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GOUT Monthly] 그땐 그랬지!
3월부터 시작한 우리의 야구는 10월 마지막 주가 돼서야 결승선을 넘었다. 핑크빛 얇은 꽃잎이 흩날리던 봄날의 야구장부터, 어항에 빠진 듯 덥고 습하던 한여름의 그라운드, 그리고 노란 단풍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가을의 높은 하늘 아래 펼쳐진 녹색 다이아몬드까지. 야구와 함께한 세 계절을 모두 지나 보낸 지금, 이제는 점퍼를 껴입고 스토브 앞에 앉아 도란도란 추억을 회상할 때가 됐다. 12월을 맞아 <더그아웃 매거진> 에디터들은 각자 야구장에서 보낸 짜릿한 하루를 떠올려봤다. 그 짜릿함이 긍정적인 의미일 수도, 그 반대일 수도 있지만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아름답게 꾸며본다. 독자 여러분도 올해 야구와 함께라 행복하셨죠? (11월 3일 작성)
에디터 김서현 사진 두산 베어스
#손하현 에디터 – 각양각색 퓨처스리그 구장
프로야구 경기장을 찾는 사람들에게 야구의 가장 큰 매력이 무엇이라고 묻는다면, 누군가는 야구장을 채우는 에너지를, 응원과 음식 문화를, 또 누군가는 프로 선수들의 경기를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할 경기장은 위에서 언급한 매력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진 장소다.
벚꽃이 피는 시기가 되면 사람들은 꽃을 보기 좋은 장소를 물색하기에 바쁘다. 축제를 가기도 하고, 석촌호수를 산책하는 커플도 많지만, 야구와 벚꽃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소도 있다. 바로 두산 베어스가 퓨처스리그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천시 백사면에 있는 ‘베어스 파크’. 경기 두 시간 전부터 개방되는 베어스 파크는 승리의 길을 따라 화려하게 피는 벚꽃길로도 유명하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 일광욕이 가능한 벤치, 수많은 꽃과 분수까지. 야구를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야구 외적인 즐거움도 선사한다. 가끔 경기장 바깥에서 캐치볼을 즐기는 가족 단위 방문객들도 볼 수 있다. 예매할 필요 없이 느긋하게 방문해 관람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좌석 수는 많지 않지만, 경기장 내부에는 역대 두산 베어스의 유니폼과 역사를 구경할 수 있는 작은 전시관도 있다. 또 좌석 뒤쪽에 돗자리를 펴고 편히 야구 관람을 즐기는 사람도 왕왕 볼 수 있다. 잔디밭에는 뱀이 다니기도 하는데, 이 뱀을 보면 좋아하는 선수가 홈런을 친다는 미신도 있다고 하니 찾아보는 것도 베어스 파크만의 묘미 중 하나다. 투수 팬인 본 에디터가 뱀을 본 날, 미안하게도 좋아하는 투수가 되려 홈런을 내줬다는 것이 그 미신을 방증한다. 사람이 꽉 찬 야구장이 피로하게 느껴져 이젠 휴식을 즐기고 싶다면 녹색 자연 속에 숨겨진 베어스 파크 방문을 추천한다.
이 외에도 2군 구장들은 각자만의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까지 1군 경기장으로 사용되던 마산야구장은 현재 NC 다이노스의 2군 경기장으로 쓰인다. 테이블을 갖춘 좌석이 많아 음식을 먹으며 야구를 보고 싶은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심지어 낮에는 2군 경기를, 저녁에는 바로 옆 창원NC파크에서 정규 시즌 경기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두 구장 거리가 가깝다. 거기다 베어스 파크와 함께 이천에 위치한 LG 트윈스의 2군 홈구장인 LG 챔피언스 파크는 포수 후면에 앉으면 포수 눈높이에서 투수의 피칭을 구경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접근성이 좋은 고양 국가대표 야구 훈련장, 1군 경기만큼이나 많은 팬이 모여드는 상동 야구장 등 색다른 모습이 보이는 매력적인 경기장이 많다. 기회가 된다면 퓨처스리그의 새로운 매력을 느껴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될 것이다.
