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티어링을 처음 돌리는 순간 차의 성격이 드러난다. 르노 필랑트는 급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차체를 단단히 잡은 채 조용히 방향을 바꾼다. 스티어링을 조금 더 깊게 꺾으면 차는 운전자의 의도를 이해한 듯 자연스럽게 코너 안쪽으로 파고든다. 크로스오버라는 차체 형식을 생각하면 의외의 움직임이다.
르노코리아가 한국 시장에 새로운 플래그십 모델을 투입했다. 이름은 르노 필랑트. 프랑스어로 별똥별을 뜻한다. 자동차 역사에서 이 이름은 낯설지 않다. 1956년 미국 보네빌 소금사막에서 시속 300km를 기록했던 실험차 '에투알 필랑트(étoile filante)'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속도를 상징했던 별똥별의 이름이 이제는 브랜드 전략의 중심에 놓였다.

르노코리아의 최근 흐름을 보면 이 차의 위치가 분명해진다. 시장에서 브랜드 존재감을 끌어올린 모델은 이미 있었다. 르노 그랑 콜레오스다. 중형 SUV 시장에서 예상보다 빠르게 판매가 늘었고 브랜드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필랑트는 그 흐름 위에서 등장한 모델이다. 볼륨 모델이 시장을 넓혔다면 필랑트는 라인업의 정점에서 브랜드의 기술과 디자인 방향을 설명한다.
이 차는 르노 그룹의 글로벌 전략 '인터내셔널 게임 플랜 2027(International Game Plan 2027)' 아래 등장했다. 유럽 중심 구조에서 벗어나 글로벌 시장에서 새로운 성장 거점을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은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중형과 준대형 차량 개발 및 생산 허브로 지정됐고 필랑트 역시 부산 공장에서 생산된다. 한국 시장을 겨냥한 모델이면서 동시에 중남미와 중동 등 글로벌 시장 수출까지 고려한 차다.

차체 크기는 길이 4915mm, 너비 1890mm, 높이 1635mm다. 휠베이스는 2820mm다. 숫자만 보면 전형적인 E세그먼트 크로스오버다. 그러나 실제 인상은 SUV보다 낮은 세단에 가깝다. 루프 라인이 뒤쪽으로 매끄럽게 떨어지고 차체 비율도 길고 낮다. 르노가 이 차를 세단과 SUV 사이의 크로스오버라고 설명하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이다.

전면부에서는 로장주 로고를 중심으로 구성된 라이팅 그릴이 시선을 끈다. 입체 구조의 그릴 안쪽에서 로고가 빛난다. 위쪽은 차체 색과 연결되고 아래쪽은 블랙으로 마감됐다. LED 헤드램프와 DRL이 함께 연출하는 웰컴 라이팅도 인상적이다. 시동을 켜는 순간 자동차와 사용자가 연결되는 장면을 연출한다.
측면에서는 긴 윈도 라인과 완만한 루프 곡선이 특징이다. 뒤쪽으로 갈수록 차체가 낮아지며 플로팅 리어 스포일러로 이어진다. 리어 윈도는 가파른 각도로 기울어 있으며 와이퍼 없이 설계됐다. 공기 흐름을 고려한 공력 설계다. 이런 디테일은 디자인 완성도뿐 아니라 고속 안정성까지 고려한 결과다.

실내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르노는 이 공간을 '프리미엄 테크 라운지(Premium Tech Lounge)'라고 설명한다. 대시보드에는 세 개의 12.3인치 디스플레이가 이어진 오픈알(openR) 파노라마 스크린이 자리한다. 계기판과 센터 디스플레이, 동승석 화면이 하나의 파노라마처럼 연결된다. 디지털 인터페이스가 차량 경험의 중심이 된 시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인포테인먼트 시스템에는 티맵(TMAP) 기반 내비게이션이 들어간다. 여기에 AI 음성 어시스턴트 에이닷 오토(Adot Auto)가 결합된다. 운전자의 주행 패턴과 일정 정보를 학습해 목적지를 제안하고 차량 기능을 제어한다. LLM 기반 자연어 대화도 가능하다. 차량 주변 상황을 실시간으로 분석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주행 패턴을 바탕으로 목적지를 추천한다. 자동차가 점점 소프트웨어 플랫폼으로 변하고 있는 흐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파워트레인은 하이브리드 E-테크(Hybrid E-Tech) 시스템이다. 1.5ℓ 터보 직분사 가솔린 엔진과 두 개의 전기 모터가 결합된다. 시스템 최고 출력은 250마력이다. 구동 모터는 100kW, 시동 모터는 60kW다. 배터리는 1.64kWh 리튬이온이다. 도심 주행에서는 최대 약 75% 구간을 전기 모드로 주행한다. 공인 복합 연비는 15.1km/ℓ다.
변속기는 르노 특유의 멀티모드 오토 기어박스(Multi-Mode Auto Gearbox)다. 3단 기어와 듀얼 모터를 결합한 구조다. 전기 모드와 엔진 모드가 자연스럽게 전환된다. 변속 과정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르노 필랑트의 주행 감각은 편안함과 안정성 사이의 균형을 중심에 둔다. 차는 처음부터 공격적으로 달리도록 세팅된 모델이 아니다. 대신 다양한 속도 영역에서 차체 움직임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서스펜션은 앞 맥퍼슨 스트럿, 뒤 멀티링크 구조다. 여기에 스마트 프리퀀시 댐퍼(Smart Frequency Damper, SFD)가 결합된다. 이 장치는 노면에서 전달되는 진동의 주파수를 분석해 감쇠력을 자동으로 조절한다. 빠르고 잔잔한 진동에서는 댐퍼를 부드럽게 풀어 승차감을 높이고, 차체 움직임이 커지는 상황에서는 감쇠력을 높여 차체를 단단히 지지한다.
고속도로에서의 주행 감각은 안정적이다. 차체가 노면 위에 차분하게 얹혀 있는 느낌이 이어진다. 노면의 미세한 진동은 대부분 걸러지고 스티어링 입력에 대한 반응도 과격하지 않다. 속도가 올라갈수록 차의 성격이 더 분명해진다. 차체 중심이 낮게 유지되면서 긴 차체가 노면을 길게 붙잡는다. 장거리 이동에서 피로를 줄이는 세팅이다.

