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캡틴이라면 로이 킨이나 토니 아담스 같은 스타일을 떠올리는데요 (A lot of people have in their mind Roy Keane, Tony Adams as a captain, captain team.)"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 열린 엔지 포스테코글루 토트넘 감독의 기자회견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맨유와의 경기를 이틀 앞두고 열린 기자회견에서 화두는 '캡틴' 손흥민이었다. 손흥민이 경기장 안팎으로 보여주는 캡틴으로서의 역할, 여러가지 질문이 들어갔다. '캡틴' 손흥민을 흔들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이미 밖에서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었다. 축구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제이미 레드냅과 제이미 오하라는 "손흥민은 캡틴감이 아니다"라며 계속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익명 뒤에 숨은 몇몇 토트넘 팬들과 일부 한국인 팬들도 여기에 동조하기도 했다.
이들이 '캡틴' 손흥민을 폄하하는 주된 이유는 바로 하나. 위에 있는 질문에 그 이유가 들어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캡틴의 모델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캡틴은 인정하지 않았다.
더욱이 손흥민은 '잉글랜드인'도, '영국인'도, '유럽인'도, '서양인'도 아닌 아시아인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자신들 마음 속 정형화된 캡틴의 모델을 '성역'으로 세운 후 이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었다.

#라이온 하트
로이 킨, 토니 아담스같은 선수는 영국 내 전통적 '라이온 하트(Lion heart)'형 캡틴이다. 사자의 심장을 가진 선수. 용맹하고 몸을 아끼지 않으며, 투지가 넘치고 팀원들에게 쓴소리로 윽박지르는 유형이다.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12세기 영국 왕이었던 리처드 1세의 별명이 바로 사자심왕, 라이온 하트였다. 제 3차 십자군 원정에서 이슬람의 살라딘과 대결하며 명성을 얻었다. 영국 사회에서는 용맹한 전사형 군주로 이상적인 왕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사자심왕(라이온 하트) 리처드 1세의 모습은 이후 영국 사회에서 한 조직을 이끄는 리더로서 자리매김했다. 특히 스포츠쪽이 그 정도가 심했다. 잉글랜드 축구 대표팀이나 럭비 대표팀 캡틴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바로 '라이온 하트'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는 클럽팀으로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각 팀들은 '윽박지르는' 타입의 캡틴을 중용했다. 그러면서 좋은 성적을 내는 팀들이 나왔다. 맨유, 아스널 등등. 때문에 로이 킨이나 토니 아담스같은 선수들이 잉글랜드 축구의 전형적인 캡틴으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됐다.

#임팩트
로이 킨과 토니 아담스가 각각 맨유와 아스널을 대표하는 '위대한' 주장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임팩트덕분이었다 .
1999년 4월 21일 유벤투스 홈구장인 이탈리아 토리노 스타디오 델레 알피. 유럽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맨유는 고전했다. 경기 시작하고 11분만에 유벤투스의 에이스 필리포 인자기에게 2골을 내주며 0-2로 끌려갔다.
1차전에서 1대1로 비겼던 맨유로서는 궁지에 몰렸다. 2골차를 극복해내야 했다. 전반 24분 코너킥 상황에서 킨이 헤더골을 넣었다. 한 골을 만회했다. 이후 킨은 엄청난 활동량을 보이며 팀을 이끌었다. 이 한 골로 맨유는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후반 드와이트 요크, 앤디 콜이 연속골을 넣었다. 3대2로 역전하며 결승에 올랐다. 경기 후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로이 킨이 캡틴으로서 보여준 경기력은 내 감독 커리어에서 본 가장 위대한 장면 중 하나"라고 말했다. 맨유는 바이에른 뮌헨과의 결승전에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2000년 4월 아스널과의 FA컵 4강전에서 보여준 파트리크 비에이라와의 캡틴 대결에서의 승리. 1년 후 아스널의 홈구장 하이버리에서 발생한 일명 '하이버리 터널 사건' 등을 통해 로이 킨은 맨유의 주장으로서 그 누구보다 큰 임팩트를 팬들에게 보여주었다.
토니 아담스는 1988년부터 2002년까지 14년간 아스널의 캡틴 역할을 했다. 이 기간 아스널은 10개 이상의 주요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아스널 유스팀 출신으로 늘 아스널에서만 뛴 그에게 팬들은 '미스터 아스널(Mr. Arsenal)'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여기에 아르센 벵거 감독 부임 이후 팀 내 변화에 잘 적응하면서 선수들을 조화롭게 만든 것도 팬들에게 큰 임팩트를 남겼다.

