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 정신을 담은 진료가 환자의 발걸음을 되살린다 [Den이 만난 명의]

수많은 진료 경험을 바탕으로 환자의 고통을 직접 어루만지며 후학 양성에도 힘쓰는 이가 있다.족부족관절 장인이자 명의, 양기원 교수를 만났다.

희끗한 머리에 굽은 등, 낡은 차림새로 하나의 작품에 몰입하는 모습. ‘장인(匠人)’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양기원 교수와 대화를 나누면서 가장 먼저 ‘장인’이 떠올랐다. 그의 짙은 흑발과 곧은 상반신, 정갈한 차림을 외면한 것은 아니다. 국내 최초로 족부족관절센터를 개설한 스승의 뒤를 이어 20년이 넘도록 한자리에 머무는 것도, 전문 분야에 대한 자부심과 후학 양성에 기여하는 모습에서 그만의 장인정신이 엿보인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그의 날 선 진료 철학엔 은은한 온기가 느껴진다. 환자의 작은 신음까지 고려하는 그의 섬세함과 환자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어우러졌기 때문이다. 오로지 환자만을 생각하며 경험과 지식을 벼린 그의 고집에서 어쩐지 사명감마저 전해진다.


ⓒ Den
양기원 교수는…
1993년 연세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1999년 을지병원 펠로우 시절, 그를 명의로 이끌어준 스승을 만났다.
2000년 미국 코넬 대학교에서 연수를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스승님의 부름에 따라 을지병원으로 돌아왔다. 이후부터 현재까지 그는 족부족관절센터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다.
이 외에도 2008년엔 스위스 리스탈병원 족부 파트 연수, 2003년부터 성남FC의 전신인 성남 일화 천마 주치의로 10년간 활동했으며, 현재는 한국프로축구연맹 의무분과위원회에서 활동 중이다.

어릴 적 꿈이 ‘파일럿’이었다고. 의사와는 사뭇 거리가 먼 직업인데, 의료인의 길을 택하게 된 계기는?

파일럿이 되려면 시력이 좋아야 하는데, 어릴 때부터 눈이 나빠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차선으로 이과 진로를 선택하면서 의학을 공부했다. 평소엔 공학도 스타일인데, 이런 내 성격과 정형외과가 잘 맞는다고 느꼈다.

정형외과는 공학적 접근이 필요한 분야다. 골절 진료에서 나사를 어떻게 박고, 금속판을 어떤 방향으로 대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이런 부분이 공대 스타일인 나와 잘 맞았다.

비록 파일럿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파일럿인 가까운 지인 덕분에 가끔 비행 시뮬레이터를 체험할 기회를 얻는다. 파일럿의 꿈을 이렇게나마 풀고 있는 셈이다.(웃음)

정형외과에서도 특히 족부질환을 전문 분야로 선택한 이유가 있나?

당시 정형외과 인기 분야는 척추, 무릎, 고관절 정도였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발 관련 분야는 상대적으로 불모지에 가까웠다. 정형외과 학회에서 족부 관련 컨퍼런스가 열려도 전국에서 몇 명 모이지도 않았다. 나는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를 선택해 발전시키겠다는 목표로 족부질환 분야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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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부족관절센터에선 주로 어떤 진료를 하나?

족부질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첫 번째는 외상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아킬레스건이 파열되거나 인대가 끊어지는 등 주로 사고가 난 경우다. 이런 외상은 대개 응급 상황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질병이다. 관절염이나 발가락 변형이 생기는 경우가 그 예다. 특히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주로 발가락이나 발의 변형이 서서히 진행된다. 이런 질병군은 한순간에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응급 상황은 아니지만 정형외과에서 변형된 부분을 바로잡는 치료가 필요하다.

또 인공관절을 사용하는 관절 교체 수술도 중요한 진료 분야 중 하나다. 무지외반증 교정 수술이 대표적이다. 무지외반증은 엄지발가락이 바깥쪽으로 휘어지면서 발 안쪽 관절이 돌출되는 변형 질환이다. 이 외에도 당뇨발과 염증 치료도 주요 진료 분야에 속한다.

