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실수 아니라 대륙의 공포”...중국서 온 ‘이모님’이 안방 점령한다는데 [방영덕의 디테일]

방영덕 매경닷컴 기자(byd@mk.co.kr) 2024. 9. 16.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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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완 LG전자 대표이사 사장이 지난 6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IFA 2024’ 기자간담회에서 LG전자의 미래 전략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출처 = LG전자]
‘살까 말까.’

중국산 로봇청소기 구매 여부를 두고 고민한다는 미용실 사장님. 온라인 쇼핑몰의 장바구니에 담아두기만 한 것이 몇 달째라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또 몇 달이 지난 후 미용실을 들르게 됐습니다. 매장 바닥을 자연스럽게 오가는 로봇청소기를 봤습니다. 고민을 끝내고 산 제품은 중국 브랜드 로보락의 것이었죠.

사장님 왈 “국산 브랜드로 올인원 로봇청소기가 나오길 기다렸는데 너무 늦게 나왔다”며 “그런데 또 막상 나온 제품을 보니 성능 측면에서 영 (중국 제품에) 못 미친다는 생각이 들자 결정 내리기가 쉬웠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중국산 제품을 택한 이유는 꼭 싼 가격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100만원 가까이 되는 고가 제품을 사려다보니 더 꼼꼼히 성능 등을 따져야했고, 그래서 선택한 것이 중국산 로봇청소기였습니다.

한 수 아래라고만 여겼던 중국 전자제품들이 한국을 맹추격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턱밑까지 따라온 기술력도 있고요. 이미 한국을 추월한 분야도 속속 나오고 있습니다.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2024에 마련된 중국 TCL 전시관 모습.
최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최대 가전전시회 ‘IFA2024’에서 LG전자의 조주완 최고경영자(CEO)는 이미 중국에 주도권을 뺏긴 로봇청소기 시장에 대해 “우리가 늦은 것은 사실이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중국 기업들에 대한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는데요.

조 CEO는 지난 6일 기자간담회를 연 자리에서 “중국의 TCL과 하이센스를 보니 상당히 많이 (한국 기술력을) 따라왔다”며 “중국은 이제 폄하할 대상이 아니고 무서워할 대상이다”라고 밝혔습니다.

과거 한국 가전기업들이 이런 때가 있었습니다. 개구리가 올챙이였을 시절이죠.

당시 일본 기업들이 프리미엄 시장에 집중하며 가성비 좋은 제품을 만들지 않는 동안 그 틈새 시장을 비집고 들어가 주도권을 차지한 겁니다. 현재 중국 기업이 딱 그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봇청소기 시장이 한 예입니다. 가성비로 밀어부쳤던 중국 가전기업들이 어느 틈엔가 고가 프리미엄 제품으로까지 파고 들었습니다. 쿠팡 등 이커머스에도 속속 침투해 유통망을 넓힙니다.

다나와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로봇청소기 시장에서 판매량 기준으로 점유율을 따져본 결과 ▲1위 로보락(중국) 20.1% ▲2위 샤오미(중국) LG전자 17.7% ▲3위 삼성전자 15.5% ▲4위 에코백스(중국) 10.8% ▲5위 드리미(중국) 4.3% 순위였습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다이슨이 영국 현지 직원의 3분의 1에 달하는 1000여명을 감원키로 한 것을 두고 다이슨의 위기를 야기한 것은 다름 아닌 차이슨(차이나+다이슨)이라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다이슨에서 처음 물걸레 청소 기능을 탑재해 선보인 무선청소기 ‘다이슨 V12s 디텍트 슬림 서브마린’. [사진 = 방영덕 기자]
무선청소기, 날개없는 선풍기 등 혁신적 가전제품을 만들어 온 다이슨을 모방하면서 가격은 10분의 1에 불과한 중국 제품이 전 세계 시장을 잠식하며 다이슨을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분석입니다.

물론 “일주일만 써보면 안다”라거나 “여전히 중국 제품은 싼맛에 쓰는 것”이라는 소비자들의 반응이 있습니다. 중국의 부족한 기술력을 지적하는 목소리입니다.

