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러, 외교부 경고에도 “승리는 우리 것” 현수막 내걸어

이하원 외교안보 에디터 2026. 2. 22.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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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원 기자의 외교·안보 막전막후 <99회>]
대형 현수막 설치 후 정부의 철거 요구 거부
도쿄주재 러 대사관엔 아무런 게시물 안 걸려
러 대사, 韓기자들 앞에서 “북한군 참전에 감사” 망언
24일 작년처럼 대사관 밖서 ‘전쟁 지지’ 집회 예고
“한국을 얼마나 얕보면 이렇게 오만하게 나오나”
21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4주년을 앞두고, 서울 중구 정동의 주한 러시아 대사관 건물 벽에 러시아어로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Победа будет за нами)”라고 쓰인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외교부가 현수막 철거를 요구했으나, 러시아 대사관은 거부하고 있다./이하원 기자

오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4주년을 앞두고 서울 중구 정동의 주한 러시아 대사관 건물에 러시아어로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Победа будет за нами)”라고 쓴 대형 현수막이 내걸렸습니다. 우리 정부가 러시아 대사관에 철거를 요구했으나 러시아 측은 이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15m 길이의 대형 현수막

21일 오전 정동제일교회 앞 광장에서 보니 러시아 대사관이 내건 현수막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현수막은 약 15m 길이로 러시아 삼색기를 배경으로 제작됐습니다. 문제의 문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에서 널리 사용된 구호로, 최근에는 러시아 내부에서 침략 전쟁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상징적 표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서울 도심 한복판의 외교 공관 건물에 침략 전쟁 승리를 연상시키는 문구를 게시한 것은 이례적입니다.

혹시 같은 내용의 현수막이 한국과 비슷한 지위의 다른 나라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 걸려 있을지 몰라 같은 날 일본의 지인에게 도쿄 주재 러시아 대사관을 살펴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결과 21일 도쿄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는 러·우 전쟁과 관련해 어떠한 현수막도 걸려 있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21일 일본 도쿄 아자부다이힐스 부근의 러시아 대사관에는 서울의 주한 러시아 대사관과는 달리 러·우 전쟁과 관련한 어떠한 현수막도 걸려 있지 않았다.

서울의 외교가에서는 “다른 나라 한복판에서 침략 전쟁의 승리를 선언하는 문구를 내건 것은 외교적 관례를 크게 벗어난 행위”라는 비판이 비등합니다. 실제로 문제의 현수막과 관련해 유럽 국가를 비롯한 주한 외교 사절들이 우리 외교부에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한국 기자들 앞에 두고 “북한군에 감사하다”

문제는 현수막만이 아닙니다.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는 지난 11일 대사관에서 열린 한국 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러시아는 북한군이 쿠르스크 지역 남부를 우크라이나군과 서방 용병들로부터 해방하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모르지 않는다”며 “북한군의 위대함을 잊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서울에 주재하는 러시아 대사가 한국 기자들 앞에서 북한군 참전에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명했는데,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러·우 전쟁에 참전한 북한군은 실전 경험을 쌓고, 최신 드론 기술 등을 배워 귀국 후에는 주로 휴전선에 배치돼 대한민국을 위협할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 안보에 직·간접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한국 기자들 앞에서 “북한군에 감사한다”고 한 것은 망언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또 2024년 6월 체결된 북·러 간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 조약’을 거론하며 “양국 관계가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섰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북한과 군사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메시지를 한국 사회에 직접 발신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외교부의 경고와 비엔나 협약의 한계

