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과 고구려 기마병의 공통점, 연천 호로고루[이기환의 Hi-story](51)

2022. 9. 28.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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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경기 연천 장남면 호로고루 주변에 심어놓은 해바라기를 실컷 보고 돌아왔습니다.

6만송이의 해바라기밭에서 연신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관람객들로 북적댔습니다. 오는 10월 4일까지 열리는 행사가 ‘통일바라기 축제’인데요. ‘해만 바라보고 돈다’는 해바라기를 따서 ‘통일바라기’, 즉 ‘통일을 바라는 축제’라 한 겁니다.

6만송이 해바라기를 심어놓고 통일바라기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경기 연천 장남 호로고루. 호로고루는 5~6세기 고구려군의 최전방 사령부로 추정된다. /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참으로 절묘한 작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지만 다른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연천이 북한과의 접경지역이니까, 판에 박힌 발상에서 ‘통일’ 자를 붙인 것이 아니냐고요.

해바라기와 통일바라기 축제 호로고루가 어떤 곳인지 알게 되면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호로고루(瓠瀘古壘)’, 그 이름부터가 낯설죠. ‘호로’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임진강의 구간 이름인 ‘호로하’에서 따왔고요. ‘고루’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옛 보루’를 뜻하죠. 보루가 있었다면 엄청난 요충지였겠네요.

임진강과 한탄강은 강원 평강 오리산·검불랑 등에서 분출한 용암이 흘러내려 만들어진 하천인데요.

용암이 굳어져 생긴 현무암 지대를 따라 형성된 높이 10m가 넘는 두 강의 단애가 상류부터 끊임없이 펼쳐져 내려옵니다.

그중 두 강의 합류지점(연천 전곡 도감포), 칠중하(파주 적성 구간), 호로하(연천 장남면 구간) 등은 깎아지른 단애가 없고 수심마저 얕아 쉽게 건널 수 있는 몇 안 되는 지점입니다. 이중 호로하가 도보로 건널 수 있는 마지막 구간이었습니다.

이 호로하에서 약 500m 하류 쪽으로 가면 한국전쟁 이전까지 번성했던 고랑포구가 있었습니다. 서해안에서 거슬러 올라온 조기·새우·소금 배들이 파주·연천의 대표적인 특산물이던 콩·땔감·곡물 등과 교역한 포구였죠. 그러니 고랑포~임진강 하류~서해안 구간은 수심이 깊어 사람이, 혹은 기마부대나 전차부대가 건널 수 없죠.

북한군의 남침로, 무장공비 침투로 1950년 6월 25일 남침한 북한군의 주력 전차부대가 개성~문산이 아니라 20㎞나 우회한 곳이 호로하와 칠중하 쪽 임진강 구간이었습니다. 1968년 북한군 특수부대의 1·12사태 침투로가 이곳에서 멀지 않고요. 1974년 발견된 고랑포(제1) 땅굴도 8㎞가량 북동쪽에 있습니다. 장마철이 아니면 수심이 무릎까지밖에 올라가지 않는 곳이니 호로고루 부근을 침투로(남하로)로 삼은 겁니다.

예전에는 어땠을까요. 지형이 바뀌지 않은 이상 마찬가지였겠죠. 이곳은 삼국시대부터 한반도를 경영하려면 반드시 차지해야 할 요충지였습니다. 호로하, 즉 호로고루 부근은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누린 백제의 영역이었을 겁니다.

최근 호로고루 인근의 파주 적성 육계토성이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에 축조된 백제성이라는 발굴성과가 나왔는데요. 생긴 것도 한성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과 닮아서 ‘리틀 풍납토성’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개풍 장학리(북한)~연천 횡산리~삼곶리~삼거리~우정리 1·2호분~동이리~학곡리 적석총 등 기원후 1~2세기에 축조된 백제 적석총이 8기나 확인됐습니다.

그러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부터 이 땅은 고구려 영역으로 바뀌죠. ‘광개토대왕비문’에 따르면 396년(광개토대왕 5) 남침작전을 벌인 고구려가 58성 700촌을 빼앗고 ‘백제왕을 영원한 노객(奴客·신하)으로 삼은 뒤’ 돌아왔습니다.

발굴조사 당시의 호로고루 항공사진. 임진강의 수직 단애에 접해 성을 조성했으며 삼면이 급경사와 절벽으로 이뤄져 천혜의 요새로 기능했다. / 토지주택박물관 제공


고구려는 천자, 백제·신라는 제후? 〈삼국사기〉 등에는 기록되지 않았는데요. 475년(고구려 장수왕 63·백제 개로왕 21)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남침로도 바로 이 호로하와 칠중하 쪽이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그랬듯 호로고루 쪽이야말로 고구려 주력인 기마병 부대가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었을 테니까요.

