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영국 광부는 실업수당이라도 있었는데 [박찬일의 ‘칼과 책’]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사 펴냄
안 읽어도 읽은 것처럼 착각하는 고전 중에는 〈1984〉나 〈동물농장〉이 있지 싶다. 줄거리는 아는 듯한데, 막상 읽었느냐고 묻는다면 얼버무리게 되는.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그런 사람들이 먼저 읽으면 좋다. 술술 읽히고, 오웰이 어떤 사람인지 깊고 빠르게 찔러오기 때문이다. 소설이란 진실과 창작 사이를 이리저리 에둘러 가는 법이라 작가의 의도를 눈치 채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는 그런 게 없다. 분노와 고통스러운 시선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책은 1937년, 그러니까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려고 떠나기 직전에 출판됐다. 아시다시피 내전 참가 경험은 〈카탈로니아 찬가〉가 되었고, 그 전에 〈위건 부두로 가는 길〉과 유사한 르포르타주를 한 권 쓴 바 있다. 국내에는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이 몇 권의 책은, 오웰의 작가적 명성을 떠나 르포르타주란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해주는 책이다. 작가가 대상 안으로 들어가서 밀착한다는 고전적 다큐멘터리 방식을 쓰고 있는 까닭이다.
오웰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신문기사조차 여전히 ‘카더라’ 소설급의 헐렁한 전달을 일삼던 때라 더욱 오웰의 방식은 독자의 체온을 빨리 데운다. 그는 종종 어린애처럼 투덜거리고 격분하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아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해서 전달한다. 그는 이렇게도 쓴다. “이런 식의 노동을 내가 했더라면 몇 주 만에 죽어버렸을 것이다.”
1980년 4월25일의 신문 1면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우리 집은 ‘J일보’를 보고 있었는데, 밥술을 못 뜨는 일이 있어도 신문은 봐야 한다는 어머니의 고집 때문에 살던 산동네에서는 보기 드문 일간지 구독자였다(물론 신문 값을 못 내고 떼먹은 일도 있다). 그날의 신문을 잊지 못하는 건 1면에 아주 큰 제목과 함께 매 맞는 여자의 사진이 실렸기 때문이었다. 몸에 줄이 감겨 포박되고 머리가 헝클어진 중년 여자가 구타당해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사에서 ‘린치’라는 말을 썼던 걸 생생히 기억한다. 내가 집단 폭력을 의미하는 린치란 말을 그 기사로 배웠기 때문이다. ‘사북읍이라는 탄광지역에서 광부들이 난동을 피웠다, 폭도가 된 그들은 사용자들을 구타했고 폭행당한 이들 중엔 노동조합장의 부인도 있다, 바로 이 사진 속 인물이다.’ 이런 기사였다.
사북 사태 당시 린치당했다는 여인의 사진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서 뜻밖에도 한 앰뷸런스 이미지로 넘어간다. 내 기억으로는 고등학교 때 처음 본 〈실천문학〉인 듯하다. 골 깊은 어두운 산길을 노란 불빛을 밝히며 질주하는 앰뷸런스 한 대를 그린 작품이었다. 황재형이라는 화가. 그는 태백에서 광부 생활도 하고, 거기서 얻은 경험으로 현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앰블런스’도 그중 한 작품이다. 이 그림이 압권인 것은, 앰뷸런스가 질주하는 좁은 길을 포위한 강원도 깊은 산이 벌벌 떨고 있는 묘사 때문이다.
우리는 그때 연탄을 때고 살았다. 연탄은 연료를 넘어 ‘생활’이었다. 툭하면 신문에 ‘광부 몇 명 매몰 사망’이라는 뉴스가 나오던 때라 그들이 얼마나 모진 작업환경에서 일하는지 도시의 아이들도 알았다. 그때를 살던 많은 이들이 이 그림 한 장으로 연탄에서 광부로 생각이 넘어갔으리라. 열량에서 사람으로.
