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야, 너도 야구하자”…‘미스터 LG’ 김상훈과 ‘노송’ 김용수 전설의 시작

[이재국의 엘팬알백] ⑪1984년 김상훈, 1985년 김용수의 청룡 입단 스토리

'노송' 김용수와 '미스터 LG' 김상훈이 다정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김용수가 야구를 시작한 것은 동대문중학교 1학년 시절 같은 반 야구선수 친구였던 김상훈의 권유 때문이었다. ⓒLG트윈스
“용수야, 너도 같이 야구하자.”
“에이, 내가 무슨 야구를….”
“야, 넌 야구도 안 배웠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폼이 좋냐. 벌써 야구선수야. 내가 볼 땐 넌 야구를 해야 할 것 같아.”

1973년 봄. 동대문중학교는 연례행사처럼 펼쳐지는 반대항 야구대회를 개최했다. 까까머리 김상훈과 김용수는 1학년 2반 대표로 뽑혀 대회에 참가했다.

김상훈은 이미 이문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한 뒤 동대문중학교에 진학한 엘리트 야구선수. 반면 김용수는 동네야구만 해봤던 일반 학생이었다.

봄꽃처럼 피어 난 둘의 우정은 훗날 MBC 청룡, 나아가 LG 트윈스까지 이어지게 된다.

1984년 먼저 입단한 김상훈은 ‘미스터 청룡’에서 ‘미스터 LG’로 불리며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고, 1985년 시즌 중반 뒤늦게 입단한 김용수는 ‘노송’이 되어 KBO 최초 영구결번식의 전설을 만들었다.

[엘팬알백-LG 트윈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11번째 이야기는 1980~1990년대 MBC 청룡과 LG 트윈스 시대를 관통하는 투·타의 핵 김용수와 김상훈의 입단 스토리다.

MBC 청룡 시절의 김용수. 이때는 별명이 '노송'이 아니라 '면도날'이었다. ⓒ스포츠서울

◆초교부터 두각 드러낸 김상훈, 중2 때 야구 시작한 김용수

“중학교 1학년 때 반대항 야구대회에 (김)상훈이와 함께 뛰었어요. 그때 제가 야구 룰을 몰라 경기 도중에 교체돼 그라운드에서 쫓겨났던 기억이 납니다. 하하. 초등학교 때 신문지를 접은 글러브로 동네야구만 몇 번 해봤으니 야구를 몰랐죠. 상훈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를 잘했고, 중학교 들어오자마자 1학년 때부터 3번타자에 우익수, 투수를 봤을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어요.”

김용수는 50년도 더 지난 추억을 회상하며 웃는다.

1960년생. 작은 체격에도 불구하고 ‘면도날’ 같은 제구력으로 KBO리그 마운드를 지배했던 그도 이제 65세가 됐다.

김용수의 말처럼 김상훈은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이문초등학교 시절부터 천부적인 야구재능을 발휘했다. 중학교 때 이미 훤칠한 키에 야구도 잘해 동대문 일대에 소문이 자자했다.

김용수는 현역 시절에도 키 176㎝에 불과할 정도로 왜소했지만, 중학교 시절엔 더 작았다.

그런데 고수의 눈엔 고수가 보였던 것일가. 김상훈이 반대항 야구대회에서 야구 룰도 몰라 쫓겨난 친구에게 야구를 권유했으니 말이다.

김용수는 그런 친구의 말에 귀가 솔깃해 야구부에 들어갔다. 하지만 배트로 엉덩이를 맞는 그 시절의 체벌문화를 몇 번 경험하더니 한 달 만에 야구를 그만뒀다.

그런데 먼발치에서 야구부 유니폼을 보니 그렇게 멋있어 보였다. 중학교 2학년 올라가기 전 봄방학 때 제 발로 다시 야구부에 들어갔다.

