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적인 땅을 달리는 이국적인 자동차. 새로운 심장을 이식한 플라잉스퍼를 타고 광활한 애리조나의 붉은 사막을 질주했다
"얼마 전 , 출장으로 이곳에 온 적 있습니다. 그때 다짐했죠. 언젠가 꼭 벤틀리를 타고 멋진 풍경을 감상하며 달리겠다고 말이죠."
지난 11월 11일 미국에서 글로벌 미디어 시승 행사를 기획한 웨인 브루스 벤틀리 커뮤니케이션 총괄이 건넨 말이다. 도대체 얼마나 인상적이었길래 세계 각지를 누볐을 그가 이토록 감명받았을까? 대자연과는 딱히 친하진 않지만, 그의 말에 내심 기대를 품었다. 한국에서 15시간, 비행기를 두 번 타고 날아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곳, 미국 애리조나주에 도착했다. 여기서 4세대로 거듭난 플라잉스퍼를 마주할 계획이다.
"서울에서 오셨죠? 호텔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피닉스 공항에 내리자 멀끔한 양복으로 차려입은 수행 기사가 맞이한다. 그는 벤틀리 벤테이가를 타고 나를 데리러 왔다. 이역만리 미국에서 벤테이가 쇼퍼라니…. 재벌이라도 된 기분에 솟아오르는 광대와 어깨를 억누르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공항을 떠난 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차창 밖으로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붉은 모래와 키 낮은 흙색 건물, 그리고 선인장으로 뒤덮인 산. 애리조나는 외국인이 즐겨 찾는 관광지는 아니다. 대신 미국인 사이에는 드라이브 코스와 휴양지로 유명하다. 특히 선인장으로 유명한데, 피닉스 지역에는 사람 키 2~3배를 훌쩍 넘는 선인장들이 지천에 널렸다. "눈으로만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혹시라도 선인장을 훼손하면 감옥에서 25년을 보내야 할 수도 있거든요." 감정 변화 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는 수행 기사의 말을 되새기며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고 다짐하는 사이, 피닉스 시내에서 한 시간 떨어진 스코츠데일의 한 호텔에 도착했다. 이곳은 건물조차 이국적이다. 1~2층짜리 바위 색 건물들이 선인장과 어우러졌다. 호텔에 들어서니 마치 겨울을 맞이한 샤이어(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주인공 호빗 일당이 사는 작은 마을)에 방문한 기분이다. 1박 숙박비를 언뜻 듣고는 1분 1초라도 시설을 즐겨야겠다 싶었는데, 비행 피로에 지친 나는 저녁 만찬 후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보랏빛 하늘과 지저귀는 새 소리에 자연스레 눈을 떴다. 시간 맞춰 로비로 나가니 형형색색 플라잉스퍼가 모여있다. 세련된 도시 분위기와 어울리는 벤틀리가 사막을 테마로 삼은 호텔 로비에 서있는 모습은 언뜻 현실 감각이 떨어진다. 그래도 화려한 색상 덕분에 의외로 잘 어울렸다. 개인적으로 신형 플라잉스퍼를 처음 마주했지만, 사실 이미 한국 땅을 밟은 차다. 지난 9월 벤틀리모터스코리아가 4세대 신차를 우리나라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한 까닭이다. 알 수 없는 자부심을 품은 채 차에 올랐다. 벤틀리는 신형 플라잉스퍼를 4세대라고 말한다. 하지만 겉모습은 아무리 봐도 3세대 부분변경 모델이다. 심지어 실내까지 거의 그대로다. 핵심은 새로운 파워트레인. 지난달 일본 마가리가와 클럽에서 만난 컨티넨탈 GT와 같은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파워트레인을 얹었다. 전동화 파워트레인을 얹었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배기량과 실린더 개수를 줄이진 않았다 (안타깝게도 W12 엔진은 단종했지만). V8 엔진은 기존보다 50마력 높은 최고출력 600마력을 내고, 여기에 전기모터가 190마력을 더해 시스템출력 782마력을 발휘한다. 출력 앞 자릿수가 두 번이나 뛴 덕분인지, 벤틀리는 4세대 플라잉스퍼를 ‘4도어 슈퍼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케팅 측면으로 보나, 팬심으로 보나 잘 지은 별명이라는 생각이다.
시승 코스는 스코츠데일에서 휴양도시 세도나(기아가 카니발 수출명으로 쓰던 그 도시다)로 향하는 200km 구간이다. 시작은 전기 모드. 이제는 시동을 켜면 엔진 대신 전기모터(또는 하이브리드 모드)가 운전자를 맞이한다. 평화로운 호텔 로비를 아무런 소음을 내지 않고 유유히 떠나는 모습에 벤틀리다운 품격이 돋보인다. 시원하게 속도를 높여 봐도 전기모터 구동 소음은 물론 풍절음 하나 없이 고요한 사막을 헤쳐나간다. 전기모터는 최고출력 190마력, 최대토크 45.8kg·m 힘을 내, 일상 주행 대부분은 전기만으로 거뜬하다. 시속 140km까지 엔진을 깨우지 않아 배터리 전력만 충분하다면 전기차처럼 탈 수 있다. 배터리 용량은 25.9kWh. PHEV 치고 제법 크다. 차체 무게가 많이 늘었어도(2.6t이 넘는다) 넉넉한 용량 덕분에 1회 충전 주행가능거리는 유럽 WLTP 기준 76km다. 실제로 80km를 달리고 나서야 배터리가 바닥났다.