1936년 영국의 막장에는 노조가 있었다
평생 그림을 보고 놀란 적이 두 번 있다. 로마에서 본 카라바조의 그림, 그리고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황재형의 ‘앰블런스’. 유홍준의 책에는 이 그림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태백에 답사 갔다가 저 ‘앰블런스’ 그림을 사게 된다. 그의 아내가 선택했는데, 그림의 느낌이 너무 어두워 그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태백에서 지물포를 운영하는 마을 아저씨와 대화하게 된다.
“당신은 서울 사람이지···. 당신은 몰라. 저녁나절에 앰뷸런스가 울리면 세상이 이렇게 보인다구. 나는 광부 생활 20년 하구 이 가겟방 하며 사는데 지금두 이런 때면 소름이 돋아요. 제일 싫다구.” 이 일화를 전하면서 유홍준은 스스로가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했다. 자신의 미학적 척도로 황재형의 작품을 평가했던 것을 말이다. 아마도,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은 당시 영국 독자들의 반응도 비슷했을 것이다. 도저히 사람이 살 만한 곳이라고 할 수 없는 열악한 탄광지대, 그리고 인간이 하는 노동으로 믿어지지 않는 탄광 일의 묘사는 당대 영국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다.
막장이란 실제로 탄을 캐는 현장이다. 탄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캐는데, 그냥 지표면을 벗겨내고 삽으로 탄을 ‘뜨는’ 일은 없다. 탄은 탄맥을 따라 땅 밑으로 이어지는데 몇 킬로미터까지 수직과 수평, 또는 기울어진 갱도로 이어진 끝에서 캔다. 이는 오웰의 영국이나 한국이나 비슷한 것 같다. 두 곳 다 막장이 있다.
오웰은 아주 키가 컸다. 그는 막장까지 도달하는 데 아주 애를 먹는다. 허리를 구부리고 몸을 낮춘 자세로 몇 킬로미터를 가야 막장에 이를 수 있다. 세세히 그의 묘사를 옮겨 적는 것도 고통스럽다. 그는 “예전에는 임산부들도 이 통로를 따라 이동해서 탄을 캤다”라고 쓴다. 아동노동도 당연한 일이었다. 갱도가 좁아서 키 작은 사람이 환영받았다. 아동들을 갱도에 처넣었다.
“(거의 벌거벗은 채로) 온몸이 시커메진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놀랍도록 빠르게 삽을 휘둘러 석탄을 뜬다. 휴식 시간이란 게 없으니 그들은 이론상으로 전혀 쉬지 않고 일곱 시간 반을 일한다. 단 실제로는 가져온 도시락을 먹느라 교대하는 동안 15분쯤 시간을 주기는 한다. 도시락은 대개 비계 바른 빵 한 덩이와 차가운 차 한 병이 전부다···.”
오웰은 광부들의 수입도 아주 세세하게 조사해서 싣고 있다. 그는 한 광부가 매주 4실링 3페니를 공제하고 임금을 받는다는 대목에서도 각 항목을 상세히 적어놓았다. “보험(실업과 건강) 1실링 5페니 (···) 노조 회비 6페니.” 취재 당시인 1936년 영국의 막장에서는 실업·건강보험이 실시되었고, 노조도 있었다는 뜻이다. 그 실제 구성이야 어떻든 이게 왜 부러운지. 1930년대 영국 광부는 그래도 실업수당이 있고 병원에 다닐 수 있었는데, 1980년대 한국의 광부들은 목에 탄가루를 씻어낸다고 삼겹살에 소주를 부었다.
여담인데, 이런 오웰의 시기를 거쳐서 영국은 1970~1980년대 탄광지역 몰락을 겪는다. 이 시기의 이야기가 나중에 영화로도 나와서 아마도 많은 독자들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는 데 큰 위화감이 없을 것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영화 〈빌리 엘리어트〉 〈풀 몬티〉 〈브래스드 오프〉, 그리고 〈나의 올드 오크〉의 켄 로치 감독을 기억한다면.
박찬일 (셰프)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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