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의 대표 건물로 읽는 프랭크 게리

프랭크 게리는 어쩌다 구겨진 건물을 만들게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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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경제 발전을 위해 대부분의 지자체가 커다란 랜드마크를 세운다. 사람이 몰리고, 돈을 벌어줄 거라 한다. 하지만 그 결과가 성공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는 말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여기 그 어려운 일을 건물 하나로 해낸 사람이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무너져가는 스페인의 도시 빌바오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이야기다. 한번쯤 그 이름을 들어봤거나, 혹은 한번쯤 그의 뒤틀리고 구겨진 건물을 보았거나. 그는 어떻게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가 될 수 있었을까. 6채의 대표 건물로 프랭크 게리의 역사를 들여다봤다.


프랭크 게리 디자인의 출발점, 할아버지의 철물점

출처: Architectual Digest

게리 하우스, 1979 산타모니카 미국 프랭크 게리는 1929년 캐나다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이 드문 캐나다 토론토에서 프랭크 게리는 비교적 우울한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또래 친구들은 그를 유대인이라며 놀려댔고, 이는 친구가 아닌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의 할아버지는 작은 철물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유독 프랭크 게리를 아꼈던 그의 할머니는 토요일 아침마다 철물점에서 사용하고 남은 나무와 철판 조각으로 작은 미래 도시 모형을 만들며 함께 놀았다. 이 놀이 경험은 훗날 프랭크 게리의 모형 중심의 설계 방식과 금속 합판과 골판지 등의 소재 선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과정 중에 프랭크 게리는 재료의 본성에 대해 본능적으로 탐닉하기 시작했고, 이는 구부러지고 휘어진 훗날 건축물의 특성으로 이어진다. 한편 프랭크 게리는 아버지와도 자주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고 회고한다. 이처럼 프랭크 게리는 유년 시절 가족으로부터 건축적인 동시에 예술적인 영감을 받으며 성장했다.

프랭크 게리가 처음 건축가로 이름을 알리게 된 건 자신의 집인 ‘게리 하우스’를 설계한 이후부터다. 유년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강철과 목재 합판 등의 싸구려 재료를 조합해 만든 디자인은 일종의 판자집과 같은 모습이었고, 그 기괴함에 마을 사람들은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괴팍한 건물을 통해 무명의 프랭크 게리는 유명세를 얻었고 훗날 이 건물은 미국 건축가 협회의 가장 권위 있는 ‘25년 상’을 수상하게 된다.


프랭크 게리를 닮은 도시, 로스 엔젤레스

출처: Raymond Boyd / Getty Images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2003 로스 엔젤레스 미국 프랭크 게리가 18살이 되던 1947년 그의 가족은 캐나다에서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이주하게된다. 그는 트럭으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교를 다녔다. 처음 프랭크 게리는 로스엔젤레스 시립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수많은 원소들과 씨름하던 그는 이내 화학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결론지었고,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는 유년시절의 자신이 어머니와 함께 박물관에 가는 것을 좋아했고, 음악과 그림을 즐겼으며, 무엇보다 할머니와 모형을 만들던 순간이 기억에 사무쳤다고 회고했다. 프랭크 게리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건축과 수업을 듣기 시작했고, 학교를 옮겨 건축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프랭크 게리의 가족은 다시 케임브리지로 이주하게 되는데 그는 마침내 이곳 하버드 디자인 대학원에서 도시계획을 공부하게 된다. 훗날 프랭크 게리는 직장을 위해 다시 로스엔젤레스로 돌아왔다.

로스엔젤레스 특유의 온화한 날씨와 분방한 분위기. 과연 그의 가족이 로스엔젤레스가 아닌 다른 도시로 이사했다면 프랭크 게리의 선택이 지금과 같았을까. 프랭크 게리를 연구하는 많은 이들은 그의 건축적인 특징이 로스엔젤레스와 많은 유사성을 지닌다고 말한다. 1998년 프랭크 게리는 자신의 정서적 고향인 로스 엔젤레스의 기념비적인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완공까지 약 5년이 걸린 건물의 이름은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프랭크 게리의 가장 상징적인 이미지, 구겨진 철판으로 점철된 건물은 로스 엔젤레스의 명소를 넘어 ‘미국을 바꾼 10개의 건물’로 선정됐다.


프랭크 게리는 사실 컴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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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마르케스 데 리스칼,  2005 엘시에고 스페인 프랭크 게리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모델 작업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모든 작업은 모델에서 시작해서 모델에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델 작업에서 구조적인 문제를 파악하는 동시에 해결하고, 디테일 등 모든 작업을 모델에서 판단, 결정한다. 프랭크 게리의 건축 역사에서 꼭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로 ‘CATIA’ 시스템이다. 본래 항공기, 자동차 디자인에 사용되던 ‘CATIA’는 프랭크 게리가 원하는 정밀도로 철재 패널을 비틀고 구부릴 수 있었다. 흡사 우주 전함을 닮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이 탄생할 수 있었던 건 다 이 소프트웨어를 통해 철저한 모델 작업을 거쳤기 때문이다. 프랭크 게리의 ‘CATIA’ 시스템은 이후 자하 하디드와 같은 유명 건축가의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정작 프랭크 게리는 컴퓨터에 그리 밝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스스로를 컴맹에 가깝다고 소개한다. 컴퓨터 작업 이전 그는 철저하게 모형을 통해 재료의 특성과 구조 세부 등을 연구한다고 밝혔다. 그의 프로젝트 전시에 공개된 수백 개의 건축 연구 모형은 세간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도저히 당시의 컴퓨터로는 불가해한 창의적인 구조 역시 수많은 모형을 통한 모델 작업의 결과다. 프랭크 게리의 여러 건물 중 가장 구부러지고 비틀린 작품을 고르자면 그건 단연 스페인의 와리너리 호텔 ‘마르케스 데 리스칼’이 아닐까. 포도나무의 비틀린 형상을 토대로 벽돌 건물 위에 얹은 티타늄 캐노피는 마치 미래의 피라미드를 연상케 한다.


