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취재] 벤틀리 뮬리너(Mulliner), 주문제작 부서의 한계를 넘다


지난달 방문한 벤틀리 영국 본사. 임원들과의 인터뷰를 마친 후, 뮬리너 총괄이 자랑스럽게 소개한 ‘뮬리너 스튜디오(Mulliner Studio)’ 탐방 기회를 얻었다. 이곳에서 고객의 옵션을 구현하는 주문제작 과정은 물론, 브랜드 헤리티지를 지키고 알리는 뮬리너만의 비결도 확인할 수 있었다.


글 서동현 기자(dhseo1208@gmail.com)
사진 벤틀리, 서동현


우선 뮬리너(Mulliner)의 역사 소개부터. 시작은 말안장 사업이었다. 1559년 탄생한 뮬리너는 항상 인류의 ‘이동수단’과 관련된 사업을 진행했다. 본격적인 ‘코치빌더(Coach Builder)’로 변신한 시기는 1760년대. 영국 국립 우체국 로열메일(Royal Mail)의 우편마차를 제작하면서 몸집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편마차는 더 빠르고 더 많이 배달할 수 있는 철도가 발전하며 점차 입지가 줄었다. 영국이 처음 우편 철도 배송을 시행한 날짜는 1830년 11월 11일. 맨체스터와 리버풀을 잇는 그리 길지 않은 노선이었다. 시간이 흘러 영국 전역에 철도가 늘어나면서, 우편 마차 서비스는 1846년 런던-노리치 운행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췄다.

R-타입 컨티넨탈

다행히 뮬리너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자동차’ 산업이다. 과거엔 자동차 제조사 대부분이 구동계와 차체를 따로 만들었다. 따라서 차체만 전문적으로 디자인하는 업체, 즉 코치빌더가 활약할 수 있는 시기였다. 피닌파리나와 베르토네, 이탈디자인, 슈퍼레제라, 자가토, 스카글리에티 등이 대표적이다. 대중적인 자동차보다 자신만의 특별한 차를 원하는 이들이 주로 코치빌더에 견적을 의뢰했다.


뮬리너는 벤틀리 창립 초기부터 벤틀리와 연을 맺었다. 1921년 고객 인도를 시작한 벤틀리의 첫 번째 양산차 3리터는, 한 가지 파워트레인에 고객이 선정한 코치빌더의 차체를 얹어 완성했다. 뮬리너도 그들 중 하나였다. 현행 컨티넨탈 GT의 조상 R-타입 컨티넨탈이 대표 사례인데, 총 208대 중 193대를 뮬리너가 제작했다.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두 회사는 롤스로이스의 영향력으로 한 지붕 아래에서 만난다. 롤스로이스가 1931년과 1959년, 각각 벤틀리와 뮬리너를 인수한 까닭이다.


뮬리너 합류 2년 뒤, 롤스로이스는 일찍부터 소유한 또 다른 코치빌더 ‘파크 워드’를 뮬리너와 통합해 ‘뮬리너 파크 워드(Mulliner Park Ward)’로 운영했다. 롤스로이스는 벤틀리를 ‘롤스로이스의 스포티한 버전’으로 마케팅했고, 자연스럽게 벤틀리는 뮬리너의 차체를 꾸준히 사용했다. 이후 1998년, 롤스로이스가 자동차 사업을 매각하면서 뮬리너는 벤틀리의 품에 안긴 채 폭스바겐 그룹으로 들어갔다.

특별한 벤틀리를 위한 뮬리너의 전략

이때부터 뮬리너는 벤틀리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럭셔리한 차로 만들고, 고객의 모든 요구를 현실화하는 데 전념했다. 철학부터 ‘남들이 멈추는 데서 시작한다(We start where others stop)’다. ‘이 정도 했으면 괜찮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은 통하지 않는다. 완벽을 향해 끝없는 고집을 부린 결과, 뮬리너는 총 3단계의 비스포크 서비스를 구성했다.


