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저 조지러 미국에서 왔지만 하나도 고급스럽지 않은 차
2015년 여름 10세대 임팔라가 국내 시장에 정식으로 출시됐습니다. 직전에 동일한 포지션으로 런칭했던 GM대우 알페온(뷰익 라크로스)보다 서열상으로는 하위 모델이었지만 차량의 덩치를 한껏 키우고 디자인과 패키징에 공을 들여 후속으로서의 위엄은 갖췄죠.
알페온도 현지에서는 제네시스와 경쟁하는 더 고급스러운 럭셔리카였지만 이걸 그랜저의 경쟁차로 포지셔닝하느라 이것저것 덜어내고 출시됐으니 국내에서는 아쉬움이 크지 않았어요.
외관은 쉐보레 모델 특유의 강직함, 선과 각이 살아있는 다부진 모습이었습니다. 경쟁차들과 달리 화려한 기교나 장식이 돋보이진 않았지만 마치 듬직한 체격의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을 보면 차림새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듯 존재감 하나는 충만했어요.
측면도 스포티한 분위기가 돋보였습니다. 5m가 훌쩍 넘는 전장을 가졌지만 20인치에 달하는 거대한 알루미늄 휠과 초원을 내달리는 임팔라의 근육질 허벅지를 연상시키는 캐릭터 라인, 유리창의 면적을 좁게 처리해 역동감을 부여하면서 대형 세단 특유의 둔중한 느낌을 최대한 배제했어요. 두툼한 C필러에 임팔라를 형상화한 전용 엠블럼을 붙인 것도 깨알 같은 디테일이죠.
다만 마감에 쫓겨 급하게 마무리를 한 걸까요? 뒷모습은 전면부와 측면의 포스에 비하면 카리스마가 다소 부족해 보였습니다. 중후함을 주고자 트렁크 끝을 차분하게 낮추는 동급의 경쟁차들과 달리 치켜 올라간 엉덩이, 대구경 듀얼 머플러 팁까지 갖추면서 경쾌함과 스포티한 분위기를 풍기는 건 좋았지만, 유난히 작은 리어 램프, 심지어 최상위 모델에도 벌브 타입을 쓰면서 안 그래도 작은 램프가 더 작아 보이고 결과적으로 뒷모습을 볼품없어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머플러 팁마저 없는 최하위 트림 LT의 뒷모습은 오히려 하위 모델인 '올 뉴 말리부'보다 멋이 없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였어요. 한국에서 준대형 세단이라는 차급에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고급 세단'이라는 기준으로 바라보면 분명 아쉬움이 남는 생김새였죠.
특히 북미 기준을 그대로 적용하면서 후미등의 바깥쪽 램프를 방향 지시등으로 쓰는데요.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차들 중 LED 램프를 탑재한 모델들은 그나마 직진성이 강한 빛이라 시인성이 나쁘지 않은데 할로겐램프를 쓴 이 차는 시인성이 참 안 좋죠.
이 밖에 국내 사양에는 화이트, 블랙, 실버 단 3가지 색상만 제공됐는데요. 기계미가 돋보이는 심플한 생김새 덕분에 다행히 무채색 계열이 잘 어울렸기 때문에 아쉬움은 크지 않았습니다. 이때만 해도 대형차는 무채색으로 뽑는 게 국룰이기도 했고요. 또 비슷하게 직선 위주의 심플함을 내세웠던 기아차, 특히 '로체 이노베이션'을 닮았다는 놀림을 받기도 했죠.
실내는 쉐보레의 최신 디자인이 반영됐습니다. 탑승객을 둥글게 감싸는 랩 어라운드 스타일은 구형 모델들 역시 동일했지만 보기에 따라 갑갑하다는 느낌이 들곤 했죠. 개선된 듀얼 콕핏 디자인은 대시보드의 높이를 낮추면서 개방감이 강조됐고 덕분에 넓은 실내 공간이 더 확실하게 체감됐습니다. 언제나 넉넉한 실내 공간을 내세우던 현대기아차의 경쟁차와 비교해도 전혀 아쉬움이 없었고 쉐보레차 특유의 묵직하게 닫히는 도어는 여전히 나와 내 가족을 지켜줄 것만 같은 든든한 안정감을 줬어요.
여기에 각종 최신 편의장치와 밝은색 가죽 마감, 투톤 처리한 대시보드, 앰비언트 라이트로 차급에 걸맞은 감성 품질도 갖췄습니다. 내비게이션의 구린 성능은 여전했지만 애플 카플레이, 나중에는 안드로이드 오토까지 지원하는 개선형 마이링크 시스템이 대신 달래줬고 중저음이 돋보이는 11개 스피커의 BOSE 프리미엄 사운드를 적용한 것도 트렌드에 발맞춘 구성이었습니다.