예술가인가? 건축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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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싱 하우스, 1996 프라하 체코 대학원을 졸업한 프랭크 게리는 로스엔젤레스 주재의 건축 설계 사무소 빅터 그루엔에서 잠시 근무하게 된다. 이후 파리로 떠난 그는 그곳에서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창작의 저변을 넓혀간다. 그가 당시 고류하던 예술가들의 목록은 제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센버그, 리차드 세라 등. 여러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받은 영감은 그를 건축가와 에술가의 경계에 선 인물로 이르게 한다. 한편 바바라 아이젠버그가 쓴 프랭크 게리의 인터뷰집 <프랭크 게리와의 대화>에서 그는산드로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램브란트, 앙리 마티스, 조르지오 모란디와 같은, 세기와 양식을 넘나드는 회화 작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부 평론가들은 이런 그를 두고 예술적 형식에 집착한 나머지 기능과 효율을 간과한 낭비적 건축이라고 비판한다. 프랭크 게리의 대표 건물 중 하나인 프라하 체코의 ‘댄싱 하우스’ 역시 위와 같은 비판을 받은 사례다. 비평가들은 바로크, 고딕, 아르누보 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고도 프라하에 근본 없는 키치 양식의 건물이 들어서며 주변 경관을 해친다고 비난했다. ‘건축가인가? 예술가인가?’라는 질문은 프랭크 게리의 평생을 꼬리표처럼 따라다닌다. 하지만 그는 한 인터뷰에서 이같은 분류에 대해 “쓸 데 없는 질문”이라며 일축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불리워도 좋으며, 그저 예술과 관련된 건축물을 만들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프랭크 게리는 건축 뿐만이 아닌, 다양한 인스톨레이션 작업과 의자 등을 디자인하며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드러내기도 했다. ‘댄싱 하우스’는 지금 프랭크 게리의 가장 상징적인 건물로 남았다.


건물 하나로 죽어가던 도시를 되살리다

출처: Jeremy Horner / Getty Images

구겐하임 미술관, 1997 빌바오 스페인 1991년 프랭크 게리는 인생을 바꿀 만한 제안을 받는다. 바로 스페인의 항구 도시 빌바오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한 건물을 지어달라는 제안이다. 광업 도시인 바스크 지방의 빌바오는 산업 구조의 변화에 따라 1970년대부터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인구는 끊임 없이 감소하고 도시는 점점 슬럼화 되어가고 있었다. 이에 바스크 정부가 꾀한 대책은 문화예술산업을 통한 경제부흥. 그 일환으로 바스크 정부는 미술관 건립을 계획했다. 정부는 프랭크 게리에게 다소 무리한 제안을 하게되는데 그것은 공업 도시 빌바오의 분위기에 역행하는 동시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건물을 지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랭크 게리는 이 도전을 받아들이고 개발에 착수했다. 그렇게 지어진 건물이 바로 그 유명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다.

빛이 반사되는 티타늄 외벽의 우주 전함을 연상케 하는 외관,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은 금세 유명세를 탔고, 1997년 개관 이후 빌바오는 매년 1백만 명이 찾아오는 문화예술도시로 탈바꿈했다. 건물 하나로 도시 전체의 번영을 꾀하는 일. 사람들은 이를 두고 ‘빌바오 효과’라고 일컫기 시작했다.


한국 최초의 프랭크 게리 ‘루이 비통 메종 서울’

출처: Yong Joon Choi / LVMH

루이 비통 메종 서울, 2019 청담 한국 2019년 가을, 프랭크 게리의 건물이 서울 한복판에 들어선다고 했을 때, 모두가 기대에 사로잡혔다 프랑스 파리에 이어 프랭크 게리가 루이 비통을 위해 만든 두 번째 건물 ‘루이 비통 메종 서울’. 프랭크 게리는 네모난 형태 위에 얹혀진 수원 화성의 포탑 지붕과 동래학춤의 춤선에서 건물의 이미지를 착안했다고 전했다. 한편 빛을 최대한 건물에 끌어오기 위해 주로 사용하던 금속이 아닌, 스페인에서 직접 공수해온 유리로 패널을 마감했다. 마치 건물 위를 유영하는 하얀 돛단배의 이미지. 프랭크 게리는 ‘루이 비통 메종 서울’을 보고 도포 자락이 떠오른다고 말하기도 했다. 프랭크 게리의 비교적 최근작인 ‘루이 비통 메종 서울’은 프랭크 게리가 90세에 완공한 건물이다. 우리는 얼마나 더 프랭크 게리의 건물을 볼 수 있을까? 올해 94세를 맞은 그는 아직 은퇴하기에 너무 바쁘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