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km시승기] 온·오프로드 가리지 않고 여유롭게..지프 랭글러 사하라 파워탑
“이건 왜 이래? 지프니까. 이건 지프잖아.” 이 한 마디로 모든 의아함과 불편이 해소된다. 바로 지프니까.
브랜드의 정체성을 담은 아이코닉한 자동차는 힘이 있다. 일반 소비자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말 한마디면 불평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오랜 헤리티지를 담고 있다면 더욱 그렇다. 지프는 오프로더의 대명사로 불리는 자동차 브랜드다. 우리나라 소비자는 과거부터 SUV 형태의 차량이나 군용차를 포괄적으로 ‘찦차’라고 지칭했다.
지프의 제품 라인업 중에서도 랭글러는 지프의 역사를 관통하는 아이코닉한 모델이다. 지프 랭글러의 원형은 ‘윌리스 MB’다. 윌리스 MB는 미군이 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한 소형전술차다. 사륜구동을 기반으로 한 험지 주파 능력과 기동력은 산악지대·밀림·늪지 등 전장에서 톡톡히 제 몫을 했다.
윌리스 MB의 개발이 시작되던 시기가 1940년이다. 원형이 만들어진 이래, 시간은 84년가량 지났다. 지프 랭글러는 여전히 윌리스 MB의 DNA를 유지하고 있을까. 2023년 한 차례 부분변경을 거친 신형 지프 랭글러 사하라 파워탑을 시승했다.
시승차는 2018년 첫 출시한 4세대(JL), 그 중에서도 2023년 한 차례 부분변경을 거친 모델이다. 부분변경을 통해 나타난 외관상 변화는 전면부에 치중됐다. 지프의 상징과도 같은 7-슬롯 그릴이 대표적이다. 기존보다 테두리가 얇아지고 그릴 주변을 블랙으로 처리했다.
또한, 온로드 성향이 가미된 '사하라' 트림인 만큼 휀더를 바디컬러로 통일하고, 편리한 승하차를 위한 사이드 스텝이 적용된 점도 눈여겨 볼 디자인 요소겠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부분도 있다. 지프는 랭글러 부분변경을 통해 기존 오버랜드로 지칭한 트림명을 사하라로 재변경했다. 루비콘은 정통 오프로더 성향이 강하고, 사하라(前 오버랜드)는 온로드 성향이 더해진 트림이다.
후면 디자인의 변화는 방향지시등이다. 부분변경 이전 한국 시장에 수입된 랭글러는 한국형 주황색 방향지시등을 채택했으나, 이번 부분변경 모델은 빨간색 방향지시등을 적용했다. 주변 운전자들이 제동등으로 착각할 수 있겠다. 운전자 및 주변 운전자 모두 주의가 필요하다. 리어 범퍼 하단에는 후방 안개등이 자리한다.
실내에는 수평적인 대시보드 디자인과 함께 센터 디스플레이의 크기가 커졌다. 기존 8.4인치에서 12.3인치가 적용되며 디스플레이 활용도가 향상했다. 센터 디스플레이가 차지하는 면적이 넓어지면서, 기존 센터 디스플레이 좌우에 자리했던 원형 공조기는 디스플레이 하단으로 이동했다.
기어 변속 레버는 여전히 기계식이다. 전자식 기어 변속 시스템(SBW) 채택이 자동차 업계 트렌드지만 랭글러에는 이게 어울린다. 기어 레버 상단에는 윌리스 MB 디자인을 담아 지프 특유의 감성을 자극한다. 안전사양도 강화했다. 1·2열 사이드 커튼 에어백이 추가됐다.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내 '컴포트' 메뉴에서 세부적인 공조 컨트롤이 가능하지만 사용할 일은 거의 없다. 디스플레이 하단에 물리 버튼을 대거 탑재한 덕이다. 운전석 및 동승석 온도 조절은 물론 풍량 조절, 풍향 조절, 열선 시트 등 웬만한 기능은 모두 물리 버튼으로 작동할 수 있다.
최근 신차는 물리 버튼을 대거 센터 디스플레이에 통합하는 추세다. 시승 중 직관적인 물리 버튼에서 나오는 편의성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각종 미디어 및 공조장치 조작부 하단으로는 윈도우 버튼, 12V 시거잭, USB A타입 및 C타입 포트가 각각 1개씩 마련돼 있다.