첫 번째는 비스포크의 기본을 경험할 수 있는 ‘큐레이티드 바이 뮬리너(Curated by Mulliner)’. 미리 엄선한 뮬리너만의 차별화 요소를 고객들에게 제안한다. 얼마 전 국내에 출시한 컨티넨탈 GT 뮬리너가 그중 하나다. 더블 다이아몬드 라디에이터 그릴과 전용 22인치 휠 등으로 외관을 꾸미고, 88가지 대시보드 베니어 컬러와 패턴을 준비했다.

두 번째 단계는 보다 심화적이다. 뮬리너가 디자인의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한다. 1단계에서 ‘컬러’와 ‘재료’를 주로 변형했다면, 이제는 나만의 의미를 담은 로고나 그래픽도 새길 수 있다. 최근 등장한 코리안 리미티드 에디션도 여기에 해당한다. 추상화가 하태임 작가가 자신의 시그니처 컬러밴드로 장식한 컨티넨탈 GT다. 예정 생산 대수는 전 세계 단 10대.


스튜디오의 상담 공간에서 이 과정을 간접 체험했다. 뮬리너 디자이너 휴고 치즐렛(Hugo Chizlett)이 마우스를 톡톡 건드리자, 모니터 속 컨티넨탈 GT가 곧장 형형색색으로 물들었다. 당시엔 공개 전이었던 코리안 리미티드 에디션에 컬러를 어떻게 입혔는지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뮬리너 옵션 적용 범위는 예상보다 훨씬 넓었다. 시트만 해도 테두리 파이핑과 두 줄 스티칭, 등받이에 새긴 다이아몬드 퀼팅, 바닥 쿠션, 시트 뒷판까지 전부 개별적으로 컬러를 지정할 수 있다. 송풍구와 아날로그 시계 테두리 컬러와 헤드레스트 자수 크기도 오너 취향을 따라간다. 여담으로, 벤틀리의 도어 스커트 플레이트에 컬러가 들어간 사례는 코리안 리미티드 에디션이 최초라고 한다.


인테리어 소재도 다양하게 바꿀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든 소재는 ‘돌’이다.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나무와 달리, 돌은 차갑고 차분한 분위기를 낸다. 실제로 인테리어에 들어간 석재는 주변 가죽이나 나무보다 낮은 온도를 유지한다. 대신 다른 소재보다 무거워, 뮬리너는 2억 년 전에 만들어진 점판암과 규암을 0.1㎜ 두께로 썰어 곳곳에 적용했다. 재료는 인도 안드라 프라데시(Andhra Pradesh)주와 라자스탄(Rajasthan)주에서 가져온다.

실내외 색상과 내부 소재, 각양각색 휠 등을 고르고 나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벤틀리가 탄생한다. 경우의 수만 ‘약 460억’ 가지에 달한다. 누군가의 벤틀리와 사양이 겹칠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다. 이러한 희소성이 부자들의 소유욕과 호기심을 이끌고 지갑을 열게 만든다. 브랜드와 호흡을 맞춰 자신의 차를 그려내는 건 흔한 경험이 아니니까.

개인 맞춤 프로그램 외에 뮬리너가 직접 기획한 스페셜 컬렉션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날 스튜디오 내부에선 르망 24 내구레이스 우승 역사를 담은 컨티넨탈 GT 제작이 한창이었다. 2003년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한 스피드 8 레이스카 엔트리 넘버를 그릴에 새기고, 대시보드와 도어 플레이트에 지금까지 우승 기록을 담았다.


압권은 대시보드 중앙 다이얼이다. 실제 스피드 8 레이스카의 V8 4.0L 트윈터보 엔진에서 가져온 밸브가 자리했다. 대학교 실습 시간에 수없이 만져본 부품이지만, 이날 마주한 밸브에선 은퇴한 챔피언이 풍기는 묵직한 위압감을 느꼈다. 작은 금속 덩어리에 벤틀리의 모터스포츠 정신과 우승 경력에 대한 자부심, 특별함을 추구하는 브랜드의 노하우가 똘똘 뭉쳐 있었다.

코치빌더로서의 존재감을 높이다

마지막 단계는 진정한 ‘코치빌딩’이다. 차체의 모든 디자인을 책임졌던 옛날처럼 소량 생산 스페셜 모델을 만든다. 먼저 2002년에는 코치빌딩으로 영국 왕실과 돈독한 관계를 쌓았다. 고(故)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50주년을 기념해 만든 스테이트 리무진이 주인공이다. V8 6.75L 엔진을 품은 아르나지 R을 개조해 단 두 대만 제작했다.