고구려군은 이후 동두천~의정부~상계동 등을 거쳐 아차산에 이르렀고 한강을 건너 한성백제의 도성인 풍납토성을 7일간 공격한 끝에 함락시켰을 겁니다. 그 루트를 따라 조성된 38곳의 고구려 보루 및 성이 고구려군의 남하 과정을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이 고구려 성과 보루는 대부분 둘레 400m 안팎의 소규모인데요. 여기서 고구려의 점령지 통치방식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행정관을 둬 점령지역을 다스리고, 조세를 받는 형식이 아니라 전진·후퇴의 루트만을 확보했다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396년) 광개토대왕이… 백제왕을 영원한 노객으로 삼고 돌아왔다”는 ‘광개토대왕비문’이 눈에 띄는데요.

또 “475년 한성 함락 후 백제 문주왕(재위 475~477)이 신라가 보낸 원군 1만명과 함께 돌아와 보니 고구려군이 이미 물러갔다”는 〈삼국사기〉 ‘문주왕’조도 주목거리입니다. 5세기 말에 작성된 충주 고구려비문에 “고려 태왕이 신라 매금(왕)과 (더불어) 세세토록 형제와 같이(如兄如弟)… 화합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렇게 5~6세기 전반 남진정책을 펼친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노객’ 혹은 ‘형제국’으로 삼은 뒤 장기간 점령하지 않고 돌아갔다는 것이 심상치 않답니다. 이 때문에 만주벌판을 호령한 고구려가 스스로 황제국을 칭하면서 한반도 남부의 백제·신라까지 조공국가, 즉 제후국으로 삼았다는 유력한 해석이 등장한 겁니다.

대식가였던 고구려군의 ‘짬밥’ 4세기 말까지 백제, 그리고 5~6세기 중반까지 고구려의 ‘리즈 시절’을 상징하던 임진강 유역은 553년(신라 진흥왕 14) 다시 격동의 시기를 맞게 됩니다. 한강유역을 점령한 신라가 거침없이 북진합니다. 이때부터 임진강은 고구려-신라의 국경선으로 변합니다.

고구려는 강 북안에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무등리 1·2보루 등 크고 작은 보루와 성을 고쳐 쌓거나 새로 구축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호로고루는 고구려의 최전방사령부 역할을 했습니다.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1998년 토지주택박물관의 정밀지표조사 결과 호로고루에서 고구려 기와 조각들이 대거 확인되면서 정식 조사가 시작됐는데요. 그 결과 임진강이 굽이굽이 돌아가면서 이뤄진 삼각형 형태의 천연 단애부에 접해 둘레 401m의 성벽을 조성한 사실을 확인했고요.

‘한들벌’로 이어지는 동쪽만 높게 성벽을 쌓았고요. 임진강, 즉 호로하에 면하는 곳은 30m의 절벽으로 곧장 이어지고, 북쪽 역시 40~60도가량 아찔한 급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 동벽만 막을 수 있다면 적의 침입이 불가능한 요새로 기능했을 겁니다. 성 내부의 전체 규모는 2000평 정도 됐습니다.

이곳에서는 임진강·한강 유역의 40여개 고구려 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고구려 기와와 토기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심지어는 한성백제의 도성 체계에 있던 몽촌토성보다 많이 출토됐는데요. 그만큼 규모가 큰 건물이 존재했다는 얘기입니다.

2006년 확인된 지하보급창고에서도 흥미로운 유물이 쏟아졌습니다. 소·말·개·사슴·멧돼지 등 6종의 동물뼈와 불에 탄 쌀·콩·조·팥 등 곡물들이 출토됐습니다. 1300g들이 밥공기도 나왔는데요. 요즘의 밥공기가 200g 정도 되니까 고구려 병사들은 엄청난 양의 ‘짬밥’을 먹은 겁니다. ‘흙으로 만든 북(鼓)’도 출토됐는데요. 적의 습격을 알리거나 아군의 진격을 독려할 때의 두들겼던 ‘변방의 북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호로고루 원경. 임진강의 연천 장남 구간인 호로하 인근에는 징검다리 식으로 모래톱이 드러날 정도로 수심이 낮아 기마부대가 쉽게 건널 수 있었다.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 전차부대의 지원을 받은 1사단이 이 부근으로 남침했다. / 토지주택박물관 제공


호로고루와 동쪽으로 20㎞쯤 떨어진 무등산 보루에서 수백가마니에 달하는 탄화 곡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5~7세기 고구려군의 군량미 창고였습니다. 연구결과 고구려군이 먹은 쌀의 품종이 ‘인디카(Indica)’가 아니라 ‘자포니카(Japonica)’였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인디카’는 지금 동남아 등지에서 먹고 있는 ‘메진’ 쌀이고, ‘자포니카’는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차진’ 쌀이죠. 5~7세기 고구려가 양질의 군량미를 군사들에게 제공할 만큼 부강한 나라였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삼국시대 군사분계선 저는 호로고루에만 가면 임진강 맞은편, 즉 남쪽에 있는 또 하나의 성터를 바라보고 상념에 잠기곤 합니다.