일반적으로 도어 트림에 위치 윈도우 버튼은 센터페시아에 있다. 랭글러는 '오프로더'이기 때문이다. 언제든지 도어를 때어낼 수 있다. 사고 수리 및 부품 교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다. 도어를 떼어내면 자동차에서 버기카로 장르가 뒤바뀐다.
12.3인치 센터 디스플레이를 탑재하면서 인포테인먼트 시스템도 Uconnect 5로 업그레이드됐다. 안드로이드 오토·애플 카플레이 등 스마트폰 무선 미러링을 지원한다. 한국 시장에 맞게 TMAP 내비게이션을 순정 사양으로 제공하기 시작했다. 기존 지프의 내비게이션은 인터페이스와 경로 안내가 투박해 사용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군용 지도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이번에 새로 도입된 TMAP 내비게이션은 스마트폰용 TMAP과 인터페이스를 공유한다. 또한, 단순히 센터 디스플레이에서 TMAP 내비게이션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치지 않고 계기판을 통해 경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아쉬운 점은 TMAP 내비게이션 사용에 스마트폰 미러링이 전제된다는 점이다. 기자가 시승 차량을 픽업했을 당시, TMAP 내비게이션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TMAP 업데이트 탓이었다.
TMAP 업데이트는 차량 자체 네트워킹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업데이트를 위해 운전자는 스마트폰에 '스텔란티스 컴패니언 앱'을 설치한 뒤, 스마트폰 미러링을 통해 한 차례 업데이트를 진행해야 한다.
의외인 점은 1열 운전석과 동승석에 전동 시트가 적용된 점이다. 모든 것이 수동이었던 지프 랭글러에 낯선 신문물이다. 아직까지 열선 시트만 존재할 뿐 통풍 시트 옵션은 없다.
요즘처럼 폭염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오프로드 주행을 마치고 차량에 탑승했을 때, 통풍 시트는 운전자 및 동승자의 편의를 증진시켜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향후 5세대 완전변경 시, 추가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2열 탑승객에 대한 배려는 좋다. 무릎 공간과 머리 공간에 주먹 두 개씩 들어가고 남는다. 3010mm의 넉넉한 휠베이스와 1855mm의 높은 전고 덕이다. 2열 탑승객을 위한 USB C타입 및 A타입 포트 각각 2개씩 마련했으며, 파워 아울렛까지 제공한다.
아쉬운 점은 2열 시트 리클라이닝이 불가하다는 점이다. 2열 탑승객은 꽤 꼿꼿한 자세로 이동해야 한다. 장거리 주행 시 흠이다. 지프 특유의 휠하우스 디자인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캔버스 소재의 파워탑은 닫혔을 때에도 상당한 외부 소음이 유입된다. 특히 터널에 들어가면 운전자와 동승석 탑승자 사이 소통마저 어려워진다. 터널만 들어갔다 나오면 귀가 먹먹할 지경이다.
하지만, 그런 불쾌함은 파워탑 개방과 함께 날아간다. 파워탑은 버튼만 누르면 전동식으로 개폐된다. 여닫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20초가량이며, 98km/h 미만의 속도로 달릴 때에도 여닫을 수 있다. 개방 면적은 뒷좌석 끝까지다. 사실상 카브리올레 수준의 개방감을 만들어낸다.
아쉬운 점은 파워탑을 열고 달릴 때 2열 탑승객에게 전달되는 바람의 양이다. 1열 탑승객의 경우, 전면 유리를 통해 바람이 매끄럽게 넘어가지만, 2열 탑승객에게는 강한 바람이 지속적으로 전달된다. 별도의 윈드 디플렉터가 없어 생긴 불상사다. 4명이 모두 적당한 바람과 개방감을 느끼려면 속도를 늦춰 달리는 편이 좋겠다.
트렁크에 별도 스페어 휠·타이어를 적재한 만큼 트렁크는 옆으로 개폐된다. 작은 짐을 넣고 뺄 때, 각도를 세밀하게 조절할 수 있어 의외로 편리하다. 트렁크에 탑재된 알파인 사운드 시스템은 트렁크 공간에 소폭 손해를 끼치지만 랭글러 사하라 파워탑에 최적화된 소리를 내준다.
캔버스 소재 파워탑 특성상 외부 소음 유입이 하드탑에 비해 큰 편이다. 이에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음악 소리도 묻히기 쉽다. 때문에 알파인 사운드 시스템은 공간감 있는 사운드를 만드는 쪽보다 저음 위주의 존재감 있는 사운드를 내는 쪽으로 튜닝됐다.