스테이트 리무진에서 찾을 수 있는 ‘맞춤형’ 포인트는 지붕 높이다. 차체를 옆에서 바라보면, 문짝과 유리창의 높이가 거의 비슷할 정도로 키가 크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고개를 숙이지 않고 차에 탈 수 있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의전차답게 장갑 및 지뢰 방호, 생화학 테러 등을 대비한 기술까지 넣었다. 지금은 찰스 3세 국왕의 의전차로 활약 중이다.

일반인들이 손에 넣을 수 있는 한정판도 선보였다. 2020년 데뷔한 바칼라(Bacalar)는 지구상에 열두 대만 존재한다. 베이스 모델은 컨티넨탈 GTC. 여기에 브랜드 100주년 기념 콘셉트카 EXP 100 GT의 외모를 씌웠다. 이미 GQ 매거진 ‘올해의 콘셉트카’에 오를 정도로 검증받은 디자인이었다. 재해석은 뮬리너 전문 디자이너들이 모인 ‘뮬리너 디자인 팀’이 주도했다.


이들은 기존 벤틀리 디자인 공식을 살짝 비틀어 유니크함을 더하고, 지붕을 완전히 걷어내 오픈탑 럭셔리 그랜드 투어러로 탈바꿈시켰다. 옐로 플레임, 모스 그린 등 외장 페인트에는 쌀 껍질을 섞어 메탈릭한 느낌을 한층 강조했다. 각종 탄소섬유강화플라스틱(CFRP) 부품들은 W12 6.0L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의 잠재력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더불어 영국산 천연 양모와 영국 동부 펜랜드(Fenlands) 지역 강에서 건져 올린 5,000년 전 나무도 아낌없이 넣었다. 나머지는 고객의 의견을 따랐다. 대시보드 소재와 시트 가죽 컬러, 14만8,199개 스티치로 완성하는 ‘Bacalar’ 자수 디테일 등을 직접 정한다. 바칼라 1대를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은 약 6개월. 대량생산 차종과 비교하면 상당히 긴 시간이지만, 그 보상이 전 세계 12대 한정판이라면 기다림의 가치는 충분하다.

바칼라로 능력을 펼치기 시작한 뮬리너는 지난해 8월, 후속 모델 바투르(Batur)를 발표했다. 이번에도 기본 틀은 컨티넨탈 GT였다. 대신 바칼라보다 파격적이었다. 맹수가 웅크린 듯한 측면 실루엣만 그대로일 뿐, 요즘 벤틀리와 전혀 다른 디자인 언어를 지녔다. 초롱초롱한 원형 헤드램프는 온데간데없고, 날개를 닮은 램프와 입체적인 라디에이터 그릴이 자리했다.

또한 가늘게 늘린 리어램프 주변 패널과 뒷바퀴 펜더의 ‘칼주름’을 펴내, 스포티함보다 부드럽고 우아한 감성을 구현했다. 실내도 마찬가지다. 스코틀랜드 저탄소 가죽과 이탈리아산 태닝 가죽, 스웨이드와 비슷한 질감의 다이나미카(Dinamica)로 꼼꼼히 감쌌다. 화룡점정은 센터콘솔에 얹은 주행 모드 다이얼. 극한의 정교함을 위해 18K 금을 3D 프린터로 출력했다.


동승석 대시보드엔 독특한 파형을 새겼다. 이는 보닛 아래 W12 6.0L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의 사운드를 시각화한 장식이다. 바투르는 W12 엔진을 쓰는 마지막 벤틀리. 2024년 4월 단종을 선언했기에 의미가 남다르다. 12기통 시대의 마지막을 기념하고자 출력은 극한으로 높였다. 750마력, 최대토크 102㎏·m의 폭발적인 힘은 단 18대의 바투르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바투르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전기차’에 대한 힌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025년 공개 예정인 첫 번째 벤틀리 전기차에 바투르의 디자인 녹아들 전망이다. 본격적인 전동화와 디자인 혁신을 한 번에 치른다는 점에서, 벤틀리가 차세대 전기차에 얼마나 힘을 쏟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한 세기 넘는 역사를 되짚는 뮬리너

