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생산기지인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앞 왕복 8차선 도로에는 ‘삼성그룹 초기업 노동조합 삼성전자 지부’ 조끼를 입은 노동조합원 수만명이 모여 있었다. 23일 오후2시부터 이들은 ‘투명하게 상한 폐지’라는 구호를 외치며 ‘2026 임금교섭 승리 파업 결의대회’에 집결했다.
집회 현장 바닥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전영현 부회장, 노태문 사장 등 경영진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노조원들은 이들의 얼굴을 짓밟으며 원색적인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또 이 회장 사진 아래에는 ‘째째용’이라는 비난 섞인 문구를 적어놓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노조와의 협상 테이블에 이 회장이 직접 나올 것을 요구하며 거친 말을 하는 이들도 눈에 띄었다. ‘관리의 삼성’으로 불리며 무노조 경영의 상징이었던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모양새다.

평택캠퍼스 8차선 도로 점거한 노조원 4만명
노조에 따르면 이날 집회 참가인원은 약 4만명이다. 이들의 안전과 치안 관리를 위해 투입된 경찰 인력은 200여명이다. 직원의 신분을 정확히 파악하지 않아 조합원 가족이나 삼성전자 소속이 아닌 이들도 다수 참가하며 예상보다 인원이 많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가 주도한 파업 결의대회로 평택캠퍼스 일대는 거대한 주차장이 됐다. 전국에서 수많은 인력이 평택캠퍼스로 몰리면서 8차선 도로는 오전부터 전면 통제됐다.
이에 따라 반도체라인 증설에 투입돼야 할 지게차와 자재차량, 통근버스가 인근 도로에 고립되기도 했다. 결의대회 현장에서 만난 한 협력사 직원은 “공사 현장 입구가 노조원들로 막혀 오늘 작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노조원의 고함 때문에 정신이 혼미하다”고 토로했다.
최승호 삼성전자 노동조합 공동투쟁본부 위원장은 '인재제일'이라는 경영원칙이 사라졌다면서 경영진을 강하게 질타했다. 그는 “경영진은 직원의 땀과 노력을 무시한 채 오직 시황만이 성과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며 “임직원을 헌신하는 주체가 아니라 단순한 숫자로만 취급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회사는 매년 위기라고 하지만 그 위기에서 삼성전자를 반도체 세계 1위 기업으로 발돋움시킨 것은 경영진이 아니다”라며 “밤을 새워 수율을 높인 주체는 파업 결의대회에 모인 조합원들”이라고 덧붙였다.
최 위원장은 '삼성전자 위기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호실적에 따른 정당한 보상을 요구했다. 또 구체적인 숫자를 거론하며 압박 수위를 높이기도 했다. 그는 “올해 영업이익을 300조원으로 가정하면 하루 수익이 1조원인 셈”이라며 “18일간의 총파업은 18조원의 공백을 의미하므로 파업으로 노동조합의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 똑똑히 보여줄 것”이라고 경고했다.
홍광흠 초기업노조 총위원장은 “외부에서는 우리의 외침을 배부른 돼지의 욕심으로 치부한다”며 “하지만 이는 글로벌 굴지의 기업을 만들어온 피와 땀,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기 위함”이라고 강조했다.

파업 위기 고조, 대화채널 복구 ‘난항’
노조는 평택캠퍼스 결의대회가 회사 측을 향한 최후통첩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영업이익의 15%를 상한선 없이 성과급으로 지급할 것을 촉구하며 총파업으로 사측을 압박하고 있다. 노사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다음 달 21일부터 6월7일까지 18일간 총파업에 돌입한다.
시장에서는 노조가 총파업을 감행할 경우 단순한 생산차질을 넘어 대형 안전사고와 인명피해 등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KB증권은 보고서에서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노조 파업이 메모리반도체 공급에 미칠 영향을 분석했다. 파업으로 메모리반도체 라인의 가동이 차질을 빚을 경우 실제 손실은 20조~30조원에 달할 것으로 봤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본부장은 “2024년 7월 파업 당시 참여 인원은 전체 노조원의 15% 수준에 그쳤으며 대체근무 등으로 시장에 미친 충격은 제한적이었다”며 “반면 이번 파업 참여 예상 인원은 3만~4만명으로 전체 노조원의 30~40% 수준이라 2년 전보다 더 큰 생산차질이 불가피하다”고 분석했다.
회사 측은 파업만큼은 반드시 막을 방침이다. 삼성전자는 노사가 힘을 합쳐 ‘반도체 골든타임’에 대응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노조가 요구하는 영업이익 15% 수준의 재원 확보와 성과급상한제 폐지는 현실적으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기류도 여전하다.
노사 간 간극이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삼성전자는 장기간 생산라인 가동 중단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목전에 두고 있다. 삼성전자는 노조의 집단행동이 격화되는 데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있다. 또 파업보다 대화를 통한 사태 해결이 우선이라는 입장이 공고한 상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 경쟁이 어느 때보다 치열한 상황에서 장기간에 걸친 생산라인 가동 중단은 기업의 생존은 물론 국가경제에도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다”며 “”회사는 열린 자세로 소통하면서 접점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임직원이 자부심을 느끼며 일할 수 있는 합리적 방안을 도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유호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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