첫날 번트 수비훈련을 할 때였다. 타자에게 배팅볼을 던져주던 선배가 김용수에게 "3루 쪽에 가 있다가 공을 잡으면 나한테 던져 달라"고 했다. 키도 작고 비쩍 마른 김용수가 1루까지 공을 던지기 어렵다고 지레짐작한 모양이다.

그런데 김용수가 번트 타구를 잡은 다음에 마운드의 선배에게 던지지 않고 1루수에게 다이렉트로 던졌다. 빠르고 정확한 송구에 선배가 놀랐다.

“야, 다시 던져봐.”

김용수는 또 빠르고 정확하게 1루에 송구했다.

“야, 따라와.”

선배는 운동장 뒤쪽 불펜으로 김용수를 데리고 가더니 피칭을 해보라고 했다.

누구에게도 야구를 배운 적이 없지만 투구폼도 예뻤고, 공을 때릴 줄 알았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정확한 제구력을 자랑했다. 그 길로 김용수는 투수가 됐다.

김용수는 이를 두고 “신이 준 선물”이라며 웃었다. 강한 어깨와 ‘면도날’ 같은 커맨드는 그의 말처럼 하늘에서 준 재능이었던 셈이다.

김상훈은 동대문상고 시절 청소년대표를 지내며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고교 졸업 후 1년 동안 쉬다가 동아대 80학번이 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스포츠서울

◆대학 진학하면서 엇갈린 운명

김상훈과 김용수는 동대문중학교에서 그렇게 야구를 함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한 울타리에 있는 동대문상고로 함께 진학했다.

그 시절 동대문상고 전력은 약했다. 김상훈은 타자 외에 투수로도 활약했다. 김용수와 원투펀치로 나섰다.

특히 타격에 출중한 실력을 발휘한 김상훈은 고교 3학년 때인 1978년 9월 베네수엘라에서 열린 제10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 선수로 발탁됐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사상 최초로 준우승을 차지했고, 김상훈은 대회 올스타 격인 ‘베스트 나인’에 1루수로 선정될 정도로 맹활약했다.

당시에는 세계대회에서나 아시아대회에서나 3위 이상으로 입상만 하면 병역혜택이 주어졌다. 성인대표는 물론 청소년대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김상훈은 이 대회에서 군 면제를 받았다.

호사다마일까. 뜻하지 않은 일이 발생했다. 김상훈은 연세대에 진학하는 걸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동대문상고 측 내부 문제(선수 끼워팔기)가 꼬이면서 원서 발급이 안 돼 입학이 무산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1년을 허송세월하다 결국 1980년 부산 동아대로 진학하게 된다. 김상훈이 동기들보다 1년 늦은 ‘80학번’이 된 이유다.

반면 김용수는 일찌감치 중앙대 진학이 결정돼 ‘79학번’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친구였지만 여기서부터 둘의 운명이 엇갈리게 됐다.

MBC 청룡 시절의 김용수. 키도 작지만 당시 몸도 상당히 말랐다. 하지만 김용수는 입단 초기부터 믿기지 않는 구위와 커맨드를 자랑했다. ⓒ스포츠서울

◆김용수, 1983년 지명 받고 한일은행으로 간 까닭은?

“용수야, 그냥 빨리 MBC에 입단하면 좋겠다.”

1983년 초. MBC 청룡의 야구 선배 이해창, 김용달, 정영기가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김용수 집으로 직접 찾아와 입단을 설득했다. 중앙대 시절 혼자 거의 모든 경기에 등판하다시피한 김용수가 MBC에 지명을 받았지만 실업팀 한일은행 입단을 놓고 고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온 것이었다.

“내가 또 우승제조기 아니냐. 나도 MBC에 입단하기로 했으니 너도 그냥 프로에 들어와라. 우승 한번 같이 해보자. 용수가 MBC에 온다면 우리 투수진에 큰 힘이 될 것 같다.”

1953년생으로 최선참인 이해창이 김용수의 프로행을 계속 설득했다. 이해창은 1982년 프로 출범 당시 MBC에 지명을 받았지만 9월에 열리는 세계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주장을 맡아 1년간 프로행이 유보돼 있던 상태였다.