전기모터와 궁합이 좋은 차체는 제아무리 속도를 높여도 침착하다. 새로운 2챔버 에어서스펜션은 댐퍼 작동 범위를 늘려 노면 상황에 따라 때로는 더 부드럽게, 때로는 더 단단하게 대응한다. 다만 기본 설정인 ‘B 모드’나 ‘컴포트’에서도 물침대 같은 움직임과는 거리다 멀다. 벤틀리는 기본적으로 운동 성능을 중시하는 브랜드다(배기음부터 V8 슈퍼카 그 자체다). 3세대 플라잉스퍼를 탔을 때도 보통 고급 세단과는 다르다는 결론을 내렸다. 4세대 역시 마찬가지다. 프리미엄 브랜드보다 호화스러우면서 동시에 롤스로이스나 메르세데스-마이바흐가 넘볼 수 없는 활기찬 운동 성능을 고집한다. 어떤 브랜드도 대체할 수 없는 독보적인 특성이다. 같은 풍경을 계속 보면 질릴 법한데, 마성의 애리조나는 시시각각 주변 환경이 바뀌어 지루할 틈이 없다. 때로는 서부극 같은, 때로는 <분노의 질주 7> 마지막 장면 같은, 때로는 화성 같은 바탕화면이 10분 단위로 펼쳐진다. 유럽 풍경과는 결이 많이 다르다. 우선 도로 너비가 널찍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직선로가 나오면 782마력을 모두 쏟아내도 부담 없다. 이국적인 풍경의 또 다른 요소는 식생이다. 한국과 유럽에서 본 적 없는 식물과 토양이 펼쳐져 지구가 아닌 행성을 보는 듯했다.
목적지를 30분 남기고 가파른 굽잇길이 나타났다. 본능적으로 스포츠 모드를 넣고 스티어링휠을 꽉 쥐었다. 신형 플라잉스퍼는 ‘4도어 슈퍼카’라는 별명에 걸맞게 첨단 차체 제어 장치가 많다. 좁은 코너에서는 뒷바퀴가 앞바퀴와 반대 방향으로 회전해 회전각을 크게 줄인다. 마치 준중형 스포츠카처럼 유연한 몸놀림이다. 빠른 속도로 코너를 탈출할 때도 안정적이다. 전자식 차동제한장치(eLSD)가 언더스티어를 강하게 억제하고 차체를 코너 쪽으로 밀어 넣는 덕분이다. 막연히 앞머리가 무겁다고 예상했는데, 사실은 달랐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얹으면서 앞뒤 무게 배분을 48.3:51.7로 맞췄다. 엄청난 무게에도 불구하고 앞바퀴가 방향을 트는 움직임이 상쾌한 이유다.
풍경에 취해 달리다 보니 어느덧 세도나에 도착했다. 수억 년 세월을 품은 거대한 붉은 바위산 앞에서, 나란 존재가 한없이 작고 보잘것없게 느껴졌다. 우리는 영겁의 시간 속에 찰나를 살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살기 위해 즐기고 노력한다. 낯선 땅에서 새로운 심장을 받아들인 플라잉스퍼를 감상하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이브리드? 전동화? 다음은 뭐지? 그러다 문득 기존 순수 내연기관의 다음 단계가 궁금했다. “아마도 벤틀리에서는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컨티넨탈 GT와 플라잉스퍼 제품 개발을 지휘한 대런이 말했다. “신형 플라잉스퍼는 V8과 W12를 모두 대체하는 모델이죠. 이후로 내놓을 차는 아마 100% 전기로만 달릴 겁니다.” 2세기에 걸친 내연기관의 역사도 어떤 관점에서는 찰나의 순간일 터다.
어느덧 시승을 마치고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 다가왔다. 이국적인 풍경에 오래 노출된 탓인지, 현실로 돌아오는 길이 낯설다. 숙소에 도착해 카메라 앨범을 열었다. 새로 담은 사진들은 그간 찍었던 모습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색적인 색감과 풍경에 질투를 느낄 정도다. 다시 이곳을 방문할 일이 있을까? 그나마 고국에서 플라잉스퍼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도로 위에서 마주한 플라잉스퍼는 나를 이날의 애리조나로 데려다줄 터다.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던가. 애리조나에서 만난 플라잉스퍼는 찰나의 시승이 아닌, 내게 영원한 기억으로 남을 하나의 장면을 새겼다.
글 권지용 사진 권지용, 벤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