와인딩 로드에서는 차체의 균형이 눈에 띈다. 크로스오버 차체지만 코너 진입에서 과도한 롤이 발생하지 않는다. 차체가 한쪽으로 크게 기울기보다 네 바퀴가 노면을 고르게 붙잡는다. 스티어링을 더 깊게 돌리면 차는 예측 가능한 궤적으로 코너 안쪽으로 들어간다.
하이브리드 시스템의 특성도 주행 감각에 영향을 준다. 전기 모터가 초기 가속을 담당하면서 출발은 조용하고 매끄럽다. 가속 페달을 더 깊게 밟으면 내연기관이 자연스럽게 개입한다. 두 동력원이 교차하는 순간에도 동력 전달이 끊기지 않는다. 멀티모드 기어박스의 특징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브레이크 페달 감각도 안정적이다. 회생 제동과 기계식 브레이크의 전환이 비교적 자연스럽다. 감속 과정에서 페달 감각이 갑자기 변하지 않는다.

차체 강성 역시 안정적인 움직임을 만드는 요소다. 르노는 차체 구조의 약 18%에 핫프레스포밍 부품을 적용했다. 강성이 높은 차체는 서스펜션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고속에서 차체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숙성도 눈에 띈다. 전 트림에 액티브 노이즈 캔슬레이션(Active Noise Cancellation)이 기본 적용된다. 알카미스(Arkamys) 사운드 시스템이 기본이며 보스(BOSE) 서라운드 시스템도 선택할 수 있다. 이중접합 차음 유리와 강화된 흡차음 설계가 더해져 실내는 비교적 조용하다.

가격은 친환경차 세제 혜택 기준 약 4331만9000원에서 5218만9000원 사이에 형성된다. 국산 준대형 SUV와 수입 하이브리드 SUV 사이에 놓인 가격대다.
이 지점에서 필랑트의 시장 전략이 보인다. 국내 자동차 시장은 지금 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하나는 대형 SUV 중심의 고급화 흐름이다. 다른 하나는 효율을 중시하는 하이브리드 확대다. 필랑트는 그 두 흐름 사이에 위치한다.
차체는 준대형급이다. 파워트레인은 효율 중심의 하이브리드다. 가격은 국산과 수입차 사이를 겨냥한다.

국내 시장에서 하이브리드 SUV는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세그먼트다. 현대 싼타페 하이브리드와 기아 쏘렌토 하이브리드가 시장을 이끌고 있고 수입차에서는 렉서스 NX와 RX가 존재감을 유지한다. 필랑트는 그 사이에서 새로운 선택지를 만들려 한다.
그랑 콜레오스가 르노코리아의 존재감을 다시 끌어올린 모델이라면 필랑트는 그 위에 놓인 모델이다. 라인업의 정점에서 브랜드의 디자인 방향과 기술 수준을 보여준다.
별똥별은 짧은 순간 지나가지만 강한 흔적을 남긴다. 르노 필랑트가 남길 흔적이 어떤 모습일지는 이제 시장이 답할 차례다.
SPECIFICATION
길이×너비×높이 4915×1890×1635mm
휠베이스 2820mm
공차중량 1765kg
엔진형식 I4 터보 가솔린 + 하이브리드
배기량 1499cc
시스템 최고출력 250ps
엔진 최대토크 25.5kg·m
구동모터 100kW
시동모터 60kW
변속기 3단 멀티모드 오토
구동방식 FWD
0→100km/h -
최고속도 -
연비 15.1km/ℓ
가격 4331만9000원~5218만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