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은 메달로만 남지 않는다. 특히 피겨는 더 그렇다. 단 한 번의 점프 흔들림, 단 한 번의 착지 각도, 단 몇 초의 호흡이 선수의 4년을 바꿔버리는 종목이니까. 그래서 이번 밀라노에서 이해인이 8위, 신지아가 11위로 대회를 마무리한 건 단순한 순위표 이상의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건, 두 선수가 ‘처음 올림픽’이라는 가장 낯선 무대에서 자기 연기를 끝까지 붙잡고 내려왔다는 사실이다. 무너질 이유는 충분했다. 관중의 기세, 링크의 공기,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점수, 뒤에서 기다리는 강자들. 그 모든 압박을 ‘연기’로 눌러낸 순간, 이건 메달이 아니어도 박수를 받을 자격이 충분했다.

이해인은 프리스케이팅에서 140.49점, 총점 210.56점으로 시즌 베스트를 찍고 8위를 만들었다. 숫자만 보면 “무난했다”로 정리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무난하다는 말이 가장 어려운 무대가 올림픽이다. 특히 이해인의 프리 프로그램 ‘카르멘’은 초반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치면 바로 삐끗하는 구성인데, 그는 시작부터 “오늘은 내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신호를 던졌다. 첫 과제였던 더블 악셀-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을 깔끔하게 묶어내며 링크 위의 공기를 확 바꿨다.

이해인의 강점은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꺼내는 순서와 타이밍을 흔들림 없이 지키는 능력이다. 트리플 러츠-더블 토루프-더블 루프 콤비네이션에서도 큰 사고 없이 흐름을 이어갔고, 트리플 살코와 트리플 루프를 차분히 연결하면서 “점프가 점프를 먹는” 연기를 만들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지 성공 여부가 아니라, 점프 직전의 스케이팅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속도가 유지되면 점프의 높이와 회전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고, 그러면 프로그램 전체가 살아난다.

스핀과 스텝에서 이해인의 디테일은 더 또렷했다. 플라잉 카멜 스핀을 레벨4로 처리하며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후반으로 갈수록 흔들리는 선수들이 많은데도 이해인은 오히려 후반부 가산점 구간에서 침착하게 점프를 정리했다. 트리플 러츠와 트리플 플립-더블 악셀 시퀀스를 큰 실수 없이 연결했고, 마지막까지 스텝 시퀀스와 콤비네이션 스핀을 레벨4로 찍어 마무리를 단단히 잠갔다. 연기 끝나자마자 빙판 위에 그대로 누워버린 장면은, 연출이 아니라 진짜 감정이었다. “살았다”는 말이 왜 나오는지, 보는 사람도 알겠더라.

그리고 이해인의 한 마디가 이번 올림픽을 요약한다. “또 도전하고 싶다.” 이건 흔한 소감이 아니다. 올림픽을 한 번 겪어본 선수만이, 그 무게를 알면서도 다시 올라가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있다. 특히 여러 굴곡을 거친 선수일수록 이 말은 더 값지다. 8위가 끝이 아니라, 8위가 ‘다음’의 출발선이 되는 순간이었다.

신지아는 11위로 대회를 마쳤지만, 그의 이번 올림픽은 “순위보다 내용이 더 큰” 대회로 남을 것이다. 쇼트에서 아쉬움이 있었고, 그래서 프리에서는 더 어려운 자리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프리스케이팅에서 141.02점, 총점 206.68점을 받아내며 프리 개인 최고점을 새로 썼다. 올림픽에서 개인 최고점을 찍는다는 건, 경기력이 ‘대회 공기’에 먹힌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공기를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신지아의 프리 ‘사랑의 꿈’은 분위기 자체가 섬세해서, 작은 불안이 보이면 감정선이 툭 끊겨버린다. 그런데 그는 초반 더블 악셀을 안정적으로 밟고 들어가면서 리듬을 잡았고,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도 깔끔하게 묶어냈다. 트리플 살코까지 이어지는 흐름은 “올림픽 무대에서 너무 빨리 달리지도, 너무 조심하지도 않는” 좋은 밸런스였다.

아쉬웠던 장면은 분명 있었다. 트리플 루프 착지에서 중심이 흔들리며 펜스 쪽으로 손이 가는 순간, 보는 사람도 숨을 삼켰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었다. 흔들린 뒤에 무너지느냐, 흔들린 뒤에 복구하느냐. 신지아는 후자였다. 후반 가산점 구간에서 트리플 플립-더블 토루프-더블 루프 콤비네이션, 트리플 플립-더블 악셀 시퀀스를 정리해내며 점수를 다시 쌓았다. 마지막 트리플 러츠도 깔끔하게 처리하면서 “오늘 나는 여기서 주저앉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스핀 레벨에서 아쉬움이 남았고, 특히 플라잉 카멜 스핀 레벨이 낮게 잡힌 부분은 분명 숙제다. 하지만 그럼에도 올림픽 프리에서 개인 최고점을 찍었다는 건, 신지아가 이미 ‘큰 무대용 선수’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신호다. 본인이 “다음 올림픽 욕심이 커졌다”고 말했는데, 그 욕심은 허세가 아니라 근거가 있다. 이번에 얻은 건 점수만이 아니라, 올림픽 링크를 한 번 통과해본 경험과 자신감이다.

이해인과 신지아의 이번 대회를 보면서 확실해진 게 있다. 한국 여자 피겨는 더 이상 “누가 한 명 반짝”이 아니라, 둘이 같이 성장하며 경쟁하는 구조로 가고 있다. 한 명이 안정감으로 버티고, 다른 한 명이 폭으로 치고 올라오는 그림이 가능해졌다는 뜻이다. 4년 뒤 올림픽은 지금보다 훨씬 거칠고 더 잔인하겠지만, 그 잔인함을 견딜 수 있는 선수들은 결국 이런 대회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오늘은 말하고 싶다. 너무 자랑스럽다. 8위와 11위는 ‘아쉽다’로 끝낼 성적이 아니라, “다음 올림픽에서 더 크게 터질 수 있다”는 예고편이다. 그리고 그 예고편은, 기술보다 마음이 무너지기 쉬운 올림픽에서 “끝까지 나를 지켰다”는 점에서 더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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