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달산 정상 원성에 왜 큰 구멍을 냈을까? [이강웅의 수원화성이야기]

경기일보 2024. 9. 2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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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지대 감시할 ‘돌 CCTV’… 정조의 탁월한 방어전략
팔달산 정상 서장대 터는 원래 바위만 솟은 쓸모없는 곳이었다. 이강웅 고건축전문가

 

팔달산 정상에 대해 의궤에 “100리 안쪽의 모든 동정은 앉은 자리에서 변화를 다 통제할 수 있다”고 전략적 입지를 매우 좋게 평가하고 있다. 이런 평가로 팔달산정에는 최고 지휘부인 서장대와 이를 보좌하는 서노대 및 후당을 세웠다.

입지나 시설물보다 필자의 눈에 띈 것은 서장대를 둘러싼 성이다. 성 바깥쪽이나 안쪽 모두 돌로 쌓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혹시 화성에서 유일한 협축이 아닐까. 지난번 1편에서 따져본 결과 ‘협축 형식으로 쌓은 원성’으로 결론을 냈다. 이곳에 왜 협축 형식의 성을 쌓았을까.

이유를 살피기 전 성의 현황을 보면 길이 44보(약 52m), 높이는 3.5m, 성을 잘라본 단면은 아래 폭이 4.2m, 위쪽 폭이 3.5m, 성안 쪽에는 지상으로 1m에서 1.4m 사이로 노출되고 그 아랫부분은 2.1m에서 2.5m 정도 흙으로 메워진 상태다.

성 밖을 보면 급경사 낭떠러지의 경계를 따라 성을 쌓았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더는 서쪽으로 나아갈 수 없는 위치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간다면 성의 높이가 지금의 2배는 넘을 것이다. 절묘한 노선 선택이다.

팔달산 정상부. 성 밖에서 보면 사진과 같이 급경사 지형이다. 이강웅 고건축전문가

공사 일정을 보면 서성의 착수는 공사 첫해인 갑인년 8월20일이고 서장대 공사는 기공식이 8월11일, 기둥 기초와 기둥 세우기가 9월10일, 상량이 15일, 완공이 29일이다. 서장대 공사는 착수부터 기초까지 31일, 완공까지 50일이 소요됐다. 일정 중 특기할 것은 서노대는 다음 해에 공사를 한 점, 그리고 7월12일부터 8월1일까지 20일간 화성 공사 전체를 중단한 것이다. 중단하면서 내건 조건이 “서늘해질 때까지”라고 한 것을 보면 중단 이유는 너무 더운 날씨 때문이다.

이제는 이곳에 이런 형태의 성을 쌓은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안전을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다. 낭떠러지 끝을 따라 성을 쌓고 성안에 흙을 운반하고, 쏟아붓고, 다지는 작업을 연속적으로 해야 하는데 성벽이 쓰러질 우려가 있다. 시공과 구조의 안전을 위해 협축으로 쌓은 것이다.

둘째, 공사 기간인 8월과 9월은 장마철로 비가 오면 토사 운반은 불가능하고 흙이 유실되고, 흙은 죽탕이 된다. 흙으로 메우는 것보다 성 안팎 모두 돌로 쌓는 것이 오히려 인력, 경비, 공사 기간의 낭비를 막는다. 흙으로는 장마철에 공사를 못 해도 돌은 비가 오는 날에도 공사가 가능하다.

셋째, 공사 장소인 팔달산정 주변은 암반으로 형성돼 있어 흙을 구하기 힘들고 산꼭대기라 운반도 힘들다. 내탁에 필요한 막대한 양의 흙을 조달하거나 운반하는 데 소요되는 인력과 경비와 시간에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하지만 돌은 팔달산 정상부의 암반에서 벌석해 쓸 수 있으므로 재료의 획득이나 운반이 흙보다 유리하다. 이에 드는 인력, 장비, 공사 기간을 절약할 수 있다.

성 밖 지형이 급경사라 여장의 총안으로는 가까운 곳은 보이지 않는다. 감시 사각지대도 볼 수 있게 원성에 구멍을 냈다. 이강웅 고건축전문가

넷째, 흙으로 내탁을 하면 성안 쪽에 흙을 붙이고 넓게 펼쳐야 하므로 가뜩이나 좁은 터를 잠식하게 된다. 내탁보다는 협축이 유용한 터를 더 많이 확보할 수 있다.

다섯째,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서장대를 둘러싼 성에 구멍을 설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대형 철 파이프나 콘크리트관이 없었기에 내탁에 구멍을 낼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협축으로 성을 쌓는다면 크고 넓적한 돌을 이용해 구멍을 만들 수 있었다. 유일한 방법이다. 왜 원성에 큰 구멍을 내야만 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글이 필요 없다. 우리 모두 팔달산정으로 가 서장대를 둘러싼 성에 올라 보자. 성에 올라 여장에 있는 원총안 구멍으로 성 밖을 내다보고 다시 근총안으로 성 밖을 보자. 성 밖 어디가 보일까.

여장의 원총안 근총안으로는 성 아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먼 곳만 보인다. 즉, 급경사지여서 성 아래와 중간거리까지는 아예 보이지 않는다. 감시 사각지대다. 한마디로 ‘여장의 효용이 상실된 것’이다. 여장의 감시기능을 되살려 감시 사각지대를 해소해야 했다. 그 대책이 원성에 구멍을 내 성 바로 아래부터 중간까지를 감시하는 것이다. 즉, 원성에 설치한 현안이다.

이렇게 하면 여장의 원총안과 근총안은 먼 거리에 대한 감시 역할을 하고 아래의 원성에 설치한 위아래 구멍은 감시 사각지대인 성 바로 아래부터 중간거리까지 감시가 가능하다. 근거리와 중거리에 대한 현안(懸眼) 역할이다. 화성에 원성에 현안이 있는 경우는 또 있다. 북암문 밖 좌우 원성에 현안이 있다. 그리고 서북각루 원성에도 두 개의 현안이 있다.

아랫구멍은 크기와 형상이 특이하다. 병사가 관찰하는 데 불편을 덜어주기 위함이다. 이강웅 고건축전문가

구멍 설치에도 아이디어가 숨어 있다. 아랫구멍이 윗구멍보다 크고 형상도 가로로 긴 점이다. 정조의 부하 사랑과 과학이 스며 있는 설계다. 아랫구멍은 땅에 붙어 있어 가로로 누워 보는 병사의 불편을 고려해 가로로 길게 했다. 실로 묘안이다.

깊은 지략이 담겨 있는 팔달산정의 원성을 잘 보존해야 한다. 이 구간은 옛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구간이다. 성 위에 올라 여장의 원총안과 근총안으로 성 밖 적군을 내다보고 아래로 내려와 엎드려 원성에 뚫린 구멍으로 성 밖 바로 아래를 보는 체험의 화성을 만들어야 한다. 정조의 탁월함은 성을 쌓기 전 이런 문제점을 예측해 설계에 반영한 점이다.

시공 안전, 구조 안전뿐만 아니라 급경사 지형 때문에 생긴 감시 사각지대를 없애려 설계한 팔달산정의 협축과 큰 구멍에서 정조의 방어전략을 엿봤다. 글·사진=이강웅 고건축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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