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상의 자격' 그리고 '토트넘 앞 손흥민 동상'의 가능성

갑자기 '손흥민 동상'이 화두로 떠올랐다. 왜?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2025년 9월 9일이었다.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 옆 릴리화이트 하우스에서 팬 자문위원회가 열렸다. 팬들 그룹 대표로 9명이 나섰다. 구단에서는 비나이 벤카테샴 CEO 등 4명이 나왔다.

동상 건립 추진에 대한 의제가 있었다. 회의를 정리한 공식 문서를 보자.

10. 유산(Heritage)
a. 동상(Statues)
• 구단과 FAB(팬자문위원회)는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 주변에, 구단 역사에서 핵심 인물들을 기리기 위한 동상을 조성하는 아이디어에 대해 논의했다.
• 구단은 이 사안을 검토 중이며 가능한 한 이른 시기에 FAB에 업데이트를 제공할 것이다.
조치(Action): 구단은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의 동상 관련 사안에 대해, 다음 회의에서 FAB에 업데이트를 제공하고, 누구를 기릴지에 대해 팬들과 협의하는 방안도 포함하여 보고할 것.



동상을 세우겠다는 뜻을 밝혔고, 팬들 역시 긍정적이었다. 10월 중순 뒤늦게 보도됐다. 손흥민도 동상의 멤버가 될 수 있을 지가 관심사로 떠올랐다.

맷 버스비 감독의 동상

#동상의 자격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 20개 구단의 동상 보유 상황을 살펴봤다. 총 37명의 인물이 동상으로 세워졌다. 아스널이 6명으로 가장 많다. 맨유가 5명, 에버턴이 4명이다. 리버풀은 3명의 동상이 있다.

구장에 동상이 없는 프리미어리그 구단은 토트넘을 비롯해 본머스, 브렌트퍼드, 브라이턴, 번리, 크리스탈팰리스 등 6개 구단이다. 에버턴의 경우 올 시즌 새구장으로 옮겼다. 기존 구장인 구디슨 파크에 있는 동상을 새 구장으로 이전할 계획이다.

조지 베스트-데니스 로-보비 찰튼 동상
알렉스 퍼거슨 감독 동상

동상이 세워진 37명의 면면을 보면 크게 세가지 특징이 있다.

첫번째 전설적 업적을 남긴 선수와 감독이다.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을 비롯해 아르센 벵거 아스널 감독, 빌 샹클리 리버풀 감독, 맷 버스비 맨유 감독 등이 동상으로 세워져있다. 선수들 역시 대단하다. 1927년 시즌 에버턴 소속으로 단일 시즌 60골을 넣은 딕시 딘을 필두로 1950년대와 60년대 풀럼을 이끌었던 조니 헤인스, 봅 페이즐리 감독과 리버풀의 전성기를 이끈 엠린 휴즈, 맨유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지 베스트와 데니스 로 그리고 보비 찰턴 등이 동상으로 남아 팬들을 만나고 있다.

빌 샹클리 리버풀 감독
봅 페이즐리 감독과 엠린 휴즈

두번째 2000년대 들어 동상 제작 붐이 일었다. 첫 시작은 울버햄턴이었다.

1996년 빌리 라이트의 동상을 구장 밖에 세웠다. 라이트는 1939년부터 1959년까지 울버햄턴에서 뛰었다. 1949년 FA컵 우승, 1954년, 1958년, 1959년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울버햄턴이 발빠르게 동상을 세웠고 이가 잉글랜드 클럽 최초의 인물 동상이었다. 몇 달 후 맨유가 맷 버스비 감독의 동상을 세우며 따라왔다. 이후 2001년 스토크시티와 에버턴이 각각 스탠리 매튜스와 딕시 딘의 동상을 만들었고 전 구단으로 퍼져나갔다.

동상 제작 붐은 구장 재개발과 맞물린다. 1990년대 힐스버러 참사 이후 각 구단들은 새 경기장을 건설하거나 리모델링을 시도했다. 입석이 사라지고 좌석이 등장했다. 구단 입장에서는 과거 역사와의 단절이 걱정됐다. 구단의 역사를 물리적으로 고정시키는 장치가 필요했다. 이것이 바로 동상이었다.