MBC 청룡 시절의 이해창. ⓒ스포츠서울
“일단 실업팀으로 간 뒤에 병역부터 해결하고 2년 후에는 꼭 MBC에 입단하도록 하겠습니다.”

난감해진 김용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 프로행을 주저했다. 그러더니 얼마 뒤 실업팀 한일은행에 입단했다.

그러자 이번엔 MBC 청룡 프런트 고위 간부가 한일은행 선수단이 전지훈련을 하는 대구까지 찾아왔다. 청룡으로선 우승에 도전하려면 마운드 보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김용수와 최후의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김용수는 선배들에게 했던 이야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대 동기 중에 유성룡이 있었어요. 1983년 MBC에 먼저 입단했는데 백인천 감독 훈련량 때문에 죽겠다는 거예요. 저는 그때만 하더라도 체력이 없어서 훈련도 짧게 했거든요. 강제로 훈련을 많이 하는 게 싫었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래서 MBC에 안 가고 일단 한일은행에 갔던 겁니다. 제가 대학 시절까지 제구력은 괜찮았지만 프로에 가서 내 볼이 통할지 확신을 하지도 못했고요.”

김용수는 MBC 입단을 미룬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제는 웃으면서 털어놓을 수 있는 얘기다.

사실 김용수는 중앙대 3학년 시절부터 야구판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한일은행에 들어간 뒤 1983년 벨기에에서 열린 제6회 대륙간컵국제야구대회 때 생애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 이후엔 국가대표 붙박이 투수가 됐다. 1983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공동우승을 차지하면서 병역혜택을 받았고. 1984년에는 LA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되면서 이름값을 높였다.

1984년 MBC 청룡에 입단하자마자 어린이 팬들에게 인기를 얻은 김상훈이 사인을 해주고 있다. ⓒ스포츠서울

◆1984년 김상훈 입단, 청룡 1루수 지각변동

대학을 1년 늦게 들어가 동아대 ‘80학번’이 된 김상훈은 1984년 신인드래프트에서 MBC 청룡에 지명됐다. 당시 1차지명은 연고지 내 고졸 선수에 한해 무제한으로 영입할 수 있었던 시대. MBC는 1순위로 동국대 우완투수 김봉근(상문고 출신)을 찍은 뒤 2순위로 동아대 1루수 김상훈(동대문상고 출신), 3순위로 한양대 내야수 김경표(신일고 출신) 등을 차례로 선택했다.

“사실 저도 그냥 실업야구 은행팀으로 갈까 고민을 하다가 MBC에 입단하게 됐어요. 그때만 해도 프로야구에 대해 잘 몰랐고, 안정적인 은행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게 괜찮지 않나 생각했던 거죠. 결국 나중에 ‘미스터 LG’라는 과분한 별명도 얻었으니 프로에 들어가길 잘한 거죠. 허허. 제가 야구를 조금 더 잘했어야 했는데.”

2015년 SPOTV 해설위원을 끝으로 야구계를 떠나 족발집 사장님으로 변신한 김상훈의 말이다.

40년도 더 지난 MBC 입단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스터 LG'는 슬며시 웃었다.

그는 현재 경기도 시흥시청이 있는 장현동에서 ‘장현족발’을 운영하고 있다.

“이제 한 10년 됐는데 그럭저럭 괜찮다”면서 “단골손님도 꽤 있다”며 웃는 걸 보니 안착을 한 모양이다.

왕년의 '미스터 LG' 김상훈의 최근 모습. 메이저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홈구장 스카이돔을 찾았다. ⓒ김상훈 제공

국가대표 출신의 김상훈은 계약금 1500만 원, 연봉 1200만 원의 조건에 MBC 유니폼을 입었다. 입단할 당시 MBC 1루수로는 원년 멤버인 김용달과 김바위가 있었고, 이종도도 외야수에서 1루수로 변신해 미트를 끼기도 했다.

