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전기차 캐즘, 이미 예견됐다

박찬규 기자 2024. 10. 2.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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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는 지난 몇 년 동안 '친환경차의 미래'라는 평을 받아온 찬양의 대상이었지만 최근 잇따른 대형 화재 이후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무작정 주차를 막는 등의 '전기차 포비아'(공포증)로 번진 상황은 단순히 '캐즘'(새로 열리는 시장의 일시적 판매 둔화 현상)으로 치부하기엔 타격이 적지 않다.

최근 관련업계가 '전기차 안전' 관련 포럼을 국내 대표 수소전시회 'H2 MEET' 개막식 직후 같은 장소인 킨텍스에서 개최한 점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살필 수 있다. 자동차모빌리티산업연합회(KAIA)는 소비자단체와 공동으로 '전기차 화재 예방과 수요 확대 전략' 포럼을 마련하고 앞으로 2~3년 동안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올해 전기차 판매 부진은 충전 대란 등 여러 신호가 있었다. 그동안 정부는 시장 생태계 조성이나 사용자 행동 연구보다 제품 보급을 통한 숫자 늘리기에만 급급했다. 생산부터 운행, 폐기까지 전주기적관점(LCA)으로 전기차를 바라보거나 제품별 특성에 따른 안전대책은 고려할 여유가 없었다.

수년 동안 정부의 구매보조금 정책이 제품 판매량을 늘리는 데 힘이 실리다 보니 허점을 보였고 구매보조금을 받아 저렴하게 차를 산 뒤 일정 기간 타다가 비싸게 파는 이른바 '보조금 테크' 논란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대당 지급하는 보조금은 꾸준히 감소했고 저렴한 모델이 아니라면 판매가 저조해지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숫자에만 집중한 결과는 전기차 판매와 충전 인프라 확충 사이의 불균형도 초래했다. 전기차 보급 초기부터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한 부분이다. 충전기의 '총 대수'를 늘리는 데만 힘을 쓰면서 전기차 운전자가 많이 몰리는 곳에선 충전 대란이 벌어지는 반면 몇 달 넘도록 개점휴업 상태인 충전기도 존재했다.

충전기 설치를 민간 주도로 한 이후에도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제주도 등의 휴양지에선 특정 충전기에만 줄을 서서 충전할 뿐 바로 옆 충전기가 비어있어도 이용하지 않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제휴되지 않은 다른 충전기를 사용하면 요금 할인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없어서다. 그나마 '충전 로밍'이 도입됐지만 일부에만 적용될 뿐 여전히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는 볼멘 소리가 나온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공공기관의 전기차 의무 구매 제도도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내연기관차만큼 차종이 다양하지 않음에도 무조건 전기차만 사야 한다. 특히 팀 단위로 이동하며 회의를 겸하는 상황에서는 카니발, 스타리아 등 승합차가 필요하다. 국산 전기차 중 여럿이 함께 탈 수 있는 건 7인승인 기아 EV9 밖에 없는데 대당 가격이 스타리아 디젤 모던 9인승 두 대 보다 비싼 7728만원부터 시작한다. 만약 무리하게 EV9를 사게 되면 예산 활용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사용 후 배터리'에 대한 고민이 국내에서 시작된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일본의 경우 15년쯤 전부터 이미 하이브리드차 배터리를 활용한 사업모델을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실증단지에서는 실제 많은 주민들이 PHEV를 재생에너지로 충전하고 밤엔 차를 비상전력으로 활용하며 에너지 자립을 이룬다.

국내에선 전기차에서 쓰던 배터리를 소형 어선에 쓰거나 전력공급장치(ESS) 등으로 활용하는 사업이 추진됐지만 관련 업계 반응은 시큰둥하다. 사업상 기밀이라는 이유로 배터리 구조나 분해 순서에 대한 매뉴얼도 공유되지 않는다.

수소전기차의 생태계는 더욱 처참하다. 시장이 크지 않아 제대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공급망의 주요 연결고리는 이미 해외 기업이 장악했다. 수소전기차 폐차 후 수소를 전기로 만들어주는 핵심 장치인 '스택'의 추가 활용에 대한 고민은 찾아볼 수조차 없다.

전기차는 여러 측면에서 내연기관차와 많이 다르다. 당장 도로의 안전시설 규정만 해도 수십년 전 엔진차 기준이어서 충돌 허용 무게 차이가 크다. 에너지 수급도 문제다. 일반 가정에서 보름쯤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을 전기차는 하루에 써버린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란 말이 있다. 사망한 뒤에 '약방문'(현재의 병원 처방전)을 쓴다는 의미인데 때가 지난 다음 대책을 세우거나 후회해도 소용없다는 말이다. 현재 전기차를 둘러싼 상황과 닮았다.

전기차 구매보조금은 물론 공공기관 예산은 모두 국민의 세금이다. 현재의 전기차 '포비아'나 '캐즘'은 세금을 제대로 된 방향으로 쓰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정부는 제조사 관계자들을 불러 혼을 내는데 시간을 낭비하기보다 당장 필요한 정책, 현실적인 대안 마련에 머리를 모으고 힘을 쏟아야 할 때다.

박찬규 머니S 차장 /사진=김은옥


박찬규 기자 star@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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