당뇨발이라니, 생소하다. 어떤 질환인가?

당뇨병으로 인해 발에 염증이 생기는 질환으로, 부러지거나 찢어지는 외상처럼 응급 상황에 해당한다. 염증이 생겼을 때 즉시 치료하지 않으면 발을 절단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당뇨발도 족부정형외과 의사 입장에선 응급 질환으로 본다.

당뇨발은 응급 상황일 수 있다고 설명했는데, 치료 과정에서 특히 주의하는 지점이 있나?

신속한 대응이 가장 중요하다. 염증이 발생하면 발 전체로 빠르게 퍼질 수 있다. 염증 같은 긴급 상황에선 전문의의 빠른 판단과 치료가 발을 살릴 수 있는 결정적 요소가 된다. 의사가 빠르게 염증을 캐치하고, 한 시간이라도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시간이 지체되면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어 발목 윗부분까지 절단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정형외과 의사로서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

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수술을 잘 마치고 완치된 모습을 볼 때 큰 보람을 느낀다. 정형외과는 모든 환자가 반드시 수술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다만 환자의 상황에 따라 반드시 수술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의사가 상태를 확인하고 수술 여부를 명확하게 판단해야 한다. 예를 들어, 뼈가 부러져서 많이 어긋난 경우에는 반드시 수술을 통해 교정해야 한다. 이때는 육안으로도 환자의 이상 상태가 보이므로 수술 전후 환자 상태는 확연히 다르다.

내과 치료는 다양한 진료 사례가 있겠지만, 외관상 명백히 보이는 변화는 정형외과에 비해 적을 수밖에 없다. 내과 치료는 환자의 회복력을 서포트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정형외과는 의사가 직접 손을 대서 교정하고 변형된 부분을 바로잡아야 하는 일이 대부분이다. 수술을 거쳐 환자가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게 되는 과정을 보는 것이 정형외과 의사로서 무엇보다 보람 있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술 후 환자의 상태가 개선되는 것을 보면 뿌듯한 마음이 든다. 이런 점이 내가 정형외과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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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 후 결과를 하늘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손수 노력해 환자의 상태가 개선되는 것이다.
내 손으로 직접 교정하거나 치료해 환자의 상태가 크게 달라졌을 때, 의사로서 큰 보람을 느낀다.

진료 전후의 차이가 크다는 점에서 의사로서 보람을 느낀다니, 흥미로운 지점이다

앞서 말했지만, 모든 환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다른 과에 비해 수술 전후의 차이가 크다는 점을 말한 거다.

의과대학 학생들은 본과를 마친 후 전공으로 어느 과를 선택할지 고민이 많다. 마취과, 피부과, 안과 등 다양한 선택지가 있지만 정형외과를 선택하는 이유는 수술을 통해 환자의 상태가 눈에 띄게 개선되는 경험도 포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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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원 교수는 2003년부터 2013년까지 성남 일화 천마(현재 성남 FC) 주치의로 근무했다. 사진은 2010년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당시. 당시 팀을 이끈 신태용 감독과 더불어 축구계 주요 감독들의 젊은 시절 모습이 담겨 있다. 주치의 시절 사진을 보여주는 양기원 교수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밝다.

본인만의 진료 철학이 있는지 궁금하다

환자가 신뢰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의사는 수술을 할지 말지, 어떤 방법으로 치료할지 결정해야 하는데, 환자에게 명확하게 설명하고 결정을 해야 한다. 모든 질환이 치료하는 데 명확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환자의 상황을 충분히 고려한 후에는 단호하게 “이 방법이 최선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의사의 역할이다.

환자와의 신뢰 관계도 중요하다. 진료 중 환자의 반응을 보면 의사를 신뢰하는지 여부를 알 수 있다. 환자나 보호자가 의사인 나를 믿고 신뢰 관계가 형성되면 치료 결과도 보다 긍정적이다.

진료하면서 환자에게 정확한 치료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수술 여부를 판단하는 과정에서도 데이터와 경험이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렇다. 의사의 경험은 진료와 수술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한다. 책이나 강의로 배운 지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도 존재하는 법이다. 타이거 우즈라고 처음부터 골프를 잘 쳤겠나. 수만 번, 수십만 번 연습한 끝에 최고가 되는 것이다.