#이지인 에디터 – 두 개의 심장
올여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거웠다. 역대급 온도와 습도와 함께 더위가 기승이었지만, 한 야구팬의 직관 열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잠실야구장으로, 고척 스카이돔으로, 한화 이글스파크로, 창원NC파크로, 수원KT위즈파크로, 인천 SSG 랜더스필드로, 그리고 청주야구장으로 향했던 수많은 발걸음. 비록 전국 모든 구장을 가 보지는 못했지만, “누나, 혹시 야구선수예요?” 밈(Meme)의 주인공이 된 지는 오래였다. 돌이켜보니 약 70장의 지류 티켓이 손에 쥐어져 있던 것. 사람들이 묻는다. 한 팀당 1년에 144경기를 치르지 않냐고. 그중 절반 가까이 되는 경기를 보러 갔느냐는 의미다. 이에 수줍게 고백한다. “두 팀을 응원해서 그랬어요.”
긴 줄만 알았던 페넌트 레이스는 눈 깜짝할 새 마무리 된다. 누군가는 아쉬운 채로 ‘내 팀’의 야구를 떠나보내고, 누군가는 정상을 향해 내달리기 위해 다시금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서늘한 바람과 함께 치열한 포스트 시즌을 치르고 나면 ‘또 다른 시작’이 찾아온다. 바로 스토브리그다. 전날까지도 뜨거운 땀방울을 함께 흘리던 동료가, 1년 혹은 그 이상 열띤 응원을 보내던 내 선수가 하루아침에 다른 팀으로 떠난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선수가 우리 편이 된다. 값을 매기고, 사고 팔린다. 그제야 깨닫는다. 사실 야구도 어쩔 수 없이 오직 ‘승리’라는 목표만을 위해 달리는 냉혹한 스포츠의 세계 속에 있었다는 걸 말이다.
게다가 시즌 중에도 예상치 못한 트레이드는 진행되고, 이는 팬들에게 큰 충격으로 남기도 한다. 꽃피지 못한 유망주를, 시즌 중 다른 팀으로 보내는 마음이 유독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작년부터 야구장으로 미련 가득한 발걸음을 이어갔던 이유다. 그러나 이적하자마자 제 자리를 찾은 듯 날아다니며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연봉이 올랐고, 응원가가 생겼다. 부상도 있었지만, 한 시즌을 제대로 보냈다. 이때 그를 바라보는 에디터의 몸속에는 2024시즌 내내 두 팀을 응원하는 두 개의 심장이 가쁘게 뛰고 있었다. 정상궤도로 돌아오며, 진리를 깨달았다. KBO리그는 결국 하나라는 것을. 치열한 경쟁을 치르다가도 끝내 하나로 모이는 ‘팀 코리아’라는 것을. 우리의 목소리는 결국 하나가 된다는 것을.
#전윤정 에디터 – 망곰과 망곰을 얻었다?!
이번에도 곰들의 가을은 다소 허무했다. 그렇다면 2024시즌의 두산은 남긴 것이 없는가? 아니, 그건 오산이다. 대체 불가 특급 신인 김택연을 만났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저절로 떠오르는 또 하나의 선물이 있다. 잠시 6월로 돌아가 보자. 그라운드에 후텁지근한 무게감이 더해지던 잠실야구장엔 못 보던 구경거리가 등장했다. 앙증맞은 곰돌이가 그려진 뽀얀 하늘색 유니폼을 입은 거구의 장정들이 한데 모여 여느 때처럼 땀을 흘리며 야구를 하고 있던 것. 잠깐, 유니폼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 곰돌이, 웬만한 셀럽 뺨친다는 유명웅사(?) ‘망그러진 곰’(이하 ‘망곰’)이다!