이에 대해 우리 정부는 러시아 대사관 건물의 현수막과 대사의 발언이 “명백히 도를 넘은 행위”라며 경고했습니다. 외교부는 최근 “유엔 헌장을 위반한 러시아가 불법적 전쟁에 대한 입장을 대사관 벽에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대사관 건물에 이 같은 문구를 게시한 것은 한국 국민을 자극할 수 있으며 한·러 관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서울에는 우크라이나 대사관도 함께 주재하고 있는 만큼, 불필요한 외교적 긴장을 조성할 수 있다는 점도 우려했습니다. 외교부는 이같은 논리로 현수막 철거를 요구했으나 러시아 대사관이 거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외교 공관의 불가침을 규정한 비엔나 협약 때문에 물리력을 동원해 이를 뗄 수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러시아 올해도 전쟁 지지 집회 예고

서울의 외교가에서는 최근 러시아가 이 같은 논란을 잇달아 일으키며 한국 정부의 대응 수위를 시험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됩니다. 러시아는 지난해 2월 24일 침공 3주년 때는 정동제일교회 앞 광장에서 대형 국기를 앞세운 전쟁 지지 집회를 열었습니다. 참석자들이 러시아 국기를 들고 행진하기도 했습니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연단에 올라 우크라이나 침공을 ‘특별 군사작전’이라고 부르며 서방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3년 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날은 단극 시대가 끝나고, 공정한 민주적인 다극 국제 질서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날”이라고 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침공 3주년이었던 지난해 2월 24일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맨 앞)가 대사관에서 나와 전쟁 지지 집회를 개최한 후, 대형 러시아기를 들고 대사관까지 행진하고 있다./주한 러시아 대사관 페이스북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올해도 지난해와 유사한 집회를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본지 사회부 기동팀 취재에 따르면 러시아 대사관은 침공 4주년을 맞는 24일 집회를 갖겠다며 남대문 경찰서에 신고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러시아는 침공 1·2주년 당시에는 공개 집회를 갖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수위를 점차 높이고 있다는 분석입니다.

한국 정부 소극적 대응이 러시아 오만하게 해

러시아 관련 사안에 밝은 한 전문가는 “이재명 정부는 장기적으로 남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철도 및 가스관 사업 등을 하고 싶어해 가급적 러시아와 대립하지 않으려 하는데, 러시아가 이를 간파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서울의 외교가에서는 “러시아가 한국을 얼마나 얕보면 이렇게 오만하게 나오겠느냐”는 지적이 나옵니다.

일각에서는 우리 정부의 수세적이고, 소극적인 대응이 러시아를 오만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합니다. 러시아가 북한과의 혈맹 관계를 복원 후, 번번이 한국을 무시하고 있는데도 ‘러시아 특수론’을 내세우며 저자세로 일관한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2024년 12월 러시아가 한국의 주요 산업 시설과 기반 시설을 유사시 공격 목표로 설정했다는 외신 보도가 나왔을 때도 정부는 “엄중히 보고 있다”고 했을 뿐,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정부는 주한 러시아 대사를 불러 항의할 때도 비공개로 초치해 왔습니다. 일본과 관련한 문제는 아무리 작더라도 대사 초치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며 사진이 찍히도록 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한국을 얼마나 얕보면 이렇게 나오나”

이재명 정부 출범 후 국회의원, 대기업 고위 관계자, 학자들이 주한 러시아 대사관을 자주 방문하며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문제로 지적됩니다. 한러 관계를 고려하면 러시아의 침략 전쟁 중에도 교류할 수 있지만, 여당 국회의원이 웃는 얼굴로 러시아 대사와 건배하는 모습 등이 국제사회에 어떻게 비칠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는 겁니다. 전 주러시아 대사 L씨는 “주한 러시아 대사관의 초청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전쟁을 일으킨 나라의 대사관 행사에 참석해서 악수하는 모습 자체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 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한러 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중요한 외교적 과제입니다. 그러나 그 전제는 상호 존중입니다. 대사관 건물에 침략 전쟁 승리를 선언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전쟁 지지 집회를 개최하며 북한군 참전에 대한 감사 발언을 하는 것을 대한민국에 대한 존중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재명 정부가 러시아 대사관의 선을 넘은 행동에 어떻게 대응할 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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