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과 윤석열, 방구석 수재들의 정치 [뉴스룸에서]

이세영 기자 2024. 9. 26. 07: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2020년 2월13일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이 부산고등·지방검찰청을 찾아 한동훈 부산고검 차장검사와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세영 | 정치부장

사내가 웃는다. 윗분이 내민 손을 꼭 쥐고서. 입꼬리는 처졌으나 눈과 볼이 웃는다. 압권은 상대 남자의 표정이다. 굳게 다문 입 대신 안면의 잔근육이 묻고 있다. ‘내 마음, 알지?’ 애틋하다. 모르는 이가 봐도 ‘울컥함’ 같은 게 느껴진다. 조국 일가를 탈탈 털던 대검 반부패부장 한동훈이 부산고검 차장검사로 좌천된 뒤 지방 순시 온 검찰총장 윤석열을 맞는 모습이다. 2020년 2월13일, 신문은 사진 위에 ‘윤석열, ‘복심’ 한동훈과 한달 만에 재회’라는 헤드라인을 뽑아놓았다.

보스와 복심의 비장했던 브로맨스는4년이 안 돼 파국을 맞았다.지난 24일 저녁 대통령실 만찬 직후 촬영된 두 사람 모습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사진 속 윤석열 대통령은 웃고 있다. 그런데 웃는 입과 달리 하관이 눈에 띄게 굳어 있다. 고개를 외로 꼰 채 멀뚱히 서 있는 한동훈 대표는 입이 웃지만 미간과 눈매의 경직 상태가 떨떠름한 내면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말한 ‘결정적 순간’이 따로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앞 분수정원에서 열린 국민의힘 지도부 초청 만찬 뒤 한동훈 대표, 추경호 원내대표 등 국민의힘 지도부, 대통령실 참모진과 함께 산책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독대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의 만찬 회동. 친윤석열계 참석자들은 ‘만족스러웠다’고 자평했으나, 한 대표와 측근들에겐 위장의 밥알이 곤두서는 자리였을 것이다. 회동이 새로 알려준 사실은 윤 대통령이 언급한 한 대표의 섭식 취향(“우리 한 대표가 고기를 좋아해서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정도다.

시작부터 꼬였다. 한 대표가 ‘만찬 전 독대’를 요청했단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며 주인도 객도 마뜩잖은 ‘억지 밥자리’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자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드러난 한 대표의 조급성과 미숙함이다. 독대란 사정 급한 이가 누군가로부터 무엇을 얻어내려 할 때 청하는 대면 형식이다. 어렵사리 독대가 성사돼도 청을 넣은 자가 할 수 있는 건 셋뿐이다. 설득하거나, 읍소하거나, 협박하거나.

대통령의 처지와 기질상 ‘설득’이 먹힐 상황이 아니란 걸 ‘한때의 복심’이 몰랐을 리 없다. 남은 건 과감히 무르팍을 접어 충성을 서약하거나(“제가 죽을죄를….”) 테이블에 칼을 꽂는 것(“끝까지 가볼까요?”)이었다. 그런데 독대를 떠들어 청하는 순간 두번째 선택지는 소멸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읍소를 위해 공개적으로 독대를 요구하는 초식이란 정치 무협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까닭이다.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비공개 일대일 면담을 드러내어 청하는 건 ‘급’이 엇비슷한 관계에서나 통용된 방식이다. 제1야당 대표가 대통령에게 독대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게 그런 경우다. 청이 받아들여지면 이런저런 거래로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고, 거절하면 그것대로 상대의 협량함을 드러내는 공격 거리가 된다.

한 대표는 이런 정치 문법을 ‘여의도식’이라 뭉개려다 혹독한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그가 익숙한 ‘서초동 문법’에선 거물급 피의자의 이런저런 정보를 흘려 여론을 흔들고 상대를 압박하는 게 통했을 것이다. 문제는 한 대표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돌아가는 형세가 대통령을 옥죄려고 한 대표 쪽이 독대 요청을 언론에 흘린 것처럼 굳어져버렸다는 데 있다. 이쯤 됐으면 상대의 너그러움을 구해 수를 무르거나 판을 아예 포기하는 게 현명한 처신이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여당 대표의 대통령 독대 요청이 언론에 보도되면 안 되느냐”며 상대를 자극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우리가 봐온 대통령의 성정상 판을 깨지 않은 게 놀라울 정도다.

만찬이 끝난 뒤 한 대표가 정무수석에게 대통령 독대를 거듭 청했다는 사실이 배석한 측근을 통해 알려지게 만든 것도 영리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가 대통령과 단둘이 만나 하려는 말에 ‘여사 문제’가 포함된다는 사실은 한 대표 스스로 언론에 밝힌 상황이다. 반드시 해야 할 말인 건 맞지만, 그의 표현대로 ‘허심탄회한 만남’을 진심으로 성사시킬 의지가 있었다면 요청의 방식이 이번엔 달랐어야 한다. 이쯤 되면 한 대표에게 평균치만큼의 공감과 상황 복기 능력이 있는지 의심 안 할 도리가 없다.

대한민국은 지금 방구석 수재들 손에 맡겨진 정치가 국민의 삶을 얼마나 위태롭게 하는지를 온몸으로 학습하는 중이다. 이대로면 2024년 초가을 하현달 아래 펼쳐진 풀밭 위의 저녁식사가 두 남자가 함께한 최후의 만찬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monad@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