망곰과 두산의 첫 만남으로 뜨거웠던 지난 초여름 어느 날. 두산 선수와의 인터뷰가 잡혀 잠실야구장을 찾았다. 망곰 데이를 준비 중인 분위기가 물씬 느껴지던 두산 사무실에서 인터뷰를 기다리던 중, 동행했던 직원이 대뜸 물었다. 망곰 유니폼은 샀느냐고. 마치 ‘설마 안 산 건 아니겠지?’ 하는 시선에 괜히 머쓱해졌다. 벌써 두 벌을 쟁였다는 그는 일단 두산 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짧은 팔다리로 그라운드를 휘젓고 다니는 망곰의 매력은 이미 다른 KBO리그 팬들까지 매료시킨 듯했다. ‘망곰 보유 구단’의 팬이라는 사실 자체가 마치 권력처럼 느껴졌다면 과장일까.
사실 두산 팬들로서도 망곰 아이템을 무조건 구매하기엔 녹록지 않은 사정이 있었다. 유니폼과 모자에 더해 기념구, 응원 배트, 그립톡, 스티커, 크로스백, 인형, 머리띠 등 그 가짓수도 푸짐한 컬래버레이션이었지만, 은혜로운 만큼 영접하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 굿즈 판매가 시작되면서부터 온갖 판매처는 그야말로 마비 상태였다. 선풍적인 인기에 수요가 공급을 뛰어넘은 지는 이미 오래. 오프라인 판매 소식엔 텐트를 동원한 우중 오픈런이 이어지는 장면까지 펼쳐졌으니, 그야말로 ‘망곰 신드롬’이었다.
한때에 그치는 이벤트는 아닐지 걱정했지만, 두산은 팬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화답했다. 유니폼이 쉴 새 없이 찍혔고, 9월엔 또 한 번의 망곰 데이가 찾아왔다. 유명 아이돌의 시구 행사엔 마스코트 망곰이가 이마에 그의 이름을 적고 따라다니며 귀여움을 뽐내기도 했다. 급기야 신규 굿즈로 기존 망곰 캐릭터가 입던 잠옷을 본뜬 신규 유니폼까지 출시되는 등 ‘망곰의 축복’이 끝없이 이어졌다. 늦여름의 잠실야구장에선 어느샌가 하늘빛 유니폼이 교복처럼 통용되고 있었을 정도. 결국, 평소 굿즈 구매에 인색했던 에디터도 이런 ‘망류’ 열풍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9월에 주문한 콜드컵은 도대체 언제 오는 것인지?
#양은빈 에디터 – 역대급 ‘열대야구장’
천만 관중 돌파와 함께 역대급 흥행을 기록한 2024 KBO리그. 야구팬들의 열정만큼이나 뜨거운 것이 있었으니, 바로 ‘폭염’이다. 맹렬히 내리쬐는 햇볕 아래, 야구장을 덮은 잔디는 식을 줄 모르고 열기를 더해 섭씨 50도에 육박했다. 특히 인조 잔디를 사용하는 구장의 경우에는 잔디 온도 관리가 더욱 어려워 선수들이 그라운드를 밟기조차 힘든 환경이 조성됐다. 야구 역사상 볼 수 없었던 ‘폭염 취소’라는 진귀한 일이 발생한 8월 초, 수많은 야구팬은 관중석에서 땀을 닦으며 함께 고생 중인 선수들을 응원했다.
경기 전부터 폭염 취소가 우려됐던 8월 3일의 잠실, 경기장에 방문한 관중들은 하나같이 한 손에는 얼음 음료를, 다른 손에는 선풍기를 들고 있었다. 울산문수야구장에서 열릴 예정이던 LG와 롯데 자이언츠의 경기는 그라운드 온도가 폭염 취소 기준을 웃돌아 이미 취소된 상태. 잠실 경기 또한 취소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기준을 살짝 밑도는 온도였기에 야구장에 방문한 수많은 야구팬의 함성과 함께 경기는 시작됐다.