그곳이 ‘이잔미성’인데요. 정식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일부 남아 있는 석축으로 미뤄보면 신라성일 가능성이 큰데요.

호로고루와 이잔미성은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고구려-신라의 최전선 사령부였겠죠.

그렇다면 임진강은 삼국시대판 군사분계선, 혹은 휴전선이겠네요. 강 양쪽의 성에 주둔한 병사들은 어땠을까요.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지만, 때로는 “밥은 잘 먹었냐”, “고향 생각은 안 나냐”고 큰 소리로 소통하지는 않았을까요.

가끔은 그렇게라도 숨 막히는 대치국면을 풀지 않았을까요. 그랬을 것 같습니다.

신라를 똥개 취급한 당나라 이와 같은 신라~고구려의 살얼음판 대치국면(553~660)은 백제 멸망(660)으로 완전히 바뀝니다. 고구려가 공격 목표가 되면서 혈전의 무대로 변하죠. 662년(문무왕 2) 정월의 전투를 기록한 〈삼국사기〉 ‘문무왕’조를 봅시다.

신라는 “보급품을 평양으로 보내라”는 당나라군의 요구에 따라 김유신 장군(595~673)의 지휘 아래 군량미를 운송합니다. 한 달 넘게 눈보라와 함께 강추위가 불어닥쳐 사람과 말이 얼어 죽어갔습니다. 결국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철군을 결정합니다.

“철군하던 신라군이 호로하에 이르렀을 때 고구려군이 쫓아와 강 언덕에 나란히 진을 쳤다. 신라군은 고구려군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기습했다.”(〈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조는 “이때 신라는 고구려군의 수급을 1만이나 베고, 5000명을 사로잡았다”고 했습니다. 호로고루와 이잔미성이 치열한 전쟁터가 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나라군의 과도한 요구가 계속됐습니다. ‘오라 가라’는 당나라군의 ‘똥개 취급’에 신라의 괴로움은 극에 달했습니다.

호로고루에서 켜켜이 쌓인 채 확인된 고구려 기와류. 40여곳의 고구려 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기와가 확인됐다. / 토지주택박물관 제공


667년(문무왕 7) 신라군이 당나라군을 위해 칠중성(호로고루 인근 성)을 막 함락시킬 무렵이었습니다. 갑자기 당나라 사자가 달려와 “칠중성은 됐으니 빨리 평양성으로 군량미를 보내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김이 빠진 신라군이 공격하다 말고 군사를 돌려 수곡성(황해도 신계)까지 군량미를 싣고 진격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신라군에게 “당나라군이 이미 철군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장안(당나라 수도)으로 철군한 당나라군은 문책이 두려워 황제(고종·재위 649~683)에게 “신라가 군사를 늦게 보내는 바람에 철군했으니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고해바쳤답니다. 문무왕과 신라 조정의 분노가 켜켜이 쌓여갔습니다.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에 전승 백제에 이어 고구려까지 멸망시킨(668)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냅니다.

신라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임진강 호로하와 칠중하는 신라-당나라군의 격전지로 변합니다.

673년(문무왕 11) 5월 당나라 총관 이근행(?~682)이 호로하 서쪽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치고 수천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그러자 남은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로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9월에는 신라군이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을 역시 호로하에서 격퇴했습니다.

호로고루 내부에서 확인된 지하창고는 고구려군의 보급창고였다. / 토지주택박물관 제공


〈삼국사기〉 ‘문무왕’조는 “호로하에서 왕봉(경기 고양)까지 치른 9차례의 전투에서 당나라군 2000여명의 목을 베었다”면서 “두 강에 빠져죽은 당나라군이 셀 수 없이 많았다”고 기록했습니다. 신라는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고 당나라를 내쫓는 기반을 닦았습니다.

오랜만에 찾아본 호로고루에 해가 저물고 있었는데요. 해바라기밭을 앞에 두고 호로고루 위로 넘어가는 일몰과 붉은 노을을 찍으려는 카메라가 장사진을 치고 있더라고요. 예부터 호로고루 주변의 임진강 절경을 ‘고호팔경(皐湖八景)’이라 했거든요.

“낚시터에 비치는 깊은 밤 고운 달빛(釣臺暮月)… 자미성(호로고루) 위로 떠오르는 초승달(嵋城初月)… 저물녘 고랑포 선창으로 돌아오는 돛단배(石浦歸帆), 장단 석벽 좌우로 펼쳐지는 가을 단풍의 절경(赤壁丹楓), 경순왕릉에 비치는 저녁햇빛(羅陵落照)….”

호로고루라는 심상치 않은 이름 속에 담겨 있는 ‘심상치 않은 역사’의 사연을 한번쯤 기억해주기 바랍니다. ‘통일바라기’라는 이름의 축제를 여는 뜻도 한번쯤 새겨 두기를….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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