특히 한때 GM의 트레이드마크였던 '시크릿 큐브'를 적용한 것이 독특했죠. 버튼을 누르면 모니터가 솟아오르며 비밀의 공간이 펼쳐지는 마치 첩보 영화를 방불케 하는 재미있는 디테일이었습니다. 별거 없긴 하지만 남자들은 이런 기계적인 매력에 환장하니까요.
작은 소지품이나 비상금, 월터 PPK 같은 호신용품을 넣을 수 있는 수납공간과 함께 왠지 숨겨진 데이터를 복사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미디어형 USB 포트를 마련해 USB 메모리를 꽂아 음악이나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게 했어요. 차주가 아닌 누군가가 함부로 여는 것을 막기 위해 발렛 모드 비밀번호를 설정해 잠가 놓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단에 자리한 스마트폰 무선 충전 장치는 에어컨 바람을 뿜어 과열을 방지해 주는 깨알 같은 기능도 있었어요. 충전도 제멋대로인 데다 카플레이나 안드로이드 오토를 쓰면 당연히 유선 연결을 해야 됐기 때문에 딱히 쓸 일이 없었지만요.
차선이탈 경고와 후측방 사각지대 경고, 전방 충돌 경고 등 주행 안전 사양을 전 모델에 기본 적용하고 자동 긴급제동, 차간거리 조절이 가능한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과 한국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편의장비인 열선 스티어링 휠 및 앞좌석 통풍 시트를 옵션으로 제공하는 등 충분한 경쟁력을 갖췄습니다. 세단, SUV 할 것 없이 모조리 트럭으로 만들어버리는 버릇이 남아있어서인지 전반적으로 예쁘거나 멋스럽진 않았습니다만 쉐보레치고는 있어야 할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단, 외관과 마찬가지로 고급 세단이라는 기준으로 바라보면 아쉬운 점들이 곳곳에 있었는데요. 먼저 스티어링 휠의 버튼 재질이 학창 시절 쓰던 저렴이 MP3를 떠오르게 한다거나 센터패시아 버튼과 다이얼의 유격이 좀 있는 편이라 만질 때마다 달그락거리는 점은 고급감을 해치는 부분이었습니다. 모하비 투톤 내장은 대시보드 상단의 내장재가 앞유리에 그대로 반사되어 전방 시야를 방해한다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또 개인적으로 불편했던 부분은 전자식 주차 브레이크는 잘 만들어 놓고 단짝인 오토홀드가 없는 것, 그리고 비상등이었습니다. 버튼의 크기가 작은 건 둘째 치더라도 스티어링 휠에 가려져서 안 보이더라고요. 앞서 8세대 말리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북미를 비롯한 해외에서는 우리나라만큼 비상등을 다양한 환경에서 자주 쓰지 않다 보니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배치하는 경우가 왕왕 있죠.
대형 세단의 덕목인 뒷좌석 편의성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거대한 전장에서 비롯된 운동장 같은 레그룸과 오디오 조작 등이 가능한 다기능 암레스트, 3단계로 조절 가능한 뒷좌석 열선 시트 등 오히려 본국에서보다 더 풍부한 편의 사양을 갖췄습니다.
질 좋은 가죽으로 두른 넉넉한 크기의 시트는 착좌감이 훌륭했고 분리형 헤드레스트는 승객이 타지 않을 때는 반대로 접어 후방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했어요.
또 파노라마 썬루프, 세단에서는 보기 힘든 옵션인 220V 인버터 등 국내 소비자들을 위해 패키징에 신경 쓴 흔적이 보였습니다만, 여기서 멈추면 쉐보레가 아니겠죠. 나사 하나 풀린 구석은 뒷좌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암레스트 길이에 인색한 것은 쉐보레의 오랜 전통 중 하나죠.
슬라이딩 시 컵홀더를 빼놔야 그나마 정상적인 암레스트 길이가 되는데 덕분에 팔을 걸치면 의도치 않게 버튼이 눌려서 잘 듣고 있던 음악을 넘기거나 한여름에 열선 시트를 작동시키는 일도 빌비재했습니다.
뒷좌석 열선 시트는 작동 시에 LCD 스크린에 그래픽을 띄워주는 방식이지만 음악을 틀면 그 그래픽이 사라져 작동 여부를 알 수 없게 디자인되었고, 이럴 경우 이미 뜨끈해진 뒤에나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에 승객의 불편이 배가 됐습니다.
