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매일 쓴 편지… 빅토르 위고가 평생 놓지 못한 한 여인!

[홍성광 번역가]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의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는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이다. 또한 서양 문학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독서와 시 창작에 매료되었던 위고는 일기에 “나는 샤토브리앙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지 않겠다”라고 기록해 두면서, 불과 11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문호가 되리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대문호를 꿈꾼 그는 많은 여성들과의 연애 사건으로도 유명했다. 그의 애정행각은 결혼 이후 말년까지 계속됐다. 첫사랑이자 아내의 결혼과 배신의 아픔을 겪지만 끝내 혁명과 휴머니즘의 대 서사시『레 미제라블』의 바탕이 된 한 연인의 헌신적인 사랑은 드라마만큼 극적이었다.

불행한 첫사랑과의 결혼

빅토르 위고의 아버지는 나폴레옹 휘하의 군인이었고, 어머니는 왕당파 집안의 여인이었다. 위고는 소년 시절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란 아델 푸셰(Adèle Foucher, 1803∼1868)를 사랑했다. 문학과 거리가 멀었던 평범한 소녀, 아델은 위고에게 이상적인 아내이자 ‘미의 화신’이었다. 위고는 첫 사랑에게 약 200통의 연서를 보내며 독점적인 사랑을 고백했다. 편지를 통해 그녀를 삶과 문학의 중심이자 구원자로 여겼다. 두 사람은 집안의 반대 속에서도 1822년 결혼했다.

하지만 이 결혼은 역시 아델을 사랑한 위고의 형 외젠 위고의 정신 붕괴라는 비극을 초래할 정도로 집안의 충격이 컸고 마치 결혼후의 불행을 예고하는 듯했다. 결혼한 아델은 위고의 초기 문학 활동을 헌신적으로 지원하며 다섯 자녀를 낳았다. 그러나 장남은 요절했고 장녀 레오폴딘은 1843년 익사했다.

젊은 시절 빅토르 위고의 초상화(1825년)
빅토르 위고의 첫사랑이자 아내 아델 푸셰의 젊은시절 모습

결혼생활은 위고의 시집 『숙고』에 깊은 흔적으로 남았다. 부부 사이도 거리감이 짙어졌다. 아델은 더 이상 뮤즈가 아닌, 침묵 속에서 비극을 견디는 존재로 떨어졌다. 위고는 『에르나니』의 성공으로 문학적 정점에 올랐으나, 과도한 열정과 가부장적 태도를 보였고 가정에 소홀했다. 지친 아델은 남편의 친구 생트-뵈브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결국 불륜이 드러났다. 위고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며 사과했지만, 배신의 상처는 치유받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혼하지 않은 채 겉으로만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다.

빅토르 위고에게 사랑은 개인적 격정이자 문학적 원천이었고, 작품 속 영원한 사랑의 테마로 승화되었다. 특히 망명 시절과 파리 귀환 후에는 많은 젊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말년에도 파리의 귀부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애를 즐겼다. 그러나 그 수많은 사랑과 관계 속에서도,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사랑은 배우 출신인 줄리에트 드루에였다. 위고의 사랑 이야기는 그의 시와 소설에 깊이 반영되어 있다.

아델 푸셰의 흔적은 위고의 작품 곳곳에 배어 있다할 것이다. 시집『숙고』에서는 상실과 부부의 균열이, 『레 미제라블』의 불쌍한 모녀 팡틴과 코제트에게서는 헌신과 침묵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는 여성상이 반영되어 있다. 혁명과 영웅을 그린 위고 문학의 이면에서, 현실 속 아내 아델의 삶이 문학적 형상으로 지속해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2공화국 국회의 대표 시절 위고의 초상화(1848년)
쥘리에트 드루에의 초상화

새로운 불꽃, 평생의 동반자 '쥘리에트 드루에'

그렇지만 사랑을 잃은 위고의 마음은 이미 낙엽 진 들판처럼 공허할대로 공허했다. 그러다가 다시 새싹이 돋아났다. 그의 새로운 연인은 파리 최고의 미인 중 한 명이자 배우였던 쥘리에트 드루에(Juliette Drouet, 1806~1883)였다.

