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빈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또 한 번 문을 열었다. 32강 첫판에서 대만의 황이화를 3-1로 제압하는 과정은 스코어만큼이나 내용이 단단했다. 초반 두 게임을 11-5, 11-7로 가져갈 때는 리시브 첫 터치와 3구 전개가 깔끔했다. 황이화의 길게 깔리는 리시브에 포핸드 라인 드라이브를 과감히 집어넣고, 백사이드 각을 찢는 카운터로 호흡을 끊으니 랠리가 길어져도 주도권이 흔들리지 않았다. 3게임을 듀스 끝에 10-12로 내준 뒤 4게임에서 11-3으로 급정리한 장면은 이 선수의 요즘 컨디션을 설명한다. 필요한 순간 구질을 바꾸고, 템포를 올려 승부를 닫는 ‘마무리 능력’이 체계적으로 올라왔다.

대회 구도 역시 신유빈에게 우호적이다. 중국 톱 랭커들이 빠진 챔피언스 프랑크푸르트는 단판의 변수가 커진 대신, 초구 주도권과 상황판단이 좋은 선수에게 기회가 커진다. 16강 상대가 개최국의 니나 미텔헴이라는 점도 기술보다 ‘현장 분위기’가 변수다. 홈 관중의 에너지가 초반 러시로 번질 수 있지만, 오늘처럼 첫 세트부터 리시브로 길이를 통제하고 서브 구질을 빠르게 교차하면 관중 소음을 경기 리듬 밖으로 밀어낼 수 있다. 특히 미텔헴은 중장거리 랠리에서 백핸드 블록으로 시간을 벌며 역습을 노리는 타입인데, 포핸드 강도만으로 밀어붙이기보다 백라인 짧은 볼과 몸통 겨냥 반박자를 섞어야 노림수를 무너뜨릴 수 있다.

이번 대회에서 신유빈의 최대 무기는 ‘첫 볼’의 질과 ‘두 번째 선택’의 정확성이다. 몽펠리에에서 천이를 꺾을 때도 그랬지만, 리시브를 길게만 두지 않고 짧·길이를 섞어 상대의 스윙 시작점을 흔드는 순간 경기는 편해진다. 이어지는 3구에서 포를 고집하지 않고 백사이드 카운터로 각을 닫아주는 선택이 더해지면, 상대는 라켓 각을 한 번 더 바꿔야 하기에 결정타 확률이 올라간다. 오늘 4게임이 그 해답이었다. 리듬을 잡고, 상대를 기다리게 만들고, 여지를 주지 않고 끝낸다. 큰 대회에서 이보다 믿음직한 루틴은 없다.

토너먼트 전망을 놓고 보면, 8강에서 일본의 오도 사쓰키와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오도는 백핸드 체인지업이 날카롭고, 짧은 볼 처리 정확도로 장점-단점을 숨기지 않는다. 이 매치업에선 초반부터 백사이드 길게-짧게를 섞는 서브 패턴과, 리시브에서의 ‘푸시 페인트→들어가서 걸기’가 관건이다. 랠리 중반이 길어질수록 오도의 안정감이 살아나니, 신유빈 특유의 한 박자 빠른 포핸드 개시가 승부의 문을 연다. 준결승 라운드까지 시야를 넓히면 일본 빅4의 벽을 연속으로 넘어야 하는 시나리오가 보이는데, 최근 두 대회 연속 4강의 흐름, 그리고 듀스·클러치에서의 세밀함을 감안하면 ‘또 하나의 4강’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달라진 건 멘털의 결이다. 예전 같으면 3게임의 미스가 4게임 초반까지 번졌을 실수를, 오늘은 한 세트 내에서 절연하고 다음 세트에선 아예 다른 경기로 만든다. 이 축적된 경험치는 랭킹 포인트 이상의 자산이다. 단판 토너먼트에서 가장 비싼 능력은 ‘흐름을 멈추는 한 포인트’와 ‘기세를 옮기는 첫 두 포인트’를 만드는 기술인데, 지금의 신유빈은 이 둘을 거의 습관처럼 꺼내온다.

프랑크푸르트의 밤이 길어질수록 관중의 호흡, 리듬, 변수는 커진다. 그러나 오늘처럼 초구의 정확성과 3구의 담대함, 세트 간 전환 속도를 유지한다면 상대가 바꾸기 전에 본인이 먼저 바꿔버리는 경기를 계속 만들 수 있다. 챔피언스는 실수의 여지가 적은 무대지만, 동시에 완성된 루틴을 가진 선수에게 가장 보답이 빠른 무대다. 지금의 신유빈은 그 루틴을 갖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한두 포인트에서의 인내와 결승을 향한 상상력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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