MBC는 1984년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1승도 올리지 못하고 1무4패로 패퇴한 뒤 김동엽 감독과 재계약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끈 어우홍 감독을 새롭게 영입해 지휘봉을 맡겼다.

어 감독은 1983년 동아대 감독으로 부임해 김상훈과 1년을 함께한 인연이 있는 사제지간. 그런데 개막전 선발 라인업에서 김상훈의 이름은 없었다.

김상훈은 "자존심이 상했다"고 당시 상황을 돌이켰다.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선발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경기 도중 배트를 들고 복도 뒤에서 시위를 하듯 휘두르며 혼자 울분을 삼켰다.

하지만 주머니 속의 송곳은 주머니를 뚫고 나오기 마련. 간간이 돌아오는 대타 기회에서 안타를 치기 시작했고, 선발로 출장하면 4타수 4안타를 생산하기도 했다. 5할 안팎의 타율을 기록하자 자연스럽게 김상훈이 1루수 미트를 끼는 날이 많아졌다.

전기리그가 한창 무르익어 가던 6월 15일, 올스타 팬투표 최종 결과가 발표됐다. 김상훈은 1984년 신인 중 롯데 재일교포 홍문종과 함께 '베스트10'에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루키였지만 김상훈은 팬들도 인정할 만큼 매섭게 방망이를 돌리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깔끔한 외모. 여기에 시원한 타격까지. 김상훈은 서서히 MBC 청룡의 간판타자로 부상하면서 어느 순간 ‘미스터 청룡’이 됐다. 그리고 럭키금성 그룹이 청룡을 인수한 뒤로 그는 ‘미스터 LG’라는 별명으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MBC 청룡 시절 김상훈의 타격 모습. 1980년대 야구잡지 주간야구에 실린 사진이다.

◆1985년 ‘선동열 파동’, 김용수에게도 불똥

김용수는 친구 김상훈보다 대학을 1년 먼저 들어갔지만, 프로는 1년 뒤에 입단하게 됐다. 앞서 설명한 대로 1983년 지명을 받고도 한일은행에 입단해 2년간 활약했기 때문이다.

집으로 찾아온 선배들 앞에서, 전지훈련지까지 찾아온 MBC 구단 고위 관계자 앞에서 “2년 후에는 군문제를 해결하고 꼭 MBC에 입단하겠다”고 말했던 약속을 지켜야 할 차례였다.

MBC는 1985년 신인 지명에서 김용수를 재지명하면서 영입 의지를 드러냈고, 한일은행 소속이었던 김용수는 KBO리그 시즌 개막을 앞둔 1985년 3월 25일에 계약금 2000만 원과 연봉 1200만 원의 조건에 입단계약 사인을 했다.

1985년 해태에 입단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뒤흔든 선동열. 김용수도 프로 진출이 묶이고 말았다. ⓒ스포츠서울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마추어 최대어 투수인 고려대 4학년 선동열이 연고팀인 해태 타이거즈와 입단협상을 벌이며 이견을 좁히지 못하면서 프로와 아마추어 야구계의 갈등이 폭발했다.

선동열은 해태와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결국 2월 26일 실업팀 한국화장품과 계약했다. 3월 16일에는 실업리그 개막전에 등판하기까지 했다.

해태 팬들은 해태 타이거즈 구단에 쉴 새 없이 전화를 하며 선동열 영입을 종용했다.

해태는 불타오르는 여론을 이기지 못하고 선동열 측과 협상 테이블을 다시 마련한 뒤 3월 25일 계약금 1억3800만 원, 연봉 1200만 원의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면서 전격적으로 선동열과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그러자 이번엔 아마추어 야구를 관장하는 대한야구협회에서 반발하고 나섰다. 프로-아마 협정에 ‘실업팀에 등록된 선수 중 대학 졸업자는 2년, 고교 졸업자는 3년이 지나야만 프로에 입단할 수 있다’고 명시된 부분을 근거로 삼았다.