경험이 쌓여야 수술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정확히 판단할 수 있다. 나도 젊을 때는 모든 것을 수술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경험이 쌓이다 보니 비슷한 질환이라도 어떤 경우에는 수술하지 않는 편이 더 좋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은 이후로는 환자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을 선택해 치료하고, 불필요한 수술은 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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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AI 기술이 발전하는 추세다. 족부질환 진료에도 AI 기술이 적용되나?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정형외과 분야에서는 변화가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다. 의학 분야 자체가 오랜 경험과 데이터 축적을 바탕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더라도 자리 잡기까지는 상당 시간이 걸린다. 특히 정형외과는 AI가 적용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정형외과는 수술이 주를 이루는 분야다. 진단 과정에서 만져보고, 물어보고, 엑스레이 등 여러 요소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며, 무엇보다 수술 경험이 중요하다. 이런 이유로 정형외과에서는 여전히 의사의 경험이 환자를 치료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많은 환자를 치료했다. 기억에 남는 사례가 있나?

젊은 남성이 군대에서 발목을 심하게 다쳐 내원했다. 발목 위아래 뼈가 산산조각이 나 어디서부터 맞춰야 할지 난감한 지경이었다. 군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뼈가 너무 많이 조각나 제대로 맞춰지지 않았고, 환부는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않아 무혈성 괴사까지 진행된 상태였다.

치료를 시작한 지 한 달쯤 지나 환자의 상태를 다시 살펴보니 발목 뼈는 여전히 제대로 맞춰지지 않았고, 괴사로 인해 뼈가 내려앉아 있었다. 이후의 치료 과정이 막막했다. 당시 스위스는 인공관절 기술이 뛰어났고, 마침 내가 그 기술을 배우기 위해 스위스로 떠날 예정이었다. 나는 환자에게 스위스 의료진에게 수술을 받길 권했고, 결국 그 환자를 스승이 될 스위스 의료진에게 데려갔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다행히 환자는 잘 회복했다. 그 환자는 수술한 지 15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인사를 하러 병원을 찾아온다. 사고 당시 환자가 워낙 젊었고 상황도 심각했던 데다 내가 스위스에서 막 인공관절을 배우던 시기여서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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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병원 족부정형외과에 20년 넘게 몸담으면서
유수의 대형 병원과 다름없는 진료 수준을 유지하려고 노력해 왔다.
우리 병원에서 제공하는 진료와 교육은
어느 병원에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한다.
레지던트들에게도 항상 이런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가르쳐왔다.

개인적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

정년 퇴임 전에 내 모든 지식을 전해 줄 수 있는 제자를 만나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노하우를 전수하고 싶다. 족부정형외과를 사랑하고, 정형외과 의사로서 가치를 추구하는 후배 의사가 있었으면 한다. 멋진 마음가짐을 가진 후배 의사가 나타나 을지병원 족부정형외과의 명성을 이어가길 바란다.

수제자를 두고 싶다는 말에서 장인의 모습이 엿보인다

스승님께 배운 것을 후배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마음이다. 스승에게 배우고, 또 그 가르침을 후배에게 전수해 계속 이어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형태가 아닐까. 지금까지 쌓아온 경험과 지식이 사라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웃음)

환자들에게 어떤 의사로 기억되고 싶나?

환자들의 불편함을 무시하지 않는 의사로 기억되고 싶다. 의사로서 당연히 실력은 기본이다. 의학 지식이나 수술 실력 등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필요한 기술은 필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환자들이 불편함을 호소할 때, 이를 무시하지 않고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환자가 아파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다. 의학 지식은 책에서 배울 수 있지만, 환자들과의 소통을 통해 배우는 것도 적지 않다. 환자의 작은 불편함도 주의 깊게 살펴보는 것이 좋은 의사의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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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덴 매거진 2024년 11월호
에디터 정지환(stop@mcircle.biz)
사진 송승훈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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