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트의 세계로

서울문화사 2024. 10. 1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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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벡 10년은 대표적인 피티드 위스키다. 라벨에 ‘궁극적인’이라고 써놓으며 자신감도 내비친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런 마음으로 한 모금 넘겼다. 낯선 소독약 냄새를 지나치자 코와 혀, 날숨 속에 다채로운 풍미가 들고 났다. 신세계였다.

아드벡 10년

카테고리-싱글 몰트위스키

용량-700mL

테이스팅 노트-토피, 꿀, 바닐라, 후추

가격-10만원대

전설의 성궤를 여는 기분이다. 아드벡 10년을 담은 박스는, 그만큼 고전적이면서 중후하다. 중세 유럽의 엄숙한 수도원이 떠오르는 무채색을 둘렀다. 가벼운 마음으로 열면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묘한 문양도 품었다. 비밀을 간직한 문을 여는 마음으로 아드벡 10년의 박스를 개봉했다. 고작 위스키 박스 여는 것뿐인데 웬 호들갑이냐고? 아드벡이 이룬 상징성 때문이다. 박스를 여는 행위부터 마음가짐이 달라질 수 있다. 아드벡은 라프로익, 라가불린과 함께 3대 피티드 위스키로 불린다. 그중에서도 아드벡은 피트 풍미가 가장 강렬한 위스키로 통한다. 피트 강도를 표현한 PPM 역시 아드벡이 가장 높다. 그래서일까. 피트, 피트, 피트 그중에 제일은 아드벡이라. 뭐 이런 구절이 들리는 듯도 하다. 강렬한 무언가를 앞에 두면 짐짓 장엄해지는 기분이 들잖나. 아드벡 10년을 앞에 두고 그랬다.

꼭 과장만은 아니다. 싱글 몰트위스키에서 피트 풍미는 금단의 선 같은 존재다. 넘어서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선. 또 다른 세계의 경계랄까. 호불호가 강한 만큼 넘었을 때 확장하는 세계도 넓다. 물론 피트 풍미가 맞지 않으면 멀리하면 그만이다. 세상에 위스키는 많다. 화사하고 산뜻한 셰리 계열만 찾아 마셔도 한평생 흘러갈지 모른다. 그럼에도 못내 아쉽다. 싱글 몰트위스키라는 세계에서 영원히 닿지 못할 섬이 생기는 셈이니까. 아드벡 10년을 꺼내는 행위는 그 가능성을 가늠하겠다는 뜻이다. 엄숙해진다.

아드벡 10년의 병 역시 박스에서 풍긴 인상을 이어간다. 주술사의 약병처럼 오묘한 녹색 병이다. 게다가 아드벡의 ‘A’를 독특한 문양으로 표현했다. 확실히 박스부터 병까지 화사한 느낌은 아니다. 라벨을 살펴보자. 금장 필기체로 ‘궁극적인(The Ultimate)’이라고 써놓았다. 굉장한 자신감이다. 뭐가 궁극적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무게감이 전해진다. 아마 피트 풍미라고 추측할 뿐이다. 라벨 하단에 적힌 문구에서도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바다(Sea), 타르(Tarry), 연기(Smoky). 각각 거친 심상이 밀려온다. 확실히 가벼운 마음으로 뚜껑을 열긴 힘들다. 그럼에도 아드벡 10년에 담긴 세 단어의 풍미가 궁금해졌다. 원래 호기심은 그 무엇보다 강하니까. 뚜껑을 열자 경쾌한 소리가 났다. 드디어 한발을 내디뎠다.

소독약과 꿀

아드벡 10년을 잔에 따랐다. 병의 오묘한 녹색과 달리 실제 아드벡 10년은 옅은 노란색이다. 생각보다 연한 느낌인데? 잔을 흔들어 위스키가 잔을 타고 흘러내리는 자국도 봤다. 점도 높은 끈적임은 없다. 잔에서 찰랑이는 느낌도 가볍다. 10년이라서 그렇겠지. 잔에 담긴 아드벡 10년은 박스와 병에서 느낀 묵직함과는 달랐다. 하지만 잔을 코에 대자 훅, 소독약 냄새가 났다. 이것이 피트의 관문인가. 누구나 처음 맡으면 흠칫 놀랄 향이다. 여기서 멈출 순 없다. 경계를 넘으려면 도전 정신이 필요하다. 다시 잔에 코를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길고 천천히 제대로 느껴보겠다는 마음으로. 역시 병원 풍경이 떠오르는 소독약 냄새가 밀려왔다. 대신 최신 병원이 아닌 오래된 병원 풍경으로 바뀌었다. 향의 질감이 조금 풍성해졌달까. 여기서 끝인가 싶었는데 갑자기, 확연히 다른 성질의 향이 지배했다. 느닷없지만 달콤한 향이다. 상충하는 두 향이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코를 채웠다. 채찍과 당근인가.