하지만 모자란 기술력을 뛰어넘을 정도의 무자비한 저가 공세에 두손 두발을 다 드는 국내 기업들이 나오고 있어 우려가 커집니다. LCD(액정표시장치) 관련 사업이 대표적입니다.

지난해 6월 삼성디스플레이는 수년간 중국 기업들이 펼친 저가 공세에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자 LCD 사업에서 철수했습니다.

LG디스플레이도 2022년 국내에서 TV용 LCD 생산을 중단한 데 이어 최근 중국 광저우 공장 매각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중국이 LCD 시장을 장악한 결과입니다.

덩달아 LCD 소재 분야에서도 국내 기업들의 철수는 잇따라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룹 내부에서 LCD 관련 소재를 공급할 곳이 사라진데다 중국과 가격 경쟁을 펼치기엔 수익 악화가 빤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10일 삼성SDI는 편광필름 사업을 중국 우시헝신광전재료유한공사에 1조1210억원에 매각한다고 밝혔습니다. 중국과의 가격 경쟁으로 수익성이 크게 하락해서 입니다.

편광필름은 스마트폰용 화면이나 PC 모니터, TV 화면 등에 탑재돼 선명하고 맑은 화면을 구현하는데 사용되는 핵심 소재입니다.

하지만 최근 수년간 중국기업들이 대량 생산한 편광필름을 저가에 대량 판매하자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지난해 LG화학이 편광판 및 편광판 소재 사업을 중국 업체에 넘긴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LG디스플레이의 중국 광저우 공장 전경. [사진출처=LG디스플레이]
그 모자랐던 기술력이 더 이상 우리보다 한 수 아래에 있는 것도 아니어서 문제입니다. LCD 시장을 석권한 중국 기업들은 OLED(유기발광다이오드)와 같은 최첨단 기술에서도 한국을 바짝 뒤쫓아 오고 있습니다.

시장조사업체 DSCC에 따르면 전 세계 디스플레이 생산능력은 지난해부터 2028년까지 연평균 1.4% 증가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LCD는 연평균 1%, OLED는 연평균 4.8% 성장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OLED 생산능력의 경우 중국이 2023년부터 2028년까지 연평균 8%의 성장률을 기록, 한국의 연평균 성장률(2%)보다 4배 빠른 성장세를 보이며 한국을 추월할 것으로 DSCC는 예상했습니다.

LCD 시장을 중국에 내주고 OLED 시장에 집중하고 있는 한국 기업들로서는 앞길이 캄캄할 수밖에요.

특히 디스플레이는 핵심 전자부품으로 OLED와 같은 최첨단 기술까지 중국 중심의 공급망이 형성되면 그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이 잘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야말로 급성장 중인 ‘차이나 테크(중국의 첨단산업)’.

반도체 분야를 보더라도 미국이 중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시작한 이후 오히려 반도체 첨단 초미세 공정에서 ‘기술 독립’을 이루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제조업 최강국’에서 이제는 ‘신품질 생산력’이란 슬로건을 내걸어 국가 전략 차원에서 육성되다보니 치고 올라오는 속도가 매우 빠르고 매섭습니다.

첨단 기술을 기반으로 나라 경제의 체질을 바꾸고 미국과의 패권 다툼에서 우위를 차지할 생각만 할 뿐입니다.

‘대륙의 실수’란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가격은 저렴한데 생각보다 뛰어난 품질의 중국 제품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여기엔 기술력이 우리보다 한 수 아래인데 실수로 좋은 품질의 제품을 내놓았다고, 중국 기술력을 얕잡아보는 듯한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대륙의 실수란 말로 중국의 기술력을 희화하하는 동안 우리가 놓친 부분은 무엇일까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며칠 전 생활가전사업부 현장을 찾았다고 합니다. 올해 들어 처음이라고 합니다.

인공지능(AI) 기반 제품·기술 전시 공간을 둘러본 이 회장은 전략 제품별 핵심 기술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이건 우리의 독자 기술인가”, “우리가 얼마나 앞서 있나”, “이 기술을 개발하는 모멘텀이 무엇인가” 등의 송곳 질문을 던진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초격차 기술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한 더 많은 고민과 질문들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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