네모 반듯한 차체 형상 덕에 랭글러 사하라 파워탑의 트렁크 용량은 넉넉하다. 기본 897L, 2열 시트까지 눕힐 경우 2050L까지 확장된다. 특히 2열 시트는 다이브 기능을 지원해 완벽에 가까운 평탄화를 보여준다. 또한, 전고가 높아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을 수 있다. 차박에 최적이다.
파워트레인은 2.0L 터보 엔진과 ZF 8단 자동변속기 조합이다. 최고출력 272마력, 최대토크 40.8kg.m를 발휘한다. '공차중량 2085kg의 거구를 2.0L 터보 엔진만으로 여유롭게 굴릴 수 있을까'하는 의심은 필요없는 걱정이었다.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으면 생각했던 것보다 시원스런 가속 감각을 보여준다.
140km/h까지 거침없이 가속한다. 그러나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발에 힘이 자연스레 풀린다. 높은 전고, 다소 헐렁하게 세팅된 스티어링 휠 감각, 가감없이 유입되는 외부 소음 등에서 발생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온로드 주행 시, 주행 감각은 부드럽다. 잔요철을 거르는 능력은 다소 부족하다. 필터링 없이 탑승객에게 충격을 전달한다. 반면, 과속방지턱과 같은 큰 요철을 처리하는 능력이 뛰어난 편이다. 웬만한 과속방지턱은 50km/h 이상으로 넘어도 부드럽다.
사하라 트림은 온로드 성향이 가미된 트림안 만큼 루비콘 트림과 오프로드 기능 면에서 차이가 존재한다. 루비콘 트림은 디퍼렌셜 잠금장치와 스웨이 바 분리 기능을 갖춘 락-트랙 4WD 시스템, 오프로드 전용 타이어를 탑재한다.
반면, 사하라 트림은 셀렉-트랙(Selec-Trac) 4WD 시스템과 온로드 타이어가 적용된다. 다만, 정통 오프로더, 랭글러의 핏줄은 그대로 공유한다. 크고 작은 비가 잦게 내리는 요즘 같은 날씨에 땅은 진흙밭이었다. 오프로드에 들어서기 전 기어를 중립에 물린 뒤, 2WD에서 '4WD 오토'로 기어를 옮겼다.
곧 계기판 상에서 4WD 기어가 체결됐음을 알린다. 4WD 오토는 차량이 능동적으로 사륜구동 제어에 개입한다. 가속페달을 밟으면 매끄럽게 진흙밭을 주파한다. 노면 굴곡을 따라 차체가 좌우로 흔들릴 뿐, 타이어는 헛도는 일 없이 평온하게 진흙밭을 빠져나온다.
정통 오프로더지만 2024년 출시한 최신차답게 능동형 안전장비를 일부 탑재했다. 전방 추돌 경고,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 사각지대 모니터링, 후방교행 모니터링 기능이다.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은 선행 차량을 인식해 차간 거리를 알아서 조절한다. 선행 차량이 정차하면 따라 멈추지만 그뿐이다.정차 후 선행 차량이 3초 이상 출발하지 않으면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은 해제된다. 운전자는 재출발 후 약 25km/h를 넘어서야 다시 이를 활성화할 수 있다.
500km의 시승 동안 평균 연비는 7.7km/L를 기록했다. 복합 연비 8.0km/L에 소폭 미치지 못하는 기록이지만, 시승 도중 촬영 등을 위해 공회전했던 시간이 길었던 걸 감안하면, 일상적으로 주행했을 때 복합 연비를 손쉽게 넘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지프 랭글러 사하라 파워탑은 부분변경으로 기존 아쉬웠던 점을 모두 개선했다. 불편했던 순정 내비게이션, 최신 모델에 어울리지 않는 8.4인치 센터 디스플레이 등이 대표적이다. 승차감을 비롯한 주행 성능은 온로드와 오프로드 환경을 가리지 않고 준수하다.
여전히 편의사양 및 첨단 운전자 보조 기능에서 대중적인 자동차에 비해 부족한 모습을 보이지만, '정통 오프로더'라는 특성을 고려하면 더 이상 개선할 수 있는 여지를 찾기 힘들다.
브랜드의 정체성을 담은 아이코닉한 자동차가 가진 힘이란 이런 게 아닐까. 일반 소비자가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말 한마디면 불평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한 줄 평
장 점: 온로드·오프로드 가리지 않는 전천후 오프로더..카브리올레 감각까지
단 점: 두 얼굴의 파워탑..하드탑 모델이 답일지도
서동민 에디터 dm.seo@cargu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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