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대가 보여주는 K-돌판 아이돌 구하기
얼마 전 넷마블의 자회사에서 신인 걸그룹을 론칭했다. 〈캐치마인드〉 〈모두의 마블〉 〈세븐나이츠〉 등의 역작을 낸, 게임회사 ‘넷마블’이 맞다. 걸그룹의 이름은 메이브로, 멤버 4명 모두가 실존하지 않는 ‘버추얼 휴먼’이다. 어떤 이들은 이 그룹을 ‘학폭(학교폭력)과 사생활 논란이 없는 아이돌’이라 부른다.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명칭이다.
그런가 하면 메이브 뮤직비디오의 한 댓글에서는 ‘This made me realize that the things I love about humans are mostly their flaws(내가 사람에 대해 사랑하는 것들은 대부분 그들의 결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줬어)’라고 쓰기도 한다. 버추얼 휴먼 걸그룹을 향한 서로 다른 댓글들은 아이돌을 향한 아이러니한 마음을 그대로 투사한다. 우리는 ‘최애’가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는 완벽한 존재이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결점을 지닌 한 명의 사람이기를 원한다. 이 복합적인 마음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리고 이런 욕구들이 분별없이 교차하는 ‘돌판(아이돌 세계)’ 안에서 아이돌들은 어떻게 살아남고 있을까.
수년 동안 독자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웹소설 〈데뷔 못하면 죽는 병 걸림〉(이하 〈데못죽〉)은 케이팝 생태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 아주 좋은 교과서다. 〈데못죽〉은 카카오페이지에서 연재 중이며 2023년 2월 기준으로 4억 뷰를 넘어섰다. 지난해부터는 웹툰으로 각색되어 카카오웹툰에서 연재되고 있다. 〈데못죽〉의 인기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다. 〈데못죽〉의 주인공 '박문대'가 속한 작중 아이돌 그룹 ‘테스타’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활자돌(활자 아이돌)’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정도다. 말 그대로 웹소설 안에서 활자를 통해 만들어진 아이돌이라는 뜻이다.
‘활자돌 신드롬’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지난해 9월에는 웹소설 출판본과 함께 ‘테스타’ 멤버들의 포토 카드와 주인공 박문대의 미니 포스터, 슬로건 등을 굿즈로 제작해 판매했다. 현재도 출판사에서는 〈데못죽〉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포토 카드, 공식 향수, 명찰 등을 제작해서 판매하고 있다. 독자들은 마치 실존하는 아이돌을 ‘덕질’하듯, 웹소설 작품 속 아이돌 그룹의 굿즈를 구매한다.
〈데못죽〉은 오랫동안 공시생으로 시험을 준비했던 주인공 ‘류건우’가 갑작스럽게 ‘박문대’라는 인물에 빙의하며 시작된다. 게다가 박문대로 눈을 뜬 시점은 이미 건우가 한 번 겪어본 바 있는 3년 전이다.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지? 어리둥절해하는 문대 앞에 ‘데뷔가 아니면 죽음을!’이라는 상태 이상 메시지가 뜬다. 마치 게임 오류처럼 말이다. 문대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건우는 알지 못하지만, 무엇보다 연예계와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안에 아이돌로 데뷔하지 않으면 죽음을 맞게 되리라는 가혹한 조건이 주어진다. 갑작스럽게 3년 전으로, 게다가 생판 모르는 사람 몸에 들어온 것도 당혹스러운데 아이돌이라니? 그러나 죽지 않기 위해서라면 어쨌든 무언가 해야 한다. 마침 문대에게는 빙의·회귀하며 자기 능력을 게임 캐릭터 능력치처럼 볼 수 있는 어드밴티지가 주어진다. 일정한 조건을 달성하면 포인트를 획득하여 원하는 능력을 한 단계씩 향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가창, 춤, 끼, 외모 같은 것들이다.