이에 KBO는 “아마추어 선수 등록은 4월 1일을 기점으로 그 이후에만 인정할 수 있으며, 선동열의 프로 계약은 그 이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며 맞섰다.

그때는 프로야구와 아마야구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절. 결국 대한야구협회는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문제는 대한야구협회가 선동열뿐만 아니라 MBC와 계약한 김용수, 농협에 입단했다가 다시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에 입단하게 된 투수 민문식까지 한묶음으로 처리하려고 한 부분이다.

김용수는 이미 실업야구에서 2년간 활약했기에 선동열과는 사례가 달랐다. 하지만 대한야구협회는 이미 시즌 개막에 앞서 김용수가 한일은행 선수로 등록한 뒤 MBC와 계약했기 때문에 KBO리그에 넘겨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는 사이 1985년 페넌트레이스는 개막됐다.

4월 중순 KBO와 대한야구협회 수장들이 만났다. 프로-아마 협정서에서 해석을 달리하는 모호한 규정을 보완해 새로운 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하면서 파국은 면했다.

정부 차원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체육부가 중재에 들어갔고, 결국 해태 측에서 “6월말까지 선동열을 등판시키지 않겠다”는 각서까지 제출하면서 대한야구협회도 소송을 취하하기에 이르렀다.

“저는 사실 2년간 실업에서 뛰었기 때문에 MBC에 입단하는 데 문제가 없었지만 선동열 문제 때문에 저까지 프로 진출을 할 수 없게 엮인 거였죠. 그래서 저는 선동열보다 한 달 가량 앞서 5월 말에 징계에서 해제돼 뒤늦게 MBC 유니폼을 입게 됐습니다.”

김용수의 얘기다.

1984년 MBC 청룡 사령탑으로 부임한 어우홍 감독. ⓒ스포츠서울

◆1984년, 초대 받지 못한 가을야구

MBC 청룡은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 실패 후 팀의 변화를 모색했다. 11월 5일 어우홍 감독을 새로운 사령탑으로 맞이하고, 12월 12일에는 포수 유승안을 해태로 현금(1500만 원) 트레이드했다.

그러나 1984년 역시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개막전 패배 후 4연승으로 단독 선두에 나섰지만, 그 이후 4월말까지 12경기에서 1승11패로 최악의 부진에 빠졌다. 5월에 15승1무7패로 반등의 기회를 잡는가 했으나 결국 전기리그에서 27승1무22패(승률 0.551)로 3위에 그치고 말았다.

후기리그에서 7월에 10승6패를 거두며 선두싸움을 벌였지만 또 뒷심 부족을 드러내며 24승26패(승률 0.480)를 기록, 4위로 처졌다.

1984년 가을, MBC 청룡은 한국시리즈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안방인 잠실을 한국시즈 무대로 내줘야만 했다. ‘불세출의 투수’ 롯데 최동원이 4승을 거두며 롯데 자이언츠의 첫 우승을 이끄는 장면을 물끄러미 지켜봐야만 했다.

1985년 1월 MBC 청룡 이종도가 OB로 현급 트레이드됐다. 청룡 팬들에게 충격을 안겨 준 트레이드였다. ⓒ두산베어스

◆1985년 김용수 정삼흠 박흥식 입단…이종도 이해창 김용운 트레이드

다시 후폭풍이 몰아쳤다. 11월 20일 삼미 슈퍼스타즈의 외야수 최홍석을 데려오면서 1루수 김바위를 내주는 1대1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김상훈이 주전 1루수 자리를 꿰차면서 김바위의 포지션이 애매해졌기 때문이다.

1985년부터는 대전에서 3년간 둥지를 틀었던 OB 베어스가 프랜차이즈를 서울로 옮기는 첫해. 잠실야구장은 MBC가 단독으로 홈구장으로 쓰고, OB는 동대문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합의가 됐다.

대외적인 변화만 있는 게 아니었다. 1985년 새해 벽두부터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MBC발 트레이드'가 다연발로 터졌다.