6시에 잡힌 시합이었던 터라 해가 지면서 날씨가 선선해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어둠이 야구장을 덮고 난 후에도 더위는 이어졌다. 열대야 신기록을 세운 올해의 여름 날씨가 저녁의 야구장에도 영향을 미친 듯했다. ‘열대야구장’이라는 표현이 딱 맞던 그 날 밤, 더운 날씨만큼 화끈한 타격전이 펼쳐졌다. 시즌 14번째 맞대결을 펼친 키움 히어로즈와 두산이 도합 36안타, 20득점을 기록하는 뜨거운 공격력을 보여줬다. 더운 날씨에도 집중력을 잔뜩 끌어올린 타자들 덕에 야구장은 응원가를 부르는 팬들의 목소리로 열기를 더했다.
최종 스코어는 15:5, 23안타를 때려낸 키움의 승리였다. 하지만 더위를 참으며 경기 끝까지 응원을 보낸 두 팀의 팬들은 승패와 관계없이 행복해 보였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 오듯 쏟아지던 그 날, ‘열대야구장’에서 폭염보다 뜨거운 응원 열기를 느끼며 시원한 열무국수와 함께 이온음료 1리터를 해치운 기억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았다.
#정회하 에디터 – REMEMBER THE ACE
“두산 베어스에서 은퇴하겠습니다(I’m gonna retire a Doosan Bears.)”
2010년대, 두산 팬들이 경기를 보지 않아도 승리를 장담하던 날이 있었다. 바로 더스틴 니퍼트의 선발 등판 날이다. 데뷔 때부터 그는 두산 마운드의 ‘승리 요정’이었다. 203cm의 장신에서 꽂는 시속 155km의 직구, 그리고 같은 궤적으로 다가오다가 흘러 나가는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그의 투구는 말 그대로 압도적이었다. 두산 전성기의 중심에는 그가 있었다.
그러나 영원히 두산 에이스일 줄로만 알았던 니퍼트는 2018시즌을 앞두고 KT 위즈로 이적했다. 두산 팬들의 슬픔은 상당했지만 그만큼 추억도 컸기에, 두산 상대로 등판한 KT의 니퍼트는 두산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2018시즌 KT에서 니퍼트는 외국인 선수 최초 100승 고지에 오르며 전설을 완성했다. 하지만 그 시즌이 니퍼트의 KBO리그 마지막 시즌이었다. 팬들은 레전드를 떠나보내는 행사를 기대했지만, 코로나19 대유행 등 여러 사정이 겹쳐 그의 은퇴식은 치러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올해 9월 14일, 니퍼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베어스 유니폼을 입고 잠실을 찾았다. 8년 전인 2016시즌에 그가 팬들과 나눴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두산 유니폼을 입고 은퇴하겠다던 그였다. 팬들은 에이스가 작별을 고하는 현장에 함께하고자 잠실을 가득 메웠다. 니퍼트는 이날 KT와의 경기에 앞서 은퇴선수 특별 엔트리에 포함되며 정식경기 등판 가능성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가 1점 차의 접전으로 흘러가는 바람에 결국 마운드에 선 그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두산이 승리를 거둔 후 잠실야구장 조명이 꺼지면서 은퇴식이 시작됐다. 행사는 두산을 상징하는 알파벳 ‘D’로 시작하는 낱말인 Debut(데뷔), Dedication(헌신), Drama(드라마), Destiny(운명), Dear(당신에게)라는 키워드로 행사는 진행됐다. 1루 베이스에서부터 홈플레이트까지 키워드 하나씩을 거쳐오며, 니퍼트와 함께했던 선수들이 나와 꽃다발을 안겼다. 김재호, 정수빈, 허경민, 김재환, 유희관이 차례로 나와 사진을 함께 찍었다. 이날의 대미는 역시 니퍼트와 최강 배터리를 만들었던 포수 양의지와의 만남. 니퍼트의 공을 가장 자주 받아내며 승리를 쌓아 올리던 양의지다. 2019년부터 4년 동안 팀을 떠나 있었지만, 니퍼트가 은퇴하는 날 그가 두산에 있어 팬들은 다행이라고 느꼈다. 양의지가 그에게 꽃을 건넬 때, 그가 양의지를 향해 헌정사를 전할 때, 두 사람의 눈에서 떨어졌던 눈물만큼 팬들도 눈물을 흘렸다.