동시에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했다. 이에 맞춰 각 구단은 브랜드 자산이 필요했다. 레전드는 최고의 브랜드 자산이었다. 그를 보고 만질 수 있는 동상이 제격이었다.

빌리 라이트

세번째 대부분 은퇴했거나 사망한 인물들이다.

37명 중 현역 시절 동상이 세워진 인물은 티에리 앙리와 다비드 실바밖에 없다.
2011년 12월 앙리의 동상이 공개됐을 때 그는 미국 뉴욕 레드불스에서 현역 선수로 뛰고 있었다. 그리고 한달 후인 2012년 1월부터 2개월간 아스널에서 단기 임대로 뛰었다. 자신의 동상이 있는 구장에서 현역 생활을 했던 유일한 선수이다.

다비드 실바는 2020년까지 맨시티에서 뛰었다. 이후 레알 소시에다드로 이적했다. 레알 소시에다드에서 뛰던 2021년 그의 동상이 에티하드 스타디움에 세워졌다.

#비나이 벤카테샴을 주목하라

동상 제작에 대한 잉글랜드의 기존 문법을 따른다면 손흥민에게 기회가 많지는 않을 수 있다. 업적은 충분하다. 손흥민은 2015년 입단 후 10시즌 동안 454경기에서 173골 101도움을 기록했다. 구단 역대 득점 5위에 올라 있다. 지난 시즌 주장으로 유로파리그 우승을 이끌며 2008년 리그컵 우승 이후 17년 만에 토트넘에 트로피를 안겼다. EPL 득점왕과 푸스카스상을 동시에 거머쥔 유일한 아시아 선수이자, 토트넘 역사상 최초 아시아인 주장이라는 점도 상징성을 더한다.
문제는 현역이라는 점이다. 앞서 짚은대로 전례에 따르면 현역 선수의 동상이 세워진 것은 단 2명 밖에 없다. 더욱이 역사를 세우는 면에서 전통을 상당히 중시하는 영국의 특성상 사망했거나 수십년전 레전드들을 먼저 동상으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다만 변수가 존재한다. 동상 건립 계획을 발표한 비나이 벤카테샴 CEO를 주목해야 한다.

그는 2010년 아스널 상업부문 임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2023년까지 최고 상업 이사(CCO-Chief Commercial Officer)와 최고 경영자인 CEO로 활약했다. 아스널이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 동상을 건립했던 시기인 2011년과 2014년 그리고 2023년 벤카테샴은 이 프로젝트를 총괄했다. 2011년과 2014년에는 CCO로서 그리고 2023년에는 CEO로서 동상 건립을 주도했다.

벤카테샴이 최근의 인물들인 벵거, 앙리, 베르캄프, 아담스의 동상을 세운 것은 브랜드 가치 향상 때문이다. 구단의 헤리티지와 브랜드 가치를 극대화시키고 스타디움 방문 경험을 긍정적으로 하며 동시에 아스널이라는 기업 이미지를 끌어올릴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 가면 이들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팬들이 많다.

벤카테샴의 성향과 감각이라면 토트넘이 세울 동상에 손흥민과 해리 케인 등 최근의 레전드들이 동시에 들어갈 가능성도 있다. 2011년 아스널에서 앙리, 아담스, 채프먼 감독의 동상을 동시에 공개했던 것처럼 수십년전 레전드와 가장 최근 레전드를 동시에 넣는 카드를 선택할 수 있다.
동상 건립 계획에 앞서 토트넘은 손흥민의 벽화를 먼저 선보일 것으로 보인다. 9월 9일 회의에도 팬들은 손흥민의 유산을 기리자고 제안했다. 팬들의 요구는 다음과 같다.

b. 손흥민 레거시(Heung-Min Son Legacy)
• FAB는 손흥민의 이적/퇴단에 대한 구단의 보도 및 다수의 헌정이 진심 어린 것이었으며, 손흥민이 팬들에게 남긴 메시지가 팬층에 큰 의미가 있었다고 느꼈다. FAB는 구단이 손흥민의 유산을 기릴 의향이 있는지, 예를 들어 지역 내 벽화(mural)를 통해 가능할지 요청했다.
• 구단은 이를 추가로 검토할 것이다.
조치(Action): 구단은 손흥민 벽화 가능성에 대해 다음 회의에서 보고할 것.


손흥민 벽화는 조만간 만나볼 가능성이 상당히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