우선 1월 16일 이종도를 현금 1800만 원에 OB로 트레이드했다. 이종도는 ‘원년 개막전 만루홈런의 사나이’. 청룡의 상징적인 선수였기에 팬들의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월 31일에는 원년 개막전에 이종도에게 만루홈런을 선사한 삼성 좌완투수 이선희를 받아들였다. 반대급부로 ‘쌕쌕이’ 이해창을 삼성에 넘겨줬다. 2년 전 김용수 집을 찾아가 "MBC에 입단하라"고 설득했던 이해창은 막상 김용수 입단 직전에 청룡을 떠났다.

3월 14일에는 롯데와 포수끼리 교환을 했다. 김용운과 현금 300만 원을 내주고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 국가대표 포수 출신이자 국내 최고의 수비형 포수 심재원을 받았다.

이종도는 노쇠화를 이유로 은퇴를 시키려다 이웃집 OB 김성근 감독의 요청으로 현금 트레이드했고, 이해창과 김용운은 연봉협상에서 마찰이 일면서 내보낸 케이스였다.

MBC 청룡이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영입한 재일교포 내야수 유고웅. ⓒ스포츠서울

1983년 재일교포 제도가 도입된 뒤 6개 구단 중 유일하게 2년간 한 명도 쓰지 않고 시즌을 치러왔던 MBC는 내야수 유고웅을 처음으로 영입했다. 내야진을 강화하겠다는 복안이었다.

용을 마스코트로 삼아 자매결연을 하게 된 주니치 드래건스 구단이 MBC 청룡의 요청에 1군과 2군을 오가던 재일교포 유틸리티 내야수 유고웅(일본명 야나기자와 다카오)을 보내준 것이었다. 어우홍 감독은 3루수 이광은을 외야로 돌리면서 유고웅을 3루수로 활용해 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유고웅은 3루수로서 어깨가 약해 결국 2루수인 김인식이 3루수로 이동하고, 유고웅은 2루수를 맡게 됐다. 4시즌 동안 통산타율 0.245에 그쳤을 만큼 타격이 약했다.)

1985년 MBC 청룡 신인으로 입단하자마자 9승을 올리며 기대를 받은 '부엉이' 정삼흠. ⓒ스포츠서울

1985년에는 굵직한 신인들이 대거 들어왔다. OB가 연고지를 서울로 이전하면서 신인드래프트도 종전 2대1 방식에서 1대1 방식으로 수정됐다. 아울러 동전던지기를 통해 라운드마다 우선권을 가렸다.

MBC는 동전던지기에서 4연속 이기면서 알짜 선수들을 선지명하는 행운을 안았다. 1순위로 중앙고 시절 광주일고 선동열을 꺾은 국가대표 출신 '투타 이도류' 안언학(중앙고-고려대)을 먼저 지명했고, 외야수 박흥식(신일고 한양대), 투수 정삼흠(명지고-고려대 중퇴-포철)과 예병준(동대문상고-농협-상무), 외야수 윤덕규(대광고-상업은행), 내야수 유지홍(선린상고-고려대) 등을 줄줄이 지명했다. 아울러 김용수도 재지명하는 등 9명을 선택했다.

이들은 대부분 LG 트윈스 시절까지 큰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부엉이' 정삼흠은 마운드의 축으로 성장해 1990년과 1994년 김용수 등과 더불어 LG 트윈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공을 세운다.

반면 OB는 1985년 1번 후순위로 지명한 김형석(신일고-중앙대) 정도가 훗날 큰 활약을 한 선수로 남았다.

1985년 후기리그부터 MBC 청룡 지휘봉을 다시 잡게 된 김동엽 감독이 심판에게 항의하는 모습. ⓒKBO

◆어우홍 감독의 중도하차…다시 돌아온 김동엽

MBC는 1985년 ‘화끈한 야구 승천하는 MBC’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하지만 그해 MBC의 야구는 화끈하지 못했고, 청룡의 승천도 기대할 수 없었다.