대학생 때 그의 경기를 보던 팬은 한 아이의 부모님이 됐고, 아빠 손을 잡고 니퍼트 선발 경기를 직관하던 초등학생은 대학생이 돼 다시 아빠와 잠실을 찾았다. 베어스 팬들의 지난 십여 년이 얽혀 있던 초가을의 잠실, 이날의 눈물이 씨앗이 돼 언젠가 새봄이 다가올 것이다. 팬들에게도, 니퍼트에게도.
#김서현 에디터 – 가성비 가을야구
우리가 흔히 ‘와일드카드’라 부르는 포스트시즌 첫 무대의 공식 명칭은 ‘와일드카드 결정전’. 따라서 지난 10월 1일 KBO 사상 처음으로 성사된 5위 타이브레이커는 ‘와일드카드 결정전 진출 결정전’이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KT가 정규 시즌의 144번째 경기를 먼저 끝내고 SSG 랜더스에 반 경기 차로 앞섰던 9월의 마지막 날, 가을을 끝까지 놓을 수 없었던 ‘최정 랜더스’의 최정이 홈런 두 방으로 꺼져가던 불꽃에 희망을 붙였다. 그렇게 이튿날 수원kt위즈 파크(이하 ‘위즈 파크’)에서 열리게 된 페넌트 레이스 145번째 경기. 예정에 없던 경기인 데다 전날 밤 11시에 예매가 시작됐지만, 그 열기는 가을야구만큼이나 뜨거웠다.
당일 위즈 파크 주변은 KBO리그의 대축제처럼 느껴졌다. 롯데와 NC의 마지막 맞대결이 창원에서 열렸음에도, 이 두 팀을 포함한 KBO리그 10개 구단의 유니폼이 고개를 돌릴 때마다 쉽게 보였다. 바로 다음 날 열릴 와일드카드 결정전의 상대가 누가 될지 궁금해 위즈 파크를 찾은 두산 팬, 한국시리즈까지 시간이 한참 남아 심심해서 구경 온 KIA 타이거즈 팬도 이곳에 모이지 않았을까 상상하며 새삼 하루 만에 모인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10월의 첫날이라 그런지, 폭염 취소까지 등장했던 올 시즌의 야구장에서 느껴본 것과는 사뭇 다른 공기가 느껴졌다. 이즈음 맡을 수 있는 ‘가을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오고, 습도가 살짝 떨어진 듯한 바람이 지나갔다.
벼랑 끝에 선 두 감독의 선수 기용도 꼭 가을야구를 치르는 듯했다. 이강철 감독은 엄상백-소형준-고영표-박영현으로 이어지는 국가대표 투수진을 자랑하듯 연달아 출격시켰고, 이에 질세라 이숭용 감독도 (로에니스) 엘리아스-노경은-김광현으로 최종 승부수를 띄우며 정규 시즌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경기 운용을 보였다. 야수 역시 각 팀의 베스트 라인업으로 등장했고, 중요한 순간마다 홈런으로 승기를 가져온 것 역시 단판 승부의 짜릿함을 느낄 수 있는 포인트였다.