또 동급의 차량들은 다 갖춘 측면 커튼과 리어 전동 블라인드가 없는 점, 무엇보다 시트의 등받이가 경쟁차들에 비해 곧게 서 있어서 장거리 주행 시 편의성을 반감시켰어요. 광활한 레그룸을 조금 희생해 등받이 각도를 확보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그래도 이상하리만치 길게 뻗어있는 리어 오버행에서도 짐작되듯 트렁크 공간이 상당했습니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공간 없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사각형 적재 공간에 부직포 마감도 꼼꼼했고 깊이뿐만 아니라 높이도 넉넉해 동급의 세단들과는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였어요.
여기에 누가 미국차 아니랄까 봐 이 차급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6:4 폴딩 시트까지 제공해 길이가 긴 짐도 무리 없이 실을 수 있었죠. 심지어 등받이와 트렁크 간의 높이만 얼추 맞추면 웬만한 성인이 누워 잘 수 있는 공간까지 나오는데 영면 체험이 이런 걸까 싶은 기분이 들기 때문에 딱히 추천하진 않습니다.
파워트레인은 직렬 4기통 2.5, V6 3.6L 두 가지 자연흡기 가솔린 엔진에 3세대 6단 자동 단속기가 매칭됐습니다. 주력 사양인 2.5L 모델은 5m가 넘는 거대한 덩치를 이끌기에 딱히 모자람 없는 힘을 제공했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시내길만 아니면 의외로 연비도 준수했어요.
냉간 시에는 디젤인가 착각할 정도로 우렁찬 엔진함을 선사했지만 차에 타거나 주행을 시작하면 조용했는데, 이는 이중접합 차음유리와 주행소음을 상쇄하는 액티브 노이즈 캔슬링이 기본 탑재된 덕분이었죠.
6기통 3.6L 엔진은 GM의 여러 차종과 프리미엄 캐딜락까지 공용하는 사양으로 전륜구동에 맞게 출력을 낮추긴 했지만 평소에는 부드러운 패밀리카로, 가끔은 운전에 즐거움을 줄 만큼 호쾌한 동력 성능을 선사했습니다. 배기량을 감안하면 연비가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같은 엔진을 사용하는 픽업트럭 '콜로라도', 캐딜락 'CT6'처럼 항속주행을 할 때 6개의 실린더 중 4개만 연료를 분사해 효율을 높이는 실린더 휴지 기능이 적용됐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트림에 따라 전동 스티어링 휠의 방식을 차별했던 경쟁차들과 달리 랙 타입 R-EPS를 전 트림 기본 적용해 쫀쫀한 조향감을 제공한 것도 경쟁력이었습니다. 캐딜락 XTS, 뷰익 라크로스 등 상위 모델과 공유하는 '입실론 2 플랫폼' 덕분에 고속주행 안정성이 동급에서 가장 뛰어났고 국내 소비자들이 선호할 만한 폭신한 승차감과 정숙성 면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다만 아쉬운 부분이 없진 않았는데요. 먼저 면적에 비해 시야가 좁아 답답한 사이드미러의 평면거울, 다행히 사각지대 경고장치가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대낮에 숄더 체크를 안 했다가 식겁한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아예 작은 볼록 거울을 붙여놓는 차들도 있는데 얘는 그런 것도 없어요.
또 2.5L 모델의 ISG On/Off 버튼이 없는 것과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을 3.6L 모델에만 한정한 것, 방지턱을 조금만 세게 넘으면 어디 부서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큰 충격이 발생하는 점도 아쉬웠어요.
특히 6단 변속기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만이 여전했습니다. 정속 및 고속주행이 잦은 외곽이나 지방도시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시내 주행 비율이 높은 우리나라 도로 환경 특성상 원하는 타이밍에 변속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저속 주행 중 실내가 요동칠 만큼의 불쾌한 변속 충격을 겪는 경우가 많았고, 때문에 운행하는 지역에 따라 소비자들의 평가가 크게 엇갈렸죠.
이후 2017년식부터는 새로운 그레이, 골드 메탈릭 외장 컬러와 함께 기존 모하비 투톤 내장을 전면유리 반사 문제를 해결한 베이지 투톤으로 대체해 2018년식부터는 하위 모델의 '퍼펙트 블랙' 시리즈와 발을 맞춘 '미드나잇 블랙 에디션' 트림을 추가해 전용 블랙 포인트와 투톤 처리한 19인치 휠로 더욱 카리스마 있는 외관을 뽐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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