1833년, 줄리에트는 위고의 희곡 『뤼크레스 보르자Lucrèce Borgia』 공연에서 공주역을 맡으면서 위고와 가까워졌다. 그들은 이내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위고는 훗날 그녀와의 첫 만남을 ‘폐허를 가로지르는 새벽빛’에 비유했다. 그는 쥘리에트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한다.

“당신의 눈빛이 처음 내게 다가왔을 때 새벽 광선이 폐허를 가로지르는 듯 내 가슴 속까지 비추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곧 위고의 연인이자 사실상의 평생 동반자가 되었다. 평판이 좋지 않았던 여배우였지만, 위고를 향한 사랑은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 그는 마침내 그녀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고, 그녀가 과거를 정리하겠다고 하자 과거에 대해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연기 생활을 청산하고 위고의 연인이자 비서로 헌신하기 시작했다.

반면 위고는 그녀의 빚을 갚아주고 다른 남자를 만나지 말라는 조건을 걸었으므로 보호와 소유가 뒤섞인 관계를 맺었다. 그럼에도 쥘리에트는 평생 위고 곁을 지키며 원고 정리와 교정을 도왔다. 낙엽만 쌓였던 공허한 들판 같았던 그의 마음은 다시 창작의 기쁨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두사람은 1852년 나폴레옹 3세에 의해 망명길에 오른다. 그 망명길에서 위대한 『레 미제라블』이 완성된다.

빅토르 위고. 사진=위키백과

"친위쿠데타에 반대" 망명길에 오른 연인

아버지가 나폴레옹 장군의 휘하 군인이었던 위고는 조카였던 나폴레옹 3세(루이 나폴레옹)에 대해서도 질서를 회복할 인물이라며 호감을 갖고 대통령 당선을 지지했다. 그러나 루이 나폴레옹은 점차 권위주의적인 본색을 드러내며 언론의 자유를 탄압했고,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을 시도하자 그를 '소 나폴레옹(Napoléon le Petit)'이라며 맹렬히 비난했다. 대통령 임기연장이 불가능해지자 루이 나폴레옹은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반대파를 숙청하기 시작했다.

위고는 이에 맞서 '저항위원회'를 만들어 시민봉기를 촉구하고 직접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쿠데타 세력은 위고에게 현상금을 걸고 수배령을 내리자 목숨이 위태로와진 위고는 연인 쥘리에트 드루에의 도움으로 벨기에 브뤠셀로 탈출하며 그의 긴 19년간의 망명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1859년 나폴레옹 3세가 사면령을 내렸지만 "자유가 돌아오기 전까지 나도 돌아가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이 고통스러운 망명 기간 동안 그의 대표작인 『레 미제라블』이 완성됐다. 쥘리에트는 끝까지 위고를 동행하며 고립된 망명 생활을 함께 견뎠다. 그녀는 연인을 넘어 동지이자 ‘문학 비서’로서 위고의 삶과 작품을 떠받치는 존재가 되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6월 봉기 장면.

연인들이 서로 주고받은 연서

위고와 쥘리에트는 1833년부터 약 50년 동안 거의 매일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편지들은 단순한 연서를 넘어 문학적 가치를 지닌 글로 평가될 정도로 수준 높았다. 쥘리에트의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도 빛났다. 그녀는 늘 자신을 낮추며 위고의 재능과 영광 앞에서 겸손과 헌신을 드러냈고, “당신의 그림자라도 되고 싶다”는 말로 사랑을 표현했다. “나는 당신의 빛을 가리는 그림자가 아니라, 언제나 따라다니는 작은 그림자이기를 원합니다.”

이런 표현은 『레 미제라블』에서 코제트가 연인 마리우스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며 ‘그림자처럼’ 곁에 머무는 모습과 비슷하다. 실제로 쥘리에트는 코제트가 자신의 그림자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쥘리에트는 위고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당신의 삶을 지탱하는 작은 돌이라도 좋아요.”

배우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수십 년간 위고 곁을 지킨 쥘리에트의 헌신은, 『레 미제라블』에서 코제트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는 팡틴의 사랑과 닮아있다. 쥘리에트는 오직 위고를 통해서만 자신이 존재한다고 말하며 극단적인 자기희생의 언어를 남겼다. “당신의 숨결이 멈춘다면, 나도 존재할 이유가 없어요.”