포스트 시즌은 정규 시즌과 다르게 입장료가 책정된다. 위즈 파크의 응원지정석을 기준으로 정규 시즌에는 티켓값이 최대 18,000원(주말 기준, 주중 15,000원)인데 비해 준플레이오프에 돌입하면 40,000원으로 훌쩍 뛰는 것. 그렇기에 분위기와 경기 내용 모두 가을야구 같았지만, 푯값은 저렴하게 치렀으니 가성비 있게 특별한 경기를 즐긴 기분이었다. 팬들만 그렇게 느낀 것도 아니었다. 지난 호 ‘더그아웃 피플’의 주인공인 SSG 박성한 또한 포스트 시즌만큼의 긴장감을 느꼈다고 표현했으니. 그렇기에 이번 와일드카드 결정전 진출 결정전을 ‘준 가을야구’ 정도로 정의하면 어떨까. 9회 초 2아웃 최지훈의 방망이가 허공을 가르며 가을야구 막차 탑승자가 정해진 순간, 야구장을 쩌렁쩌렁 울린 김주일 응원단장의 한마디로 가성비 가을야구 관람기를 마쳐본다. “가즈아~ 잠실로~!”
#김민규 에디터 – 내일이 없는 경기에 관해
매해 새로운 주인공이 탄생하고 있는 KBO리그 포스트 시즌. 정규 시즌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긴장감과 부담감이 느껴지는 무대기에,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만큼이나 지켜보는 팬들 역시 가슴을 졸이기 마련이다. 특히, 패배가 곧 탈락을 의미하는 ‘엘리미네이션 게임(elimination game)’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흔히 패배의 순간마다 “내일은 이기겠지!”라는 마음으로 자신을 위로했지만, 이날만큼은 그런 정신 승리가 통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다음을 기약할 ‘내일’이 없을 수도 있는 까닭이다.
정규 시즌을 3위로 마무리한 뒤 준플레이오프에 직행한 LG. 팬들은 창단 이래 가장 긴 6년 연속으로 이어지는 가을 냄새에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고, LG는 KT를 3승 2패로 꺾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며 2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한 단계를 밟아나갔다. 다음 상대는 2002년 준우승의 악몽을 안긴 삼성 라이온즈. LG는 ‘타도 삼성’을 외치며 승부에 임했지만, 적지 대구에서 무기력하게 2패만을 안고 말았다. 이제 쌍둥이 군단에 남은 기회는 단 한 번뿐. 이때 위기에 빠진 LG를 구원하기 위해 선발로 예고된 투수는, 다름 아닌 토종 에이스 임찬규였다.
모든 좌석이 가득 들어찬 지난 10월 17일의 잠실야구장. 이번 가을에만 8번째로 치르는 LG의 포스트 시즌 경기였지만, 이날 경기장을 찾은 LG 팬들의 얼굴엔 다소 복잡미묘한 감정이 담겨있는 듯했다. 왠지 오늘만큼은 이길 수 있겠다는 희망부터, 설마 3연패로 시리즈가 끝나겠냐는 의심, 그러면서도 어쩌면 오늘 시즌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까지. 그 모든 감정을 품은 채 LG 팬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그리고 이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기는 치열한 줄다리기만을 거듭했다. 양 팀의 숱한 기회가 무산되던 가운데, 5회 말 홍창기가 귀중한 타점을 올리면서 드디어 LG가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도 팽팽한 투수전은 계속됐고, 1점의 간격이 9회까지 이어지며 팬들의 입술은 타들어만 갔다. 투수들이 던진 공이 미트에 꽂히는 소리는 마치 팬들의 심장박동 소리 같았고, 타자들이 방망이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관중석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과 비명은 메아리가 돼 돌아왔다. 