔다. 등산코스는 진고개에서 시작해 노인봉(1,386m)에 올랐다가 소금강계곡 쪽으로 내려오는 14km에 이르는 장거리다. 리더인 승순에게 산행 예상시간을 물으니 8시간을 이야기한다. 요통으로 입원까지 했다가 요즘도 통원치료를 받으며 스틱 짚고 다니는 친구의 어림짐작이니 그 시간이면 충분하겠구나 싶다. 동행인원은 승순, 종만, 영환과 나까지 4명. 이 멤버(동북고 15기 동창 산행모임)는 한창 때 20여 명도 모였으나 나이 칠십 중반을 넘어서자 노인네 이빨처럼 하나 둘 빠져나가고, 둘레길을 가면 모를까 고산행엔 손사래를 친다.

하산길. 예전같지 않은 체력이지만 마음만은 의지가 넘친다.

노인이 되어 노인봉에 오르니

KTX를 타고 오전 9시에 진부역에 내려 진부휴게소에서 차 한 잔 하고 오전 10시에 진고개 탐방로로 들어서며 산행을 시작했다. 조금 오르니 드넓은 평원이 펼쳐진다. 해발 900m가 넘는 고지대에서 둘레길 같은 이런 평탄한 길을 걸으니 발걸음에 즐거움이 묻어났지만 곧 암초를 만났다. 산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종만이가 계단에 주저앉아 핏기 없는 얼굴로 진땀을 흘리며 연신 하품을 한다. 난감하다. 아무리 험한 산도 스틱 없이 올라다니는, 우리 중 가장 건강한 친구인데. 왜 그러냐고 물으니 휴게소에서 마신 차가 이상한 것 같다고 한다. 우리는 커피를 마실 때 이십전대보탕이란 차를 시켜 마시더니…. 걱정이 된 친구들이 지압도 해주고 소화제도 먹여 주며 하산까지 고려하고 있는데 시간이 좀 지나자 원기가 회복되는지 다시 올라가보자고 종만이가 앞장선다. 속도를 높여 가는 종만이를 뒤따르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노인이 되어 죽기 전에 노인봉 한 번 오르는 것도 쉽지 않구나.

회초리 같은 산철쭉 가지를 헤치며 노인봉에 올라보니 잔뜩 낀 운무로 보이는 것은 없고, 단체 등산객들로 빼곡하다. 멀리서 보면 백발노인처럼 보인다는데, 정상은 우리네 대머리처럼 매끈하다. 앉아 쉴 데도 없어 차례를 기다리는 젊은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정상석에 어울리는 성성한 백발로 단체 기념사진 한 장 찍고 곧바로 내려와 대피소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 1시, 하산 시작. 주차장까지 남은 거리는 10여 km. 해발 1,300m에서 200m까지 고도를 떨어뜨려야 하는 내리막길이다. 특히 낙영폭포까지 3km 구간은 가파르고 험하기로 유명하다. 끝없이 휘도는 철계단이 이어지는데 끊기는 곳마다 너덜겅이다. 잎을 다 떨군 자작나무, 신갈나무들의 매끈한 자태가 주위를 두르고 있다.

노인봉 정상에서 백발이 된 친구들과.

소금강의 아름다움

낙영폭포 앞에서 사진 한 장 찍고 곧바로 내려와 광폭포에서 찬물로 열을 식혔다. 백운대 넓은 바위에 누워 하늘을 보니 벌써 땅거미가 내려올 기미가 보인다. 때는 오후 5시. 소금강의 비경이 펼쳐진다는 만물상에 아직 이르지도 못했기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가볼 곳은 아직 널려 있는데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 우리네 인생 같다. 만물상 계곡에 들어서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조각 같은 기암괴석들이 맑은 물 굽이치는 계곡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금강산도 못 가본 나로서는 소금강도 족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에 여유 있게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조금이라도 밝은 빛에 소금강을 보려 바삐 걸었지만 점점 비경이 어둠속에 묻혀갔다. 헤드랜턴을 꺼내 썼으나 발밑을 비추기도 바쁘다.

달도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장엄한 교향곡 같은 계곡의 물소리가 이루어내는 소금강의 아름다움을 귀로 대신 들으며 걷는다. 어둠속에 길을 잃고 빙 돌기도 하고 되돌아오기도 하는 우여곡절 끝에 오대산 소금강 분소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7시 반. 우리가 세운 산행 9시간 반 기록은 코스 진기록 축에 들지 않을까 싶다.

자정 넘어 귀가해 만보기를 열어보니 3만5,000보를 걸었다. 요즘은 기껏해야 하루 6,000보 걷는 수준인데 내심 걱정된다. 내 다리 괜찮을까?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내려오려니 발이 안 떨어진다. 아장아장 뒤뚱뒤뚱 걸음마를 떼어보니 "아이구야" 비명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다리는 아프고 땡기지만, 생에 대한 자신감으로 기분은 새롭다. 하산길 보았던 고목에 핀 연록색 이끼처럼.

월간산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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