예상치 못한 향의 조합에 맛이 더 궁금해졌다. 기대하면서 첫 모금을 넘겼다. 찌릿한 번개가 혀를 관통했다. 자욱한 연기의 매캐한 맛인가 싶더니 생나무의 매운맛으로 번졌다. 혀가 떫을 정도로 매콤해 강렬했다. 찌릿한 매운맛은 목을 타고 복부까지 이어졌다. 무언가 호되게 당한 기분이다. 어리둥절하며 매운맛이 가시길 기다렸다. 그러자 느닷없이 새로운 맛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꿀? 얼얼해진 입안을 달콤함이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고통을 이겨낸 보상인가. 향을 맡았을 때와 비슷한 감흥이 맛에도 이어졌다. 맛의 여운을 마저 음미하기 위해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또 다른 풍미가 밀려왔다. 이번에는 소독약도 달콤함도 아니었다. 이끼와 흙 같은 축축한 대지가 떠올랐다. 소독약으로 통하는 페놀이 아닌 다른 피트 풍미가 이런 건가 싶었다. 여운은 복잡하고 풍성했다. 심지어 구수한 맛까지 감돌았다. 아드벡 10년은 첫 모금부터 많은 걸 꺼내 보여줬다. 다음 모금에서 더 많은 걸 느끼게 해줄 거라는 기대도 생겼다. ‘궁극적인’이라는 주장에 설득당하기 시작했다.

자연의 맛

이번에는 안주와 함께 마셔봤다. 준비한 안주는 초콜릿, 캐슈너트, 치즈 육포. 초콜릿은 먹기 전부터 안 어울릴 줄 알았다. 이미 아드벡 10년은 그 자체로 충분히 달콤하니까. 아드벡 10년을 달콤하다고 평할지 미처 몰랐는데, 분명히 달콤하다. 여러 잔 마실수록 그 특징이 확연히 드러났다. 그래서인지 초콜릿의 달콤함은 맛을 증폭하기보다 덮어버렸다. 몇 개 곁들이다가 말았다. 다음은 캐슈너트. 고소함은 아드벡 10년과 어울렸다. 매운맛을 중화하기도, 흙의 풍미와 연결돼 감흥을 높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최적의 안주라고 하기엔 어딘가 아쉬웠다.

이런 아쉬움은 치즈 육포와 함께 마시자 말끔히 사라졌다. 아드벡 10년과 치즈 육포의 조합은 근사했다. 육포 자체가 스모키 풍미를 품었잖나. 아드벡 10년의 매캐한 맛과 자연스레 어울려 풍미를 증폭했다. 짭조름한 맛도 날숨에 묻어나는 피트 풍미와 어울렸다. 연기와 흙의 풍미가 어우러져 서부의 황야를 펼쳐 보인달까. 모닥불 앞에서 육포를 뜯으며 동료에게 “아드벡?” 하고 권유하는 모습. 엄밀히 말하면 아드벡 10년의 피트 풍미는 황야가 아닌 젖은 땅의 습한 흙에 더 가깝다. 그럼에도 치즈 육포를 곁들이니 스모키 풍미가 증폭해 서부를 떠올리게 한다. 스코틀랜드 아일라섬에서 생산한 위스키가 서부의 황야를 떠올리게 하다니.

다음 날 마시니 또 새로웠다. 처음에 느낀 낯선 소독약 냄새는 어느새 자연의 향으로 다가왔다. 진흙과 이끼, 진창이나 촉촉하게 젖은 숲의 향이 코를 채웠다. 마시고 난 후의 풍미가 알고 보니 처음 맡은 향에도 담겨 있었다. 첫날은 미처 몰랐는데 이젠 확연히 도드라졌다. 매캐하고 매운 강렬함은 여전했다. 그 사이에서 짭조름한 맛도 스몄다. 새롭게 다가온 맛이다. 날숨으로 나오는 풍미도 더욱 풍부해졌다. 풀과 약초의 싱그러움부터 흙 내음, 달콤함이 깃든 구수함까지. 이래서 곱씹으면서 마시면 위스키가 재밌다. 아드벡 10년의 다층적인 맛은 그 재미를 한층 높인다. 아직 숨은 맛이 더 있을 테니 더욱. 그리고 내겐 아직 아드벡 10년이 반병이나 남았으니까.

Editor : 김종훈 | Photographer : 박원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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