그렇게 경기는 최종장에 돌입했고, LG 마운드엔 두 번째 투수로 올라온 엘리에이저 에르난데스가 서 있었다. 그는 끝까지 시속 150km가 넘는 강속구를 뿌리며 KKK로 이닝을 매조지었고, 그렇게 숨 막혔던 1점 차 승리의 마침표를 찍었다. LG 팬들에게 또 다른 ‘내일’이 생긴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는 일은 없었다. 이틀 뒤, 우천으로 미뤄진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1대0으로 패하며 더 이상의 내일을 만들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우승 도전은 마무리됐고, 2024시즌은 KIA의 통산 12번째 통합 우승으로 마무리됐다. 비록 LG는 이번 가을의 주인공이 아니었지만, 내일이 없을 뻔한 상황에서 새로운 내일을 안겨준 10월 중순의 가을밤은 내년을 기다리는 팬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김연수 에디터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KBO리그 천만 관중 시대에 그라운드 위 선수들만큼이나, 팬들 또한 치열한 ‘피켓팅’이 1년 내내 이어졌다. 티켓 예매의 어려움을 겪는 야구팬을 위해 본지는 2024년 10월 호 ‘더그아웃 팁’으로 구단별 멤버십 제도를 정리했지만, 가을야구는 이조차 통하지 않는다. 그렇게 갈 곳을 잃은 팬들의 발걸음은 야구장이 아닌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관에서 야구를? 다소 낯설게 느끼는 이가 있을 수 있으나, 그동안 제법 많은 야구 경기가 스크린에 영사됐다. CGV는 지난 2023년 처음으로 한국시리즈를 생중계 상영했고, 작년의 흥행에 힘입어 올해부터는 상영 편수를 늘렸다. 포스트 시즌 전 경기를 상영한 것은 물론, 정규 시즌에도 매주 1경기씩 생중계하고 7월 6일에는 올스타전을 상영하기도 했다.
퇴근하는 지하철, 회식 도중 도망친 화장실, 사람들과 식사 자리 중 테이블 아래 사각지대. 장소가 어디든 경기가 진행 중이라면, 그곳을 야구장으로 만들어버리는 ‘야빠’ 에디터로서 이번만큼은 ‘직관’이 아닌 ‘영화관관’에 도전했다. 그렇게 호기롭게 예매 창을 열었지만, 인터파크 티켓인지 CGV인지 헷갈릴 정도로 모든 좌석은 이미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가뜩이나 일부 지점에서만 경기를 상영하는데, 지역별 인기 지점은 예매 시작과 동시에 빠르게 매진된 것이다.
빠른 매진의 이유는 영화관으로 향하는 길부터 느낄 수 있었다. 거리 곳곳에서 발견한 유니폼 입은 팬들, 야구장보다 선택의 폭이 넓고 합리적인 가격의 먹거리, 자리를 찾아가는 길에 느껴지는 떨림은 야구장 못지않았다. 하지만 관람 매너가 중요한 영화관인 만큼 분위기에 대한 걱정이 있었는데, 착석과 동시에 기우임을 깨달았다. 승리를 기원하며 부르는 라인업송, 팀 관계없이 따라 부르는 중독성 있는 선수 응원가, 역전의 순간에 기립하며 환호하는 모습까지. 편한 좌석과 쾌적한 환경에 야구장의 장점은 그대로 가져왔다. 하지만 단 하나의 단점이 있으니. 바로, 가격이다. 포스트 시즌 기준으로 야구장 외야석이 3만 원 초반대라는 걸 고려한다면, 인당 24,000원의 영화표는 마냥 저렴한 편이라 보긴 어려웠다.
서두에 언급한 천만 관중 시대를 맞아 KBO는 관련해서 다양한 설문을 진행했다. 그중 응답자의 56%가 응원팀의 성적과 관계없이 야구장을 찾는다는 내용도 있었다. 특히 그들이 야구장을 찾는 이유는 재미있는 응원 문화, 특별한 식음료, 가족·친구·연인과 함께 보내는 시간 등이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경기 자체보다는 야구장에서 겪는 추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관에서의 관람은 색다른 경험이 될 수 있다.