#세상은 변했다
"세상이 변했습니다. 드레싱룸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어요. 지금의 드레싱룸에서는 로이 킨 같은 리더들도 적응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물론 좋은 리더는 환경에 맞춰 적응하겠지만,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팀을 이끌기는 어려워졌습니다."
엔지 포스테코글루 토트넘 감독은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 로이 킨이나 토니 아담스같은 스타일이 통할 세상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의 말대로 세상이 바뀌었다. 윽박지르는 스타일로는 더 이상 선수들을 통제할 수 없다. 킨과 아담스도 20~30년 전 사람들이다. 이제 옛날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당시의 행동들을 지금 드레싱룸에서 했다면 십중팔구 반발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2005년 발생한 맨유 TV 인터뷰 사건이 대표적이다.
2005년 맨유는 미들즈브러에게 1대4로 패배했다. 경기 후 로이 킨은 맨유 TV와의 인터뷰에서 팀동료드를 강하게 비난했다. 특히 존 오셰이, 키어런 리차드슨, 대런 플레쳐, 리오 퍼디난드를 공개적으로 지목하며 비판했다.
특히 퍼디난드에 대해서는 '스타도 아닌 선수가 거드름이나 피운다'고 인신공격성 비난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인터뷰는 방영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즌 맨유가 챔피언스리그에서 조별리그 꼴찌로 탈락하자 데일리 미러가 이를 공개했다. 퍼거슨 감독은 킨을 방출했다. 캡틴에 걸맞지 않게 팀 내 기강을 해치고 선수단의 갈등을 일으킨다고 판단했다. 이 외에도 킨은 팀 내에서 젊은 선수들과 갈등을 빚었다. 전 세대에 비해서 자유분방한 선수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요즘의 잣대로 치면 '직장 내 갑질'과도 같은 행동들을 아무렇지 않게 한 것이었다.

#새로운 캡틴
2020년대 캡틴의 성향은 다양해졌다. 여전히 '라이온 하트'를 가진 캡틴들도 있다. 전술가형 캡틴도 있다. 선수들을 잘 다독이는 캡틴도 있다.
캡틴 손흥민은 '다가감' 그리고 '그룹화'로 스타일을 정리할 수 있다. 토트넘에서 팀동료들과 스스럼없이 지낸다. 먼저 다가가고 한 팀이 되게 하는 데 큰 시간과 관심을 투자한다. 냉정한 프로의 세계이지만 그 이상의 소통을 강조한다. 선수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팀을 구축하고자 한다.
자신의 약점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룹화를 추구한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조언이기도 하다. 어차피 예전처럼 카리스마 넘치는 한 명의 선수가 모든 것을 다 장악할 수 없다. 손흥민은 벤 데이비스, 제임스 매디슨, 크리스티안 로메로, 굴리에모 비카리오 등과 함께 팀을 이끌고 있다. 서로서로 부족한 점을 보완하면서 리더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동으로 말한다. 12월 1일부터 2월 9일까지 토트넘은 위기 상황이었다. 주전 선수들 중 11명이 다쳤다. 그러나 손흥민은 다치지 않았다. 70일동안 20경기에 나와 1447분을 뛰었다. 3.5일마다 경기를 했고 평균 73분을 소화했다. 다른 선수들이 다치고 병상에 있을 때 손흥민만이 홀로 피치 위를 뛰어다녔다. 이렇게 홀로 고군분투하며 선수들을 리드했다.
손흥민은 자신하고 있다. 맨유전이 끝난 후 손흥민은 주변의 잡음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저는 여태까지도 항상 제가 못하든 잘하든, 제 이름을 걸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은,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열심히 하는 그런 부분들이 그러한 불공평한 코멘트 하나하나, 영국 언론이 됐든 한국 언론이 됐던, 토트넘 팬분들이 됐든, 제일 열심히 노력한 것, 제가 여태까지 커리어를 쌓아온 것들에 방해가 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론을 내려본다. 영국 언론이 '캡틴' 손흥민을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여전히 30년전에 머물러 있는 영국 언론들. 지금은 1990년대도, 2000년대도 아닌 2020년대이다.
이제 깨어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