이해창과 이종도 등 간판 타자들을 트레이드하며 체질 개선에 나섰지만 타선의 축이 무너지면서 팀타율(0.246)은 꼴찌에 머물렀다.

마운드 역시 전년도 15승을 거둔 에이스 하기룡이 발목부상으로 이탈하면서 5승에 그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좌완 유종겸이 10승 투수로 체면을 지켰을 뿐 트레이드로 영입한 이선희는 5승7패 2세이브로 과거의 명성을 살리지 못했다. 신인 정삼흠이 9승을 올린 것이 희망이라면 희망이었다.

김용수가 시즌 도중 뒤늦게 가세했지만 6경기 등판에서 1승2패, 2세이브를 거둔 후 타구에 무릎을 맞고 시즌아웃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MBC는 결국 전기리그에서 24승31패(승률 0.436)를 기록했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고별무대인 전기리그에서 최하위 자리를 깔아준 덕분에 가까스로 탈꼴찌(5위)에 성공했을 뿐이었다.

MBC는 전기리그가 끝나가던 6월 17일 어우홍 감독을 해임했다. 전기리그 잔여 3경기는 한동화 감독대행이 지휘했다.

그러면서 새롭게 영입한 사령탑은 김동엽 감독. 1983년 한국시리즈 우승 실패의 책임을 물어 결별한 뒤 불과 1년 반만에 다시 손을 맞잡았다.

그러나 ‘빨간장갑의 마술사’는 마술을 부리지 못했다. 시즌 도중 홈경기 때도 ‘합숙훈련’을 지시하면서 기혼 선수들의 반발을 샀다.

게다가 외야수 김정수와 신인 안언학을 투수로 키우려고 했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유고웅 영입으로 이광은을 3루수와 외야수로 오가게 하면서 혼란만 가중시켰다.

후기리그에서는 20승1무34패(승률 0.370)로 최하위로 내려앉았다. 삼미를 인수해 후기리그부터 뛰어든 청보 핀토스와 새로운 서울 라이벌 OB 베어스에게조차 뒤진 꼴찌라는 점에서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는 MBC였다.

MBC 청룡 김상훈은 입단 이듬해인 1985년 처음 3할 타율을 작성하며 눈길을 모았다. ⓒ스포츠서울

위안거리라면 1984년과 1985년 김재박과 이광은이 2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것이었다.

‘그라운드의 여시’ 김재박은 0.313의 타율로 팀 내 1위(리그 6위)를 차지했다. 정교한 타격,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수비뿐만 아니라 그해 50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에 올라 김일권의 3년 연속 도루왕 독주에 제동을 걸면서 유격수 황금장갑을 받았다.

‘올라운드 플레이어’ 이광은은 1984년에는 3루수로, 1985년에는 좌익수로 황금장갑을 품었다. KBO 최초로 포지션을 변경하며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선수가 됐다. (1985년까지는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좌익수-중견수-우익수로 나눠 시상했다. 1986년부터 외야수 3명을 포지션 구분 없이 수상자를 뽑았다.)

MBC 청룡 간판 선수 이광은의 수비 장면.

김상훈은 입단 첫해인 1984년 초반 기회를 많이 받지 못하면서 타율 0.271(277타수 75안타)에 그쳤지만, 2년째인 1985년 0.300(360타수 108안타)의 타율로 김재박에 이어 팀 내 2위에 올라 '미스터 청룡'으로 가는 길을 닦았다.

MBC 청룡은 1986년 KBO리그 역사를 뒤흔드는 슈퍼루키의 등장으로 다시 한번 승천의 꿈을 꾸기 시작한다.

[엘팬알백] ⑫편에서 계속

김용수의 분신과도 같은 41번. 김용수는 1999년 KBO 최초로 영구결번식을 한 선수가 됐다. ⓒLG트윈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유튜브 '이재국의 와일드피치' 운영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