바칼라와 바투르로 ‘코치빌딩’의 정수를 뽐낸 뮬리너. 다른 한편에선 브랜드의 오랜 역사를 되새기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상징적인 벤틀리를 완벽하게 복원하는 ‘컨티뉴에이션 시리즈(Continuation series)’다. 4년 전, 뮬리너는 과거 전쟁 폭격으로 망가진 1939년식 코니쉬(Coriche)를 되살리며 클래식카 복원 사업에 대한 가능성을 엿봤다. 이후 첫 컨티뉴에이션 모델로 1929년식 블로워(Blower)를 점찍었다.


블로워는 1920년대 후반에 태어난 레이스카다. 당시 모터스포츠에선 5.0L 이상 대배기량 엔진이 주를 이뤘다. 반면 벤틀리 드라이버 중 한 명인 팀 버킨(Tim Birkin)은 비교적 낮은 배기량의 엔진에 수퍼차저를 달아 ‘경량화’와 ‘고출력’을 모두 노렸다. 그렇게 240마력 4½L 엔진을 적용한 블로워를 레이스에 투입한다. 블로워라는 이름도 실린더에 공기를 불어넣는 과급기에서 유래했다. 안타깝게도 우승은 하지 못했으나, 블로워의 막강한 수퍼차저 엔진은 놀라운 퍼포먼스로 관객들에게 짙은 인상을 남겼다.

뮬리너 클래식 부서는 차체 분해부터 시작했다. 이를 레이저로 스캔해 3D 설계 프로그램에 입력하고, 630개의 파트로 나눠 가상의 블로워를 완성했다. 여기까지 1,200시간이 걸렸다. 다시 조립할 땐 철판을 두드리고 리벳으로 고정하는 등 과거의 제작 방식을 따랐다. 8,000㎞의 트랙 테스트 및 3만5,000㎞의 실제 도로 운행까지 실시한 결과, 4만 시간 만에 21세기 블로워 1호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앞으로 총 12대를 만들어 고객에게 인도할 계획이다.

다음 주자는 스피드 식스(Speed Six)다. 블로워와 동시대에 활동해 1929·1930년 르망 우승을 차지한 역사적인 레이스카다. 저배기·과급기 조합보다 고배기량을 선호했던 창립자 W.O. 벤틀리의 의견으로 직렬 6기통 6.6L 엔진을 썼다. 출력은 블로워보다 40마력 낮은 200마력. 하지만 평균 시속 133.6㎞으로 총 2,844㎞를 달려 우승해, 단번에 르망 무대에서 이름을 떨쳤다.

스피드 식스 복원 과정은 현장에서 직접 확인했다. 차를 둘러싼 10명 내외의 장인들이 총책임자의 지시에 따라 작업을 이어갔다. 차 안에 부품명을 적은 듯한 메모를 붙이고, 일말의 상처도 내지 않도록 신중한 자세로 볼트를 조였다. 짧은 순간에도 오랜 시간 합을 맞춰온 팀이라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다. 보안상의 이유로 그들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찍어두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짧지만 알찼다. 뮬리너는 벤틀리 고객뿐만 아니라 자동차 마니아들이 열광할 요소들로 가득하다. 고객 요구를 실현하는 주문제작 부서의 역할은 기본.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새로운 결과물을 제시한다. 그러나 선은 절대 넘지 않는다. 벤틀리가 가진 럭셔리 브랜드로서의 위상을 지키면서 예비 고객을 끌어당기기 위해 고민한다.


유서 깊은 브랜드 역사도 능숙하게 다룬다. 모두가 더 멀리 가는 전기차를 만드는 데 혈안인 지금, 약 90년 전 레이스카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건 뚜렷한 목표와 가치관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다행히 효과도 확실하다. 컨티뉴에이션 시리즈가 생애 첫 벤틀리인 고객도 있다고 한다. 이렇듯 뮬리너는 벤틀리의 매력을 무한대로 증폭시키는 영혼의 파트너로 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