때로는 현실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을 때가 있다. 플레이오프 3차전 8회 솔로홈런을 쳐내며 팀을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키고, 데뷔 21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를 치른 삼성 포수 강민호. 17년의 프로 생활 동안 3번의 우승 반지를 꼈지만, 데뷔 후 처음으로 쳐낸 만루홈런이 한국시리즈 4차전 쐐기포가 된 KIA 포수 김태군. 이렇게 영화 같은 서사와 이어지는 극적인 순간에 그라운드 위로는 수많은 함성이 쏟아졌다. 그리고 비록 몸은 멀리 있지만 마음만은 함께한 팬들 또한 스크린을 향해 응원을 보냈던 러닝 타임이었다.
#김일우 에디터 – 전국~ 야구일지!
길고 길었던 2024 KBO리그가 KIA의 통합우승으로 성황리에 끝났다. ‘1년 중 가장 슬픈 날은 야구 시즌이 끝나는 날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시즌이 끝나면 괜히 마음 한편에서 공허함을 느끼곤 한다. 매년 겪고 있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이 미묘한 감정은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는다. ‘한 경기라도 더 챙겨볼걸, 직관을 많이 다닐걸’이라는 후회와 아쉬움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본 에디터는 다른 야구팬들에 비해 아쉬움이 적은 편이다. 매월 독자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한 달 평균 전국의 3~4개의 구장을 돌아다니며 취재하기 때문. 어라, 전국 야구장을 다니는 게 일이라니. 오히려 좋잖아?
보통 본지 취재는 매월 회의를 통해 코너별 선수를 정한 뒤, 소속 구단과 일정을 잡고 인터뷰이를 만나러 가는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약속 장소로 떠나기 전까지도 방심은 금물! 해당 선수에게 갑작스러운 부상 등의 이슈가 생긴다면 일정이 전면 취소되는 일이 다반사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만남이 성사됐다면 구단에서 제공된 패스권으로 일반 관객은 출입 불가능한 야구장 곳곳을 누비는 엄청난 특권을 누리곤 한다. 방문이 잦은 구단이 있다면 선수들이 오가며 간단한 안부를 물어봐 주는 건 덤이다.
광주-기아 챔피언스필드, 삼성 라이온즈파크, 창원NC파크 등 2010년대 이후 새롭게 지어진 구장의 내부 시설은 상대적으로 쾌적하게 갖춰져 있다. 선수들이 머물고 사용하는 시설은 물론이거니와 외부인과 관중을 위한 시설도 굉장히 훌륭하다. 혹서기에 진행되는 촬영 일정은 피로도가 두 배 이상으로 쌓이지만, 구단에서 귀빈실, 인터뷰실 등 최적의 촬영 환경을 제공해 준 덕분에 매월 좋은 콘텐츠가 나올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내년 초 한화생명 이글스파크 바로 옆에 지어질 예정인 ‘베이스볼 드림파크(가칭)’가 무척 기대된다.
지방 출장의 묘미는 서울역에서부터 시작된다. 여행객들 사이에 앉아 달리는 KTX 기차 안에서 창문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여행을 떠나는 것 같은 낭만이 있다. 또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면 각 지역의 맛집 투어로 일정이 시작된다. 광주송정역 근처 떡갈비 골목과 대전의 명물 성심당 방문은 필수 코스다. 이렇게 독자 여러분 덕분에(?) 호사를 누리고 있는 본 에디터는 앞으로도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양질의 콘텐츠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사는 더그아웃 매거진 2024년 164호 (12월 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홈페이지 www.dugoutmz.com
페이스북 www.facebook.com/DUGOUTMAGAZINE
인스타그램 www.instagram.com/dugout_mz
유튜브 www.youtube.com/@DUGOUTMZ
네이버TV tv.naver.com/dugoutmz
<더그아웃 매거진>은 대단한미디어가 제작, 제공하는 콘텐츠입니다.
포스트 내 모든 콘텐츠의 저작권은 대단한미디어와 표기된 각 출처에 있습니다.
잡지 기사 전문을 무단 전재, 복사, 배포하는 행위를 금하며,
적발 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