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치아를?!" 정신병을 고치기위해 이루어졌던 역사상 최악의 치료법

미국의 정신과 의사 헨리 코튼 (Henry Cotton)은 흥미로운 정신병 치료 이론을 가지고있었습니다. 그는 정신병 환자의 감염된 치아를 제거함으로써 정신병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존 홉킨스 (John Hopkins)병원의 위대한 정신과 의사인 아돌프 마이어 (Adolf Meyer)의 제자중 한명이었던 헨리 코튼 박사는 '신체 어떤부위에 생긴 감염이 피를타고 뇌로 퍼져서 이상행동을 하는 정신 증상이 발생하기때문에 감염부위를 제거하고, 관장 등을 통해 독소를 제거하는 것'이 치료법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헨리 코튼 박사

1906년, 트렌턴 주립정신병원의 원장으로 부임한 헨리 코튼은 자신의 주장을 확인하기위해 인력을 충원했습니다. 세균학자, 내과의사, 외과의사, 부인과 의사, 치과의사, 병리학자 등을 고문으로 두었고 당시는 흔치 않던 영상의학과 의사와 구강외과 의사를 직원으로 고용했습니다.

이렇게 트렌턴 병원은 헨리코튼에 의해 현대의학 전문가를 망라한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종합병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헨리코튼은 정신질환 환자를 치료하기위해 그들의 감염된 이빨을 뽑기 시작했습니다. 1921년 1년간 총 6472개의 치아를 뽑았는데 이는 한명당 10개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치료되는 사례가 높지 않았습니다.

코튼은 그의 수술이 항상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감염이 너무 멀리 퍼졌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편도선, 위, 담낭, 고환, 난소, 결장 등 다른 감염된 신체 부위를 제거해야한다고 코튼이 주장했습니다.

코튼은 환자의 85%  치료할 수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 자연스럽게, 그의 동료들은 그의 방법을 받아들이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코튼의 수술은 이론을 실천하는 모범 사례로 간주되었으며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아이들의 부모들은 코튼의 치료법을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1919년부터 1년간 이 수술을 받은 환자 79명 중 21명이 회복되고, 23명은 수술 후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헨리 코튼이 기이한 수술을 계속하면서 환자의 사망률이 지속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정신병원의 많은 환자들은 코튼이하는 수술의 위험을 인식하고 수술실로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코튼의 수술사망률이 30%에 이르렀을 때 코튼은 수술의 위험을 인식했지만 사망한 환자의 대부분이 이미 신체 상태가 좋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좌)필리스 그린에이커, (우)아돌프 마이어

하지만 일부 정신과 의사들은 코튼의 수술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코튼이 시행하는 수술법의 근거가 미약하고, 무엇보다 이 수술로 인한 사망자나 불구자가 양산되고 있음에도 이 부분이 축소 보고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여론이 들끓기 시작하자 헨리코튼 박사의 스승인 마이어 박사에게 조사가 의뢰되었고, 마이어 박사는 자신의 제자 필리스 그린에이커(Phyllis Greenacre, 1894~1989년)를 병원으로 보내 과거 진료기록을 면밀히 조사하고, 실제 치료를 받은 환자들을 만나보게 했습니다.

트렌턴 주립정신병원

1년 6개월에 걸친 조사를 통해 그린에이커는 헨리 코튼의 국소 감염에 의한 수술적 치료법이 지나치게 사망률이 높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수술후 6명중 1명이 사망했고, 40퍼센트는 수술을 받은후 개선이 없거나 후유증 떄문에 퇴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해독치료법의 긍정적 효과를 입증할 증거가 사실상 전무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지만 코튼은 이런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생물정신의학을 주창하던 마이어도 이 보고서를 채택해서 공표할 경우 발생할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보고서는 유야무야되었고, 그린에이커도 다른 도시로 취직하면서 이 모든 조사 결과는 묻혀버리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코튼은 1930년 병원장을 그만둘 때까지 지속적으로 수술요법을 시행할 수 있었습니다.

헨리코튼이 퇴임한 다음에도 그의 추종자인 로버트 스톤(Robert Stone)이 원장이 되어서 대세가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트렌턴 주립병원에서 수술치료를 받은 환자들의 문제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뉴저지 주 기관 및 단체국 조사실장인 에밀 프랭클(Emil Frankel)이 1932년 병원 기록을 면밀히 조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조사결과 코튼이 발표한 통계자료에 상당한 오류가 있었다는것이 밝혀졌으며 결장절제술을 받은 309명의 환자 중 회복 환자는 코튼이 발표한 대로 75명이 아니라 겨우 22명뿐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무엇보다 문제는 수술을 받은 309명 중 138명이 사망했고, 101명이 여전히 입원치료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치료가 목적이라 해도 3명 중 1명이 죽는 것은 합리화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앤드류 스컬의 <현대정신의학 잔혹사> 표지

하지만 이 보고서도 파장을 의식해 관계자에게만 배포되어 묻혀졌습니다. 헨리 코튼은 끝까지 처벌받거나 공격당하지 않은채 자신의 주장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다가 결국 1933년 5월에 사망했습니다.

헨리코튼과 그의 조수들은 약 11000개 이상의 치아를 뽑았으며 645건의 수술을 수행한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수백명의 사람들이 죽었고 많은 사람들이 불구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수십 년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다가 사회학자 앤드류 스컬(Andrew Scull)에 의해 발굴되어 2005년 『현대정신의학 잔혹사(Madhouse: A tragic tale of megalomania and modern medicine)』에서 처음으로 낱낱이 밝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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