소속사는커녕 지인조차 없는 문대가 1년 안에 아이돌로 데뷔할 방법이 있을까? 이모저모 궁리하던 그가 생각해낸 것이 ‘아이돌 주식회사’(이하 ‘아주사’)다. ‘아주사’는 아이돌을 주식에 비유하여 만들어낸 아이돌 연습생 서바이벌 예능 프로그램으로, 〈프로듀스 101〉과 유사한 포맷이다. ‘아주사’의 캐치프레이즈는 바로 ‘지금, 날아오르려는 아이돌에게 투자하세요’. 아이돌을 주식 상품으로, 팬들을 주주로 치환하는 노골적인 포맷이다. 팬들은 주주가 되어 아이돌의 주식을 매수(인기 투표)하거나 매도(반대 투표)할 수 있다. 팬들은 자신이 점찍은 이들의 순위를 올리기 위해 있는 힘껏 돈을 쏟아부어야 하고, 참가자들은 그들대로 ‘주주’들에게 어떻게든 어필해서 표를 받아야 한다. 인기를 주식 삼은 전쟁터 그 자체인 셈이다.
팬의 시선을 내재화한 주인공
〈데못죽〉의 ‘아주사’도, 그리고 ‘아주사’ 이후도 이제 고작 10~20대 초반인 아이돌에게 너무나 잔혹한 세계다. 여기에서 문대의 독특한 위치성이 드러난다. 여러 웹소설 주인공은 대개 갑작스러운 계기를 통해 세계 최강자가 되곤 하는데, 문대는 그들과 같은 의미의 ‘최강자’는 아니다. 3년 후의 미래를 볼 수 있다거나 능력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요소는 분명 문대에게 유리한 환경을 제공한다. 그러나 문대는 ‘최강자’라기보다 상황과 전략을 파악할 수 있는 ‘협력가’다. 동료들이 심사위원의 날 선 코멘트로 좌절에 빠지거나 루머에 휩쓸려 꿈을 포기하려 할 때, 문대는 자신의 이전 경험을 십분 활용하여 이들을 위기에서 구원한다.
문대가 동료를 돕는 건, 그가 능력이 뛰어난 ‘먼치킨’이어서가 아니다(먼치킨은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아주 강력한 플레이어를 뜻한다). ‘아주사’에는 그보다 훨씬 더 능력이 뛰어난 참가자들이 쟁쟁하다. 문대가 빛나는 것은 그가 팬의 시선을 내재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대는 팬과 아이돌이 함께 어우러진 이 세계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 물론 본인은 아르바이트했을 뿐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작품 속에서 그가 일상적으로 팬을 대하는 마음에는 팬과 아이돌에 대한 존중이 밑받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슈가 터졌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떤 말을 하고 또 하지 말아야 하는지 문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돌판’을 오랫동안 서성이며 여러 아이돌의 성공과 쇠퇴를 보아왔기 때문이다. 문대는 초월적인 능력을 통한 화려한 구출극이 아니라 애정 어린 조언을 통한 소소한 개입으로 가능성을 지닌 다른 동료들이 섣불리 주저앉지 않도록 돕는다. ‘어른들’인 소속사·제작진은 외면하는 참가자들에게 경쟁자인 문대가 손을 내미는 것이다.
문대는 아이돌이면서 팬이다. 그가 말과 행동을 신중히 고르는 건 비단 ‘리스크 대처’가 아니라 팬들이 상하지 않았으면 하는 염원에서다. 동시에 그는 팬의 시각에서 동료 아이돌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살뜰히 챙긴다. 기실 아이돌 산업은 아이돌과 팬 모두를 뜨겁게 불태움으로써 유지되는 시장이다. 〈데못죽〉은 이러한 아이돌 산업의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사랑을 말한다. 열정과 사랑, 응원과 지지만큼 비난과 조롱, 실망과 한탄이 지배적인 이곳일지라도 서로의 마음을 지켜주고 무엇보다 존중하자고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박문대’를 쭉 기다려온 게 아닐까.
조경숙 (만화 평론가) editor@sisain.co.kr
▶좋은 뉴스는 독자가 만듭니다 [시사IN 후원]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