이 고백은 『레 미제라블』 후반부에서 코제트가 마리우스에게 전하는 사랑의 언어와 그대로 겹친다. 이처럼 줄리에트의 사랑이 위고의 소설 속으로 직접 스며들었음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열정적인 관계는 『레 미제라블』 집필 시기(1845~1862) 전후 둘의 편지들을 통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둘 사이에는 단순한 연애를 넘어 거의 경배에 가까운 사랑과 헌신이 오갔다. 위고는 쥘리에트를 ‘나의 천사’, ‘나의 별’, ‘나의 두 번째 영혼’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에 대해 쥘리에트는 ‘너는 나의 우주이고, 내 기도의 유일한 대상’이라고 쓴다.

1846년 위고가 보낸 편지를 보면 쥘리에트는 위고에게 피난처이자 구원의 역할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관계는 '장 발장'과 코제트의 관계와도 겹친다. 장 발장은 사회와 법의 박해 속에서 살아가지만, 코제트를 지키는 일에서 삶의 의미와 구원을 발견한다. 위고 자신이 쥘리에트에게서 체험한 ‘구원의 사랑’을 코제트에게 느끼는 장 발장의 부성애에 투영한 셈이다.

'레 미제라블' 삽화에 등장하는 코제트

창작의 원동력 쥘리에트

위고는 자신의 작품에서 거창한 사회적·정치적 메시지를 쓰면서도, 그것을 가능하게 한 내적 원동력을 쥘리에트에게서 찾았다. 이는 쥘리에트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레 미제라블』도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고백으로 읽히기도 한다. 작품 속에서 코제트가 마리우스에게 “나는 당신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이는 쥘리에트의 편지 톤과 위고의 답장에서 오간 정서와 유사하다고 평가된다. 이처럼 줄리에트와 위고의 편지는 단순한 연애편지가 아니라, 『레 미제라블』 속 사랑과 구원, 빛과 어둠의 주제와 직결된다. 즉 『레 미제라블』의 중심에 있는 사랑과 헌신의 힘은 위고가 쥘리에트 드루에와 주고받은 편지들 속 경험이 구체적으로 문학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쥘리에트는 위고의 말년까지 함께 했고, 1870년대 파리 코뮌 같은 정치적 격변기에도 위고를 곁에서 지켰다. 이처럼 그녀는 위고에게 있어 삶의 동반자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들의 편지와 사랑의 밀어는 『레 미제라블』의 사랑 이야기 속에 은밀히 반영되어 있다. 1883년 쥘리에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위고는 깊은 슬픔에 잠겼다. 그녀가 죽고 몇 달 뒤 위고도 병약해져 1885년에 사망했다.

빈민들의 시신을 옮기는 영구차에 실려 팡테옹으로 이동하는 빅토르 위고의 시신.

위고의 사랑은 아델과의 결혼에서 시작된 상처와 배신에서 쥘리에트와의 만남이후 헌신과 동행으로 이어진 이야기이다. 그의 삶에서 아델은 첫사랑과 환멸이었고, 쥘리에트는 구원과 평생의 반려였다. 아델과의 사랑은 사회적 제도 위에 세워진 ‘합법적 사랑’이었으나 배신과 상처로 무너졌지만, 위고는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동시에 여러 여성과 관계를 맺기도 했다. 쥘리에트 드루에는 열정과 희망으로 시작해 평생을 함께 한 ‘실질적 사랑’이었다. 그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한결같이 위고의 곁을 지켰다.

위고에게 사랑은 개인적 격정이자 문학적 원천이었고, 작품 속 영원한 사랑의 테마로 승화되었다. 특히 망명 시절과 파리 귀환 후에는 많은 젊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으며, 말년에도 파리의 귀부인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애를 즐겼다. 그러나 그 수많은 사랑과 관계 속에서도, 그의 삶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사랑은 배우 출신인 쥘리에트 드루에였다.


※ 홍성광은 서울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독문학박사로, 독일 문학 및 철학 관련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니체의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실러의 『도적들』,『간계와 사랑·빌헬